2025년 12월 27일 토요일

거룩한 제사장의 거룩한 제물로서의 우리 기도

"인자를 인해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악평하여 너희를 버릴 때에는 너희가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reward)이 큼이다"(눅 6.22,23). "주님과 그 복음을 인하여"(막 8.35) "세상이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악평하여 버릴 때" 그 자체가 축복이니,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 것은 하늘에서의 상이 엄청나다"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당하셨고 지금도 그 '몸'된(주님 친히 그 '머리'가 되시므로) 교회를 위하여 또 교회와 함께 받고 계시는 모든 고통 고난에 참여하여 주님의 고난과 함께 함이라는 단순한 그 이유 때문이니, 이것이 굉장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입니다.

일국을 호령하는 왕이나 황제가 한 때 어려움을 겪었을 당시 그 고난에 돔참해 주었던 신하에게 (나중에) 그 공을 포상하여 보답하는 것과 같은 뜻이기에, 그 정황을 참작하면 위의 주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심이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롬 8.26)이라 한 대로, 이 주님의 "형언할 수 없는 탄식"의 고통에 모든 <제사장적 기도>를 하는 기도자는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제사장>적이라 하는 이유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자기를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 바쳐져 그(들)를 살리는 일을 담당하는)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합리적) 예배>"(롬 12.1)라 한 대로 그런 성격의 간구이기 때문.

여기 "성령"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하나"(요 10.30)로 계심이 "성령"이시지만, 성자께서 성부의 "형상"(고후 4.4/골 1.15)이신 까닭입니다. '실체'를 대변하는 '형체"이심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에 함께 참여함(방금 설명한 "주님의 고통 동참/同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복음 전파 사업을 위한, 심장을 쥐어짜듯 하는 우리의 눈물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산 자"는, 자아중심으로서 자기를 위하는 자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관계와 관계 속에 맞물려 있기에 반드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함>으로써 상호간 "하나"(요 10.30)됨이 생명 자체이기에 그렇습니다. 비록 자기 신변에 관련되는 일로 기도 제목을 삼는 경우라도, 반드시 하나님 소유로서의 "나'인 것이지 내것으로서의 '나'가 아닌 까닭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고전 10.31)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과 제물로서의 우리 기도인지라 이는 실로 형용할 수 없는 막중한 가치이기에, 베드로는 "말씀 전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행 6.4)을 첫쨰로 앞세운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그 가르치심을 직접 몸으로 느끼면서 배운 이러한 사도들의 지도 아래 세워진 초대교회이기에, 얼마나 기도 생활에 비중을 둔 일상 생활이었는지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서로 분방(부부가 방을 따로 쓰는 것)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방)하라"(고전 7.1-5) 했던 편지 문구로도 충분히 확인됩니다.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ㅡ부부라도 <방을 나누기까지> 기도를 일상화했던 증거입니다. 오늘날 기도를 게을리하는 우리가 마땅히 귀담아 들어야 할 경고라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가 지적했듯 우리는 문자 그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살전 5.17)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삶도 적당히 누리면서 영생의 미래도 보장되는 그런 안일하고 편한 것이 천국 복음이 아닙니다.

자빠졌으니 당장 일어나야 하고 내가 일어났으면 다른 사람도 일으켜 세워 주기에 여념이 없는 그런 절박성으로 특징지어져 있는 것이 지금 이 세상입니다. 악령 원수들이 천하에 넘치게 깔려 있어 하시라도 덮쳐오는, 밀어닥치는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는 영적 싸움 마당인 것입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기를"(마 6.13) 구하라 하심도 같은 뚯잆니다. 사탄이 장악한 세상이 아니라면 "시험과 악"에 대해 이 정도로까지 심각해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함도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림을 인해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이 있기에 그러하며, "마지막 아담" 안에 있지 않는 한에는 사람마다 "죄의 몸"(롬 6.6)이 되어 있음도 이에("육의 몸"ㅡ고전 15.44/"육신"ㅡ롬 8.13)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위한 끊임 없이 올리는 기도가 필수입니다. "기도나 하지"가 아니라, "기도부터 하는" 것을 몸에 익힌 사람이야말로 실로 <복 있는 자>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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