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게 생각하고 쉽게 설명해야 하는 것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것이 있으니, 그것은 "상대방중심으로 살기"로 모든 사람이 서로 약속하는 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대신에 모두가 나를 위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은 이상주의 실천은 없는 것입니다. 소위 공산주의가 이상주의인 것만은 사실이나 이렇개 단순히 생각하여 쉽게 설명할 줄을 몰랐기에 "20세기 최대 악마의 화신"으로 전락하는 환멸의 비애를 맛보는 불행을 겪은 것이니 이는 누구나 시인하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솔선 수범의 상대방중심으로 나가는 약속 운동을 하는 대신, 미련하게도 강요, 강제하는 것으로 시종일관하다보니 "이보다 더한 악마 짓을 일찍이 구경한 적이 없다"라는 소리만 듣게 된 것입니다. 쉽게 설명해서 사람마다 성자, 성인이 되자는 약속을 이행하는 솔선수범입니다. 이것은 공허한 헛구호가 아닙니다. 파급력이 확실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창조주 하나님이 정해 주신 "양심"이라는 불문율이 새겨져 있기에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 이 "약속 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으로서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는 절대불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은 오늘날 3위1체와 3운법칙으로 충분히 입증되기에 서두에서부터 소개한 것입니다.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 정풍 내지 정화운동이라 해도 좋으나 대국적으로 보면 전도 활동입니다. 오늘 죽울지 모르는 인생인데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을 확신하니까. 선한 행실을 앞세우는 건전한 전도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무턱대고 영생 구원을 말함이 아니라 3위1체에 의한 생명의 법칙 소개 또는 구체적인 삶의 방향(자아 지향이 아닌 상대방 지향) 제시라 해도 무방하기에 그러합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남을 생각하는, 정다운 이웃, 친절한 사람 만들기 운동입니다. 상대방중심이니까 그런 것이야 말하나마나입니다. 세계 평화 운동이기도 합니다. 반복하지만 나 한 사람 나 위하지 않음이 만인의 나 위함의 혜택을 누리게 함으로 전환되어 오는 극적인 역전/逆轉을 사람마다 맛보고 직접 체험하는 희열을 누리게함이 이 약속의 특점이자 장점인 것입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니고 남이 손해 보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더 풍성한 삶"(요 10.10)을 향유하는 방법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합니다. 자기 상대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모두가 나를 위하는 것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나를 위함보다 여러 갑절로 그 수백, 수천, 수만, 수억배로 위해지는 기적 아닌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단 모두가 이 약속 운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하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다 함께 <우리>를 위하는 운동입니다. 전체 인류 사회로 하여금 훈훈한 훈풍에 휩싸이게 하는 운동입니다.
"그러면 여기 노숙자가 있는데 내가 가진 것 다 그에게 주어야 하느냐" 한다면, 부유함 자체를 성경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눅 6.24). 죽음의 세상이므로 이런 동물적 육체(신령한 몸을 잃어버린)로서의 삶이란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시니까(:25-35). 따라서 이런 것을 문제 삼는 것부터가 무의미.
"노숙자, 운운" 하기 전에 자기의 부유함 또는 "세상에서 산다"는 의식부터 즉각 청산함이 시급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자기 생명(하나님 앞에서의 영생의 희망과 기대)마저 심각한 위협을 받으니까. 하나님의 복음 전파 사업에 희사할 계획이 되어 있지 않다면 사회 공익 사업에 헌납하는 것이 최선책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훌(사회 또는 국가 차원에서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 상대로 구제 활동을 하는 것) 사업체를 설립해 운영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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