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5일 금요일

멜기세덱이 오늘날 21세기에 크게 부각되어야 하는 이유


멜기세덱이란, 바로 <아담이 살아난 것>을 말함이라 전에 지적한 적이 있기는 하나 이를 오늘날 "천사의 복음" 시대에 본격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싶어 다시 씁니다. 6천 살(6,000세/歲)이 된 현존 인물인데도 21세기 오늘날 "천사의 복음" 시대에 그냥 덮어 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저촉되는 문제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다"(히 5:11-6:20) 했으니 제대로 설명하면(ㅡ해도) 능히 알아들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 하고는 더 이상 설명 않고 지나갔으니 지금까지 사탄의 사악한 거짓말의 "바벨론 신학"이 판쳐 온 지가 2천년이 흘렀는데 더 이상 침묵할 수는 없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라는 결론이니 "천사의 복음" 시대에서는 싫든 좋든 마땅한 공론화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으로 "완전한 데 나아갈 일이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할 것"(히 5:11-6:20)이라 했으니 정히 때는 이제 온 것입니다. "아비,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히 7:3) 멜기세덱이니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역사가 없지요. 아담 외에는.

우리 주님께서 "멜기세덱의 빈차/班次(계열, 제사장 직무 수행에서의 차례/순서 등을 의미)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다" 함은 "마지막 아담"이 되시기 위해 즉 범죄로 죽어 없어진 "아담"의 빈 자리를 채우시려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니, 모든 면으로 아담과 같이 되셔야 마땅함을 의미하기에 그러합니다.

아담이 왜 또 제사장 역할이어야 하느냐 하면(아담으로서는 죽어 없어진 존재이고 별도의 이름으로서의 멜기세덱이나) 아담을 인해 모든 인간이 "죄의 몸"(롬 6:6)으로 돌연변이해 있어 하나님 앞 죄인인지라 그 중간의 조정자로서의 위치이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아담 스스로 범죄한 것이면 이런 자리가 결코 어울릴 수가 없지만 여자와 한 몸이 되어 있는 운명적인 측면이 감안되어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4)고 성경이 판단함과 같은 까닭에, 여자의 죄에 동참(이는 몸된 교회를 위한 머리로서의 메시야 우리 주님의 대속적 죽으심의 예표/豫表 같은 것)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자처럼 일단 죽음에는 이르렀으나 멜기세덱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났고 그리하여 하나님 앞 제사장 구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은 에녹과 엘리야는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과 관련된 의미의 부활이지만 멜기세덱의 경우는 아담 자신이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아예 죽음을 보지 않음은 아니고 일단 죽은 다음의 부활함입니다. 그러나 멜기세덱, 에녹, 엘리야 모두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반으로 한 "죽음으로부터의 승리"("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독을 뿜어 내는] 것이 어디 있느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ㅡ고전 15:55-57)인 것.

"생명의 끝도 없다"고 결론이 난 맬기세덱을 통해서도 확인되었으니 아담이 영생하는 자로 즉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에 이제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성의 영혼을 주셨는데도 썩어 없어지는 동물적 육체를 주셨다고 말하는 "미친 마음"(전도서 9:3)이 부끄럽지도 않나요? 하나님을 그렇게 이상한, 이해 못할 분으로 세상 앞에 광고해 놓고는 양심의 가책도 없어요? 아담 범죄 이후 사탄이 인간 세상읗 지배하면서 그 원수의 거짓말에 우리는 이같이 한없이 놀아난 것을 창피스러워하는 마음도 없나요? 이제는 그런 정처 없는 방황을 끝낼 때입니다.

따라서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존재는 하고 살아 있는 인물이지만 아담으로서는 "범죄자"요 "죽은 자"로서 역사적으로 종결되었고 끝난 것입니다. 더 이상 아담으로는 인식되지 못하므로 히브리서 기록자(여러 가지 정황으로 바울 사도로 인정되는)가 "듣기에 둔하다", "어렵다", 어린 아이", "장성한 자가 아니다" 등 우회적인 표현으로만 일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신학으로써 사탄 역시 필사적으로 막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껏 그루빔(cherubim, 그룹의 복수형) 중 하나로 속여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본 자로 인식시켜 왔는데, 왕년에 아담의 보좌역(천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자기 위상에 치명타가 된다는 판단에서 그러했던 것. 그러나 거짓말로 온통 속여 온 사탄의 새력을 한 판 싸움에 실력으로 꺾어버리고 "천사의 복음"을 확립한 천사들 앞에서는 모든 것이 여지 없이 폭로되는 오늘날 순간입니다.

인간 수명이 지금처럼 단축된 시점은 노아 대홍수 이후입니다. 홍수 이전에는 아담(930세), 므두셀라(969세), 노아(950세) 등 다 8,9백 년 수명이었지만 홍수 사건을 기점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노아의 아들 셈이 600세로 죽자 그 후손들의 수명 역시 점차 줄어들어 아브라함은 175세까지만 생존했습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지만, 이 시기 일반적 평균 수명은 7,80세 정도였습니다(시 90:10)

인간 수명이 아담 때는 천년 가까이었다가 세월이 갈수록 자연적으로 짧아져 오늘처럼 된 것이 아니니, 애초 천년 가까운 수명이 하나님 정하신 것이면 즉 하나님의 뜻이면 세월이 오래 되었다고 변동이 생기는 일이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은 인간(아담)을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즉 신령한 몸으로 만드셨는데 아담의 범죄로 "죽은 자"(마 8:22) 곧 현재의 동물성 육체로 전락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신령한 몸의 기력이 결딴나버리면서 그 막강했던 기운이 세월 따라 서서히 소멸되어 가는 과정의 자취였던 것입니다. "그래 그게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이냐! 어쨌거나 구원만 받았으면 된 것 아니냐!" 혹자는 그렇게 말하겠지만, 이것이 바로 "바벨론 신학"과 "천사의 복음" 그 차이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곧바로 생사 문제인 바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바벨론 신학(사탄의 거짓말)을 죽음이라 하는 것은, "믿기만 하면 영생 구원"이라고 뭉뚱그려 밑도 끝도 없이 얼렁뚱땅 얼버무림에 있습니다. 이는 아주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생명은 이와 아주 판이합니다. 아담의 "범죄와 죽음으로 인해" 구원이 불가결하게 되었은즉 "<죄를 회개하고 다시는 범죄하지 말아야> 영생으로 복귀되는데 지금 당장 "죽은 자"이므로 가장 먼저 "산 자"부터 되는 것이 시급하고 이에는 새로 창조됨이 필연이라 따라서 이 하나님의 선물을 은혜로써 믿고 받기만 하면 되는데, 이렇게 산 자로 회복된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아담의 범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다는 자유의지의 결단) 그 "뜻을 행하기"(마 7:21) 시작함이 필수"요 이것으로 구원이 보장된다"는 바로 이런 인식 차이가 핵심이고 여기서 정작 생사가 가름된다는 점입니다.

죽음의 바벨론 신학에서는, 믿어 일단 새 창조만 되면 그것을 끝이요 완성이라고 단정해버리므로 이것이 속임수요 멸망의 함정인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을 덮어버리니 죽음의 <결과>는 백날 가야 봉합되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되풀이만 될 것뿐입니다. 전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모든 인간을 거짓말로 꾀어 멸망의 함정으로 내어모는 사탄의 책략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사는 존재로 처음부터 창조되지 않고 우리처럼 한낱 덧없는(더덥는ㅡ발음에 주의, "너무 순간적이어서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무상/無常 인생으로 만들어졌다면 결단코 멜기세덱으로 변신하여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마음에 새깁시다.

영원 불변의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3)라는 말이 생겨날 수가 없음을 상기/想起합시다.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2) 라고 하며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4)면서 감히 일개 인간, 한 <사람>임을 명시하면서까지!

그리고 또한 명심합시다. 자연계 동산인데 사람이 먹으면 영생하게 되는 신령한 나무가 존재함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나요! 하나님 말씀 그것도 첫머리 창세기에!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그러면 그 한 마디 거짓말은 이후 모든 기록이 되어 나오는 것도 다 거짓말이라는 <선언>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니 거짓이 아니라면 진실일 수밖에 없고, 진실이니까 만유의 기본 원리가 짝의 법칙으로서의 3위1체일 수밖에 없고, 이 <상반/相反은 상보/
補>에 따라 자연계 물질과 더불어 영체/靈體인 초자연계로서 에덴이라는 "하나님의 동산"("하나님의 동산 에덴"ㅡ에스겔 28:13/31:9)이 이미 창조되어 있었고 그 에덴 동편에 또 아담을 위해 한 "동산을 창설"(창 2:8)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라는 표현이 연달아 두 번 중복되어 강조됩니다. 이런 에덴의 특성상 아담이 신령한 몸이 아니고는 거기가 아담의 보금자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는 것은 처음의 자연계 동물성 육체("6일" 째에 동물 창조를 마치시고 맨나중에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은즉)가 에덴의 신령한 속성으로 즉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음을 의미함입니다.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에 의해 한 번 결정하심은 영원불변이라 아담은 영생하는 자로 정착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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