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3일 화요일

자아중심 아닌 상대방중심은 관점/인식 차이 및 의지 유무로 좌우될 뿐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과 바벨론 신학(사탄의 거짓말)의 차이는 <초대교회 432>("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공용/共用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ㅡ행 4.32)에서 당장 드러납니다. "영광의 몸"(빌 3.17)/ "신령한 몸"(고후 15.44)이 아닌 동물성 육체의 특징은 <자아중심>의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 내지 집착>("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ㅡ눅 14.33)에서 완연히 드러나집니다.


그러나 구원 받음의 증거는 <상대방 중심, 하나님 중심>이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이므로("우리 중에 누구든 자기 위해 사는 자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ㅡ롬 14.7-9), 초대교회는 당연히 그 증거로서 <행 432>가 두드러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자칭 "교회"로서, 우리가 아는 한 이 소중한 초대교회 전통을 따르는 데라고는 단 한 군데도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은 무엇이냐, 초대교회와 오늘날 교회가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니 이는 전자는 "자기 부인"의 하나님 중심이요 후자는 자아중심이라는 그런 극명한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소위 "교회"는, "자기 소유"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구원 받았다는 증거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그 뜻인가요? 그러합니다.  <달리 설명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행 432>는 눈 씻고 찾아 볼려야 볼 수 없고 구경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이 현상에 대한 유일한 풀이가 있다면,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에 사로잡혀 "구원 받았다" 하지만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믿는다"고 하나 믿는 것이 전연 아니었다는 것.

"저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ㅡ롬 2.6-9)을 버리는 자"(디도서 1.16)라는 판단 기준에서 벗어날 재주가 없습니다. <행 432>라는 초대교회적 "행위"는 구경도 할 수 없으니,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을 못합니다.

자아중심이 죄의 정체요 뿌리입니다. 성경에서 정확히 집어 말하는 "욕심"("<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ㅡ약 1.15)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관된 상대방 중심에서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본능적> 삶이 아닌 <이지적> 삶의 특징인 것입니다. 본능적이고 기계적 삶은 짐승에게만 해당됩니다.

"해당된다"라는 말은 애초 하나님의 창조 결과로서 처음부터 그렇게 작동되도록 정해져 있는 정상 작용이라는 뜻입니다. 기계 작용은 생존을 위한 최적 작동으로 그 이상의 욕구는 없으니까 그래서 그 자체가 선/善(좋은 것)("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ㅡ창 1.31)인 것입니다. 짐승의 욕구는 단지 생존을 위한 기계 작용이므로 하나님 창조 의도에서 벗어남이 없기 때문에 좋은(선한) 것입니다.

허나 인간 등 영적 존재는 그 지향하는 바가 이 기본 욕구에만 머물지 않고 무한정입니다. 용(뱀)이 아담을 <시기하여> <미워하고> 종내에는 <살인>("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ㅡ요 8.44)까지 하게 되어 범죄자가 된 것이 그 예입니다. 따라서 무릇 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피조물일일진대 모름지기 상대방 중심으로 행해야 한다는 <삶과 생명의 법칙>을 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법칙은 그 기본 바탕이 언약/言約, 약속에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언약인 것입니다. "내가 너를 창조한 것은 내가 전적으로 너를 위할 수 있고 나를 위함이 아니니까, 고로 너는 네 자신을 위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내가 너를 전폭적으로 위해 주므로) 오직 나만을 위함으로써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여 내 명령/계명("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있는, 머무는, 사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ㅡ요 15.10)을 따라 네 이웃들을 위하는 언행심사 일체로 임하는 상대방 중심으로만 나가고 자아중심은 일절. 배척하라"는 분부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대방중심"과 '자아중심'을 분명히 가려서 행동하는 것이 어른과 아이, 짐승과 사람,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과의 <하늘 땅의 엄청난 차이>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은 마귀의 거짓말로서 인생들을 속여 멸망시킴이 목적이므로 이런 엄숙한 이치를 감추기에 급급하여 <자아중심> 일변도의 "하나님 시인(믿음)", "구원 받음" 심지어는 "하나님 잘 믿어 축복 받아 잘 산다"는 황당무계까지 지어내어 퍼뜨린 것이 오늘날까지의 역사입니다.

애초 인간 창조의 기본이셨던 신령한 몸의 특색은 자유·평등입니다. 기계적 작용인 짐승들의 동물성 육체처럼 죽음에 얽매이지 않고 굶주림, 헐벗음 등등에 얽매이지 않는 그런 자유를 똑같이 누리니까 평등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동물성 육체라는 일대 참사/慘事, 대형 사고를 만나 "죽은 자"(마 8.22)가 되어 있는 아수라장 속에서의 고통 고난의 아우성 가운데에서나마 삶의 흉내라도 내겠다면 모름지기 이 평등, "평균"(고후 8.13,14)케 하려는 노력, 본보기만큼은 교회가 나타내어야 마땅하고 이는 상식에 속합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행 432>에 힘썼고 충실했던 것입니다.

비록 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21세기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천사의 복음" 시대 삶/생활 양식/樣式("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ㅡ마 19.21)에 최대한 관심을 기울여 힘써야 마땅한 줄로 압니다. 우리 주님 분부하신 대로이니 지체 없이 앞 다투어 행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믿음", "구원 받음''이 이 순간에라도 말짱 물거품으로 끝남을 부디 명심해야.

"잘 믿어 축복 받아 잘 산다"는 미신/迷信 아니, "바벨론"의 올무, 함정, 덫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소위 "잘 믿음"은 "십일조" 충실히 내는 따위의 '무의미"를 가리킴입니다. 10분의 1만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나의 1백%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나의 구원 받음입니다. 주님 친히 자기의 전부 즉 100%를 내게 주심으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니까.

바로 이것이 "한 영"(고전 6.17)됨 즉 "하나"(요 10.30)됨으로서 우리의 구원 받음입니다. 이 "하나"됨의 구조는 "한 몸"(창 2.24)됨과 같으니, 즉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 남편 것은 아내의 소유됨과 같아,  "한 영"에서는 삶/생활 자체가 그렇게ㅈ 되는 것 곧 <상대방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 중심이 "거룩함"(성결)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했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히 12.14) 했으니, 하나님을 아무리 시인한다 해도 자아중심이면 "행위로는 부인함"(디도서 1.16)이니까 모든 것이 도로무공/徒勞無功(십일조 열심히 내고 교회 집회 열심히 나가도 헛되이 애만 쓰고 아무런 보람이 없음)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이든 사람 사랑이든 말로만 끝나면 위선/僞善(겉치레)이요 자기 기만이지만 행위("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 누구든 그에게 '평안히 가라, 따뜻이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ㅡ약 2.15-17/요일 3.18)가 따름으로써 그 진정성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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