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진적인 창조" 또는 "진화"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는 한 번만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창조는 항구적입니다. 영원히 존속 못할 것이면 아예 처음부터 창조하시려는 마음부터 품지 않으셨을 것이니까. 단 한 번만의 창조이고 영속적이어야 할진대 인간은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 즉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셨다는 결론은 요지부동입니다.
그런데 인간 창조가, 처음부터의 첫 창조가 아니고 여러 생물(먼저 식물 그리고 다음이 동물)을 창조하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최종 작품이셨기에, 즉 동물의 여러 육체를 만들어 가셨던 연장선상에서의 인간의 동물적 육체이었기에, 침펜지 등 유인원 창조에 연이은 순서의 인간 창조이셨던 것.
여기에 영적 요소를 첨가시키신 것이 우리 영혼의 조성이셨고("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ㅡ창 2.7) 그러신 다음 처음 창조하셨던 영계(초자연계 즉 물질 세계와 대칭)로 인간을 옮기시어 거기서 영적 속성을 갖추게 하셨으니 거기서 아담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쳤던 것이기에 이런 2중성을 상징하는 생명과 나무(아담의 신령한 속성을 대표하는)와 선악과 나무(애초의 자연 물질계 속성 대표)를 아담이 거처하는 그 에덴의 "동산"에다 지어 놓으시고 후자에의 접근을 엄금하셨던 것입니다. 이유는, <현재의 신령한 몸>이 즉각 취소되고 <이전의 동물성 육체>로 환원되어버릴 위험이 있었기에.
그러나 아담이 이 경고를 무시, 선악과에 손대어 ,아닌게 아니라 동물성 육체로 회귀되어버리자 방법은 단 하나. 아담과 대칭이 되는 또다른 아담을 설정하시어 그로 말미암아 인생들이 원래의 인간 창조의 모습(신령한 몸으로 영생하는 존재)대로 회복하게 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죽은 자"로서의 동물성 육체를 이런 까닭으로 <물려받아,서> 태어나는 운명의 인간을, 이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의 영(혼) 즉 성령("마지막 아담"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을 <물려받아> 다시 나게(거듭 나게) 하는 방법으로써, 망가져버린 <옛> 인간 창조를 이러한 <새> 창조로 뒤바꾸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 받음"입니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우리가 현재 사람(인자/人子)인 것과 같은 이치로 "마지막 아담"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신자/神子)됨이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함이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함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킴입니다. 즉 "하나님의 씨"라 고 한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하나"(요 10.30)되어 계심을 말하는 고로,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만 아니라 동시에 성부 하나님 친히 또한 내 속에 임하심이므로 "하나님의 씨"라는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 곧 "양자/養子"(롬 8.15,23/9:4)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남녀 불문)됨이요("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 우리가 지금은("<지금>"이라고 고쳐야) 하나님의 자녀라...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영광의 몸, 신령한 몸의 모습) 같을 줄 아는 것...
"그 안에 거처하는(있는, 사는, 행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함이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한 것이다...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다...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남이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것이다"ㅡ요일 3.1-10), 따라서 양자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음이 판명될 때는 파양/罷養이 되는 위치임은 당연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실로 서릿발 같은 경고인 것입니다("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goodness)>와 <엄위/嚴威(severity)>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될 것이다"(롬 11.20-22).
죄짓지 말라고 거듭거듭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죄를 지으면 즉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아중심이면, 마귀에게 속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까! 이제까지의 바벨론 신학에 의한 소위 "구원"은 주님과 "함께", "하나"됨을 말하지를 않고 난데없는 "대신 죽음"만 반복하여 "주님 죽으신 덕분에 나는 그 대신 산다"는 식의 거짓말만 반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따로, 나 따로"이므로, <성경과 반대>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음"(행 2.38)은 다름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 친히 내 속에 내 영혼처럼 오시어 영원히 나와 "연합하심으로써"(롬 6.3-5/고전 6.17) 단수의 홑사람(나 하나, 혼자)이 아닌 복수의 겹사람(주님과 함께 "하나"로서의 둘)으로 영원히 내가 존재함입니다.
단 "영으로서의 하나님"(요 4.24)께서 사람되시어 영원히 육체를 입으심인지라 이는 어떤 의미냐 하면, <육체이신 사람>으로서 <내 육체 안에> (마치 영혼처럼) 내 안에 계심입니다. 육체인 사람이 내 육체 안에 있을 수 없지만 오직 한 분 내 주님만 홀로 가능하십니다. 창세/創世 이래 이 유일무이의 색다른 현상이 바로 나의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됨으로써 내 "<죄의 몸>은 멸해져"(롬 6.6) 완전 결딴나버려 망가지는 것이, 성령으로 주님 친히 내 안에 임하여 오시는 순간 엄연한 역사적 사실(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심은 <주님과 "하나", "한 영" 됨>으로서의 내 부활이 되어 영원히 나는 주님을 위하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친히 입증해 보이신 대로 나만 위하시는, 이같은 '삶과 생명의 영원한 법칙'으로 영원히 고착화되니,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4.24)으로 완전히 바꿔짐이 나의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갈 5.25) 것이요 "성령으로 행함"(:25)입니다. 이 효과가 어떤 것이냐 하면, 복제/複製된 "나"라는 인간이 이 만우주에 가득 차 있는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나와 하나되신 주님이 그렇게 만유로서 맘유 안에 계시니까! "풍성한 생명"(요 10.10)이 이런 것입니다. 그득하고, 너넉하고, 푸짐하고, 든든하고, 느긋하고...무엇이라 가히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쩨쩨하게 궁색하개 변변찮게 이 세상을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 만우주의 상속자다운 행동거지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각자로서 <겸손히> 세상에 <군림>합시다.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으며...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바울 사도는 이에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실로 서릿발 같은 경고인 것입니다("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goodness)>와 <엄위/嚴威(severity)>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될 것이다"(롬 11.20-22).
죄짓지 말라고 거듭거듭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죄를 지으면 즉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아중심이면, 마귀에게 속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까! 이제까지의 바벨론 신학에 의한 소위 "구원"은 주님과 "함께", "하나"됨을 말하지를 않고 난데없는 "대신 죽음"만 반복하여 "주님 죽으신 덕분에 나는 그 대신 산다"는 식의 거짓말만 반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따로, 나 따로"이므로, <성경과 반대>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음"(행 2.38)은 다름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 친히 내 속에 내 영혼처럼 오시어 영원히 나와 "연합하심으로써"(롬 6.3-5/고전 6.17) 단수의 홑사람(나 하나, 혼자)이 아닌 복수의 겹사람(주님과 함께 "하나"로서의 둘)으로 영원히 내가 존재함입니다.
단 "영으로서의 하나님"(요 4.24)께서 사람되시어 영원히 육체를 입으심인지라 이는 어떤 의미냐 하면, <육체이신 사람>으로서 <내 육체 안에> (마치 영혼처럼) 내 안에 계심입니다. 육체인 사람이 내 육체 안에 있을 수 없지만 오직 한 분 내 주님만 홀로 가능하십니다. 창세/創世 이래 이 유일무이의 색다른 현상이 바로 나의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됨으로써 내 "<죄의 몸>은 멸해져"(롬 6.6) 완전 결딴나버려 망가지는 것이, 성령으로 주님 친히 내 안에 임하여 오시는 순간 엄연한 역사적 사실(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심은 <주님과 "하나", "한 영" 됨>으로서의 내 부활이 되어 영원히 나는 주님을 위하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친히 입증해 보이신 대로 나만 위하시는, 이같은 '삶과 생명의 영원한 법칙'으로 영원히 고착화되니,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4.24)으로 완전히 바꿔짐이 나의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갈 5.25) 것이요 "성령으로 행함"(:25)입니다. 이 효과가 어떤 것이냐 하면, 복제/複製된 "나"라는 인간이 이 만우주에 가득 차 있는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나와 하나되신 주님이 그렇게 만유로서 맘유 안에 계시니까! "풍성한 생명"(요 10.10)이 이런 것입니다. 그득하고, 너넉하고, 푸짐하고, 든든하고, 느긋하고...무엇이라 가히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쩨쩨하게 궁색하개 변변찮게 이 세상을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 만우주의 상속자다운 행동거지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각자로서 <겸손히> 세상에 <군림>합시다.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으며...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쫓겨 다니며, 떠돌며, 헤매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이다) 저희가 광야와 산/山중과 암혈/巖穴(바위)과 토굴/土窟(흙을 파낸 큰 구덩이)에 몸을 숨기는 환란을 당했으나"(히 11.35-38) 건들건들 유유자적함으로 다 소화해낸 것은,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행 9.31) 나간 때문입니다.
하나님 친히 나의 구원 자체가 되심이니 이는 바로 사람되심 즉 "마지막 아담"이 되심인데 그렇게 "마지막 아담" 되심 그대로, 사람의 육체가 되어 계시는 그대로 내 안에 오심을 가리켜, "나의 구원 받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사람의 육체"라 하는 것은 현재의 이 몸과 같은 동물적 육체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직접 목격한 대로, 동물성 육체는 당장 눈이 멀어버리는, 정오의 해보다 더 강하게 발산되는 영광의 광채(행 26.13)의 신령한 몸이니까, 180도로 인식전환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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