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8일 금요일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고 구원될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ㅡ엄중 경고



지금까지 설명해 온 모든 것의 총정리ㅡ모든 내용은 이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양자됨(롬 8:15,23)



그러므로 죄와 진노와 죽음의 세상으로서 
오직 구원되어 영생으로 회귀하는 것만이 목적인즉
모름지기 이 세상에 미련 두어 연연하지 말 것이며
오직 주님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한 나날이 되는 것이
메시야 예수님 믿고 구원 받은 이 세상 여정(旅程)인 것이다
아담 범죄의 결과가 죽음만 아니라
아담을 죽인 살인자 마귀의 지배 통치 아래 있음인즉
이 저주 받은(창 3:17), 하나님 진노 아래 있는(시 7:31/마 3:7/요 3:36)
폐기된 이 세상을 "만지거나 맛보거나, 붙잡는"(골 2:21),
즉 사랑하여 살고파 하는 미련에 사로잡힌 자 화가 있다(요 12:25)
생명 아닌 죽음을 선호했으므로 그대로 영원토록 될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 구원은 범죄 전 아담의 초자연계 몸(죽지 않는) 상태 환원인즉
아담처럼 또는 악령들처럼 범죄할 경우 똑같은 파멸임은 당연하다
단 우리 구원이 완성된 것이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것이 아니기에
십자가에 달린 채 회개한 강도가 넉넉히 구원되었음을 입증하신 것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눅 23:43)이라는 약속이신 것

우리 구원은 범죄 전 아담의 초자연계 몸(죽지 않는) 상태 환원인즉
아담처럼 또는 악령들처럼 범죄할 경우 똑같은 파멸임은 당연하다
단 우리 구원이 완성된 것이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것이 아니기에
십자가에 달린 채 회개한 강도가 넉넉히 구원되었음을 입증하신 것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눅 23:43)이라는 약속이신 것



 이전 차원을 완전히 넘어선 것이다 
 이것이 다시 출생함과 새 창조의 의미다 
 손바닥과 손등의 차원 문제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정반대다 
 이전에는 나 자신 위주, 본위, 중심이었다 
 그래서 거둔 것은 죽음, 멸망뿐이었다 
 이제는 100% 거꾸로 나의 상대를 위함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생명의 법칙이다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고 
 따라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고 
 이것이 물 흐르듯 하는 순리다 
 길을 두고 뫼로 가랴 길은 하나뿐이다 
 이 길 따라 일로매진 쭈욱 가면 된다 
 일백번 고쳐 죽더라도 길 따라 가라 
 좌고우면 없이 무조건 길 따라 가면 생명이다 
 예수님 믿는 것은 나 위하신 십자가 죽음을  
 믿음이니 <전적으로 나를 위하심>을 믿음이다 
 나를 위하심을 <믿으니까> 당연히 자연스럽게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나를 위할 때 주님이 나 위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다 ㅡ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다 (롬 14:23)
 죄의 개념을 정확히 정립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것을 믿지 못하면 
 "주님 나 위해 죽으심"을 아무리 믿어보아야  
 구원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중시하시라 !  




따라서 둘이 하나됨의 짝의 원리를 따라 더 다시는
나를 위해 살거나 죽는 것이 없어야(고후 5:15/롬 14:7-9)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내 몸이 성령의 전이 되는 것이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무덤에 장사지내진 것까지 믿음으로써
다시는 나 위해 죽거나 살거나 하는 
자아중심이 없어야 주님과 내가 둘이 하나돼 
구원이 이뤄지는 것이니
처음부터 이와 같이 내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십자가 짐(사형수 자체)이
없이는 그리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림이 없이는
그 누구도 영생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 것(눅 14:7-9)
앞에서 지적했듯이 죄, 진노, 죽음의 세상인데다
죽음의 권세를 쥔 살인자가 왕노릇하는 이 따위 세상
연연해 하는 것 자체가 믿음 없다는 증명인 것이다
고로 진작부터 이 세상에서 없는 자, 약한 자, 천한 자
이들이 하나님 교회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고전 1:26-28)
메시야 예수님 믿는 것은 먼저 이러한 세상 실상부터
통감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고서 자기의 죄인됨을
실감한다는 것은 빈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참혹한 광경은
내가 그렇게 죄인으로 죽는 것만 아니라 
이 세상이 또한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처단되는 
광경이라는 사실 처음부터 인식해야 함이니(갈 6:14)
십자가에 못박힌 세상에서 거지처럼 뒤적거리는 자
절대로 화려 찬란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천국은 걷어차버리고 넝마주이를 선호했기 때문ㅡ
죄인 인간과 이 세상 모두가 한데 겹쳐져
썩음 가운데 폭싹 꺼져 내려앉은 광경, 이 참상
비로소 목도하는 것이 주님 말씀의 "눈 뜸"이다(행 26:18)
사막 한 복판에서 마귀의 속임수에 빠져
신기루만 보고 그것이 고대광실인 양 속아 왔으니
이 진실마저 깨닫지 못하고 구원 아무리 외쳐보아야
허공에 흩어지는 메아리일 뿐이다 
실상을 실상대로 일러주는데도 곧이 듣지를 않으니
구제불능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이다




무엇이 "예수님 믿는 것"인가














최목사는  주님이 하신 말씀 즉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의 일을 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습니까 할 것이다"(마 7:22)를
두고 악령이 성령을 가장하여 행한 것을 가리키심이라 했는데
천만의 말씀. 악령이 속이는 것은 이 세상에서만 한한다. 이런 거짓은
사람이 이 세상을 벗어나는 순간 대낮같이 모든 것이 밝혀져
모든 속임수가 얼음 녹듯 사라지게 된다. 다 폭로가 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당시 능력을 행할 때는 믿음 충만하여
성령으로 행한 것을 인정하심이다. <그 후에 마음이 변하여>
자아중심이 되어 "의를 사랑 않고 불법을 행함"을 의미하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현재의 자기 처지를 시험하고 확증 않고(고후 13:5)
과거의 행적, 믿음, 능력 등등을 의존하고 심판대에서까지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무서운 일이다. 
성경의 경고는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조심하라"(고전 10:12)이다.
너무나 안일한 자세로 방심하고 있다. 극력 경계할 일이다. 
믿음에는 왕도가 없음을 명심하시라. 
항상 초보, 초년, 처음 단계의 겸허한 자세로 일관할 일이다. 
바울 같은 대사도도 교만할까 하시어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고후 12:7).  


이런 일화가 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을 겨우 형성하여 대구가 위태하던 때
어떤 목사의 성경 강해가 충실하다는 소문이 나서 인근각지 교파 초월해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목사가 교수로 있던 신학교에 그리고 
그가 담임하던 교회에 와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하던 시절.
6.25 맹장 중 하나인 모 장성이 일요일 예배 때에
그 목사 교회를 일부러 찾아 왔는데 목사의 명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마침 그 교회에 나오는 걸인풍의 한 남자 교인이 있어
그 목사는 그 두 사람을 서로 인사를 나누도록 만들었다.
목사가 시키니까 그 장성도 얼떨결에 악수를 했지만 
그 후로 그 장성은 두 번 다시 그 교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군인이 믿음이 있기로 얼마나 있겠는가. 
그 목사는 모든 믿음의 형제들은 서로 사랑하여 
신분의 귀천이 없다는 것을 일부러 강조하여 그랬겠지마는
그 장성으로 말하면 구원 받았다 치더라도 한참 어린아이다.
아니라면 이제 갓믿어보려는 구도자의 심경일 수도 있다.
그런 처지에 있는데 젖밖에 모르는 아기에게 어른이 먹는 밥을
억지로 퍼넣어주는 꼴이 됐으니 썩 지혜롭지 못한 처사였다.
그런 일이 없었던들 그 장성은 그 교회에 자주 나와 성경을 배우고
믿음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다. 애석한 일이다.

최목사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통독할 정도로 비범했고
그 후로 여러가지 신비한 능력도 나타냈었고, 
기도 응답이라든가 각종 능력을 많이 드러냈었다. 
그는 평소에 악령이 성령으로 가장하여 
각종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는 것을 거짓된 것이라고 
바로 지적해주는 것으로써 정평이 나 있던 인물이었다.  
거짓을 거짓인 줄 안다고 해서 그것이 참이라는 증명, 증거는
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현재의 정보로는 최목사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런 것으로써 사탄이 연극을 꾸밀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는 것만 상기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방언"을 하는 동일한 장소에서
"저 방언은 마귀의 방언, 이 방언은 성령의 은사" 식으로
말해준다고 해서 그 분별이 성령으로 난 것이라고
절대로 속단, 과신하지 말라는 뜻이다. 
  

2020년 2월 23일 일요일

아담/에덴의 속성에 대한 성경적 무지무식 때문에 당시 인도를 잃었다ㅡ21세기에 들어 동일한 무지무식으로 세계를 잃어서는 안된다(끝)



"나만 구원되어  영생 얻으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자아중심의
일종이니 구원될 리 만무하며,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전달하
여 사람들을 구원해낼 뿐만 아니라  아담 편에 서서 아군, 적군을 구별
하여  이 세상이 아담 살인자 용(성경에 명시했고, 일반적으로 널리 알
려져 있는 용이니까 그 신비 아닌 "신비로운" 존재를 밝힘도 정보 차원
에서도 대화의 논제가 되어 마땅하고 자연스러울 것임)이 장악하고 있
음을 알릴 필요가 있을 정도로 시대 상황이 급격히 달라졌음에 유의. 







심판이 이르고 있는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세상 신인 마귀가 "과학"의 이름으로 사기친 사례가 진화론이니 이 학습 효과를 발휘해야(끝)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 전생(輪廻轉生) 또는 환생(還生)은 말 그대로 
인생이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태어나기를 되풀이하여 
끊임 없이 돌고 도는 원 운동을 한다는 것인데 
이는 원인과 결과라는 짝의 법칙에서 
어긋나는 고로 비과학적 미신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된다. 
인간을 비롯한 우주의 지배 원리인 짝의 법칙은 
능동과 피동, 생명과 죽음 등 반드시 양면으로 끝나지 
연속해서 되풀이되는 것은 존재하지를 않는다. 
영원성과 한시성(限性)이라는 양면만으로 된 구조이기 때문이다. 
고로 죽음이라는 것도 한시적인 이생에서만 통하는 개념이지
영원성을 갖춘 내세에서는 적용 자체가 되지를 않는다. 

짝의 원리의 핵심은 짝을 이룬 둘이 대등하지 않고 모자(母子) 관계로 있다는데 있다. 
그래서 짝을 이룬 둘은 둘로서 독립하지 않고 제각기의 독립성은 유지하되 
하나로서 존재하고 운동한다. 왜 그런가? 애초 하나로 있다가 갈라졌기 때문. 
하나님이 선과 악을 동시에 만드시지 않았다는 의미도 여기에 근거한다. 
오직 선(의/)뿐이었는데 나중에 악(불법)이 갈라져 나온 것이다. 
반대가 되는 성질 또는 개념 등이 모두 그러하다. 모자 관계다. 
장구한 세월 속에 음양론이 뿌리 박아 왔으나 이 둘의 모자 관계를 밝히지 못해 
학문(과학)으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일종의 점술로만 인식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노자(老子)만은 유일하게 달랐으니 
그 도덕경 42장에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氣以爲和라 했기 때문인데, 
이런 문구는 이상의 짝의 법칙을 모르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표현이다. 
둘이 셋을 이루고 이 셋(짝의 법칙)이 만물을 구성하는 
원리가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셋을 이루었다"는 말은 이제까지 그 누구도 바로 해석하지 못했다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데, 모두 한결같이 풀이하기를
음과 양의 두 기운과 그 중간(음과 양이 조화된 기운)의 기가 합쳐 
3을 구성한다는 정도로만 해석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실은 그 뜻이 아니고 짝을 이룬 갑과 을 둘이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에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닌 별개의 병으로 구성되어 
"3위1체"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서 노자는 말한 것이다. 
성질이 제각기 정반대로 다른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이 둘이 애초 하나에서 시작, 출발하지 않고는 
즉 갑이 을을 낳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본질이 같기 때문에 성질은 달라 갑과 을로 나누어져 있지만 
하나로 존재하고 운동할 수 있음이다.  

그러나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이렇게 지적만 해놓고는 
이에 대한 달다쓰다 설명 한 마디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으니 
노자는 도대체 신(영물, 천사)인가, 인간인가 고개를 갸웃둥거릴 만도 하다. 
악령이라면 지금까지 이천 수백 년이 흘러가도 이것을 이렇다 저렇다 해석하지 않고 
그냥 가만 두었으니 악마의 짓거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면 천사가 인간으로 변신하여 이런 말을 해놓고 
오늘날 이 21세기를 위해 미리 말해놓은 것이던가? 
그러나 그 도덕경 54장에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라는 말이 나오는데 
"자손의 제사(붉은 부분) 가 끊이지 않는다"는 말로서 
죽은 네피림의 망령들이 귀신이거늘 
이런 귀신에게 "제사, 운운"의 말을 거룩한 천사가 말할 턱이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이 도덕경의 내용 중에 후대인들이 임의로 첨가한 흔적이 명백히 있다는 사실이다. 
노자라는 한 인물만의 집필이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면 이 "제사" 언급도 그 중의 하나일까? 
노자까지도 실제 역사상의 인물인지 의심할 정도라니까. 
그러나 명백한 것은 오늘날에야 밝혀지는 3위1체의 법칙(짝의 법칙)을 꿰뚫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 이 문구를 적어놓았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 이러한 중요한 핵심 진리를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설파한 사실에 걸맞게 
충분히 설명하고 또한 제자들을 두어 가르치고도 남았으리라.
그런데 이 노자라는 사람은 제자들도 두었다는 기록이 없고 
그 출생과 사망년도도 전연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필자의 판단에, 21세기를 당하여 마지막 때 
대대적으로 정확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게 되어 있는 
"천사"(계 14:6)의 "큰 음성"(:7)에 어울리게 
거대한 인구의 중국 전도에 크나큰 양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미리 노자의 도덕경 42장으로 사전 포석을 해두시지 않았나 싶기도 한 것이다. 
이 거대한 숫자를 복음화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래서 이들 구원 얻은 이들마다 기도인/전도인/선교자 역할로 지구를 누빌 때 
그 의미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도 한족들의 정신 세계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노자 사상의 핵심이 
이 42장에 있음을 밝혀주고 노자가 강조한 도(道)가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은 아니나 
태초부터 홀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킴이라 바로 지적해줄 때 
그들의 의식 작용에 일종의 친숙감(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에 대한)이 
동원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불교의 환생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지만, 윤회 전생은 네피림의 장난질일 뿐이다. 
이 세상은 아담의 살인자 용(악령이 되어버린 영물)이 아담의 범죄 결과로 
이 세상을 현재까지 지배하고 있는 것이요 네피림은 일종의 그 지배 방식이라 할 수 있어, 
그 죽은(인간의 육체) 영(원래의 악령의 분신으로서의)들이 작당 치는 속임수인 것이다. 
그들은 초능력자들이다. 이런 정도로 사기 치는 행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불교인들은 여기 완전히 속아 넘어가 있는 상태다. 
성경 지식이 없는 이마다 이 악령들의 기만술에 아니 넘어갈 장사가 없다. 
그들의 초능력에 의한 장난질이지만 사실 그대로의 실증(實證)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단지 "속인다"는 것은 구원 얻을 수 있는 아담의 후예를 상대로 하는 얘기인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이 환생하는 증거로 제시한다는데 있다. 
이 부분만은 완전히 거짓말인 것이다. 
따라서 이 환생에 대해 어떤 과학적 실험을 할 수 있는 정도라면 
어김없이 "과학적 사실"로 검증되어질 수밖에 없다. 

네피림도 사실이고 그들의 환생 놀음놀이도 사실이니까. 
다만 성경대로의 네피림 정체에 대한 설명을 어느 정도로 신뢰하느냐 
그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언필칭 "과학 만능"에 대해서도 역시 경계할 일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과학성>을 멸시하는 이마다 
악령들의 이러한 모든 "과학"의 <사기성(詐欺性)>에 
낚여들 것이므로 절대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성경을 평소에 숙독하여 성경의 진실성에 탐닉해 있지 않고 
여타 초능력 하나에만 치우쳐 있는 이마다 
결단코 이 마귀의 올문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을 것으로 단언, 경고하는 것이다.  



2020년 2월 22일 토요일

남북한 한반도 교회의 시대적 사명이 막중함을 아시는가









다니엘은 그 예언에서 20세기를 "마지막 때"로서 못박았다.
그 증거가 "신속한 내왕(교통 통신 발달)"과 
"급증하는 지식(첨단 과학)"(단 12:4).
이보다 더 명확한 증거가 없는데다
1904~5년의 영국 웨일즈에서의 "성령" 흉내 내기.
즉 창조주 하나님을 가장하여 나타나는 
적그리스도의 전주곡으로서의 초능력까지 보태졌다.
정확히 20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다시 말해 "메시야"로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문 앞에 왔다.
그렇다면 주님의 재림은 곧이어 닥치니까 "이 세대"는 끝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this generation) 
(마 24:34/눅 11:59/눅 21:32)는 아담의 살인자 마귀가 
아담을 궤계로 복속시킨 뒤 통치하는 주님 오시기 전 시대.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부터
"이 세대"는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눅 21:31)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계 11:15/골 1:13)이니
범죄하기 전 아담이 통치하도록 돼 있었던 나라. 
그러나 지금은 상실한 나라.
또 그러나 이제 "마지막 아담"으로서 완전 회복하신 나라.
그 나라의 왕권을 가지고 왕으로서 다시 세상에 임하시는 것이다. 

이 사실은 변화산상에서의 주님이 나타나심을 가리켜 
"<죽기 전>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리라"고
친히 말씀하신데에서 확인된다(마 16:28/막 9:21/눅 9:27).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 심판 후에 전개되는
"새 하늘과 새 땅" 소속의 세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 전 상태인 초자연계 몸을 갖춘 인간의 시대
마귀 사탄의 지배(압제)를 벗어난 인간 본연의 세상도 포함된다.
그 때부터 즉 주님 다시 오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주님 위해 목숨 바친(적그리스도 우상 앞에 경배하지 않은 자 포함)
이들만이 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며(초자연계 몸으로 부활함으로)
이것이 "첫째 부활"(계 20:5,6)이고 나머지는 마지막 심판 때까지는
들어가지 못하는 차이만이 있다. 두 번째 부활을 기다려야. 

그런즉 이제 곧 없어질 세상인데 이 세상에 여전히 목매달려는가. 
이 세상 없이는 못사는 양 애착을 가지고 미련을 끊지 못하는가.
성경대로 하면 지금이야말로 "동심(動心)하고 두려워할"(살후 2:2) 때.
마음이 사시나무 떨듯이 흔들릴 때라는 바로 그 의미이다. 
이 때에 태무심,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자에게 진실로 화가 있다.
파리 목숨 끊어지는 듯이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대환난이 온다. 
마지막 심판은 아니나(그 심판은 주님의 왕권이 구현된 천년 후-계 20:13
죽음과 멸망이라는 측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마지막 심판은 모든 죄목이 낱낱이 드러나져  
왜 멸망하게 되는지 그 사유가 완연히 밝혀지는 점만 다르다(마 7:23)
현재 인류 인구가 77억인데 그 거의 전부가
(적그리스도 경배를 거부할 숫자가 극소수에 불과함을 감안할 때) 
그런 참혹한 죽음의 문 앞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 한반도 교회는 세계 인구 58%인 45억 아시아인들,
12억 아프리카인들을 합치면 거의 60억 가까운 절대 다수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해야 할 무거운 책무를 안고 있다. 
쇠퇴 일로, 타락, 빈사 상태에 있는 구미 교회의 대안이 한반도 교회다. 
기사회생이 거의 불가능한 지금까지의 어정쩡했던 
구미 신학(歐美 神學)을 당연히 탈피할 때가 온 것이다. 
아담과 에덴의 초자연계 속성 하나도 밝히지 못한 죽은 신학이다.
한반도 교회여, 성령의 능력으로 떨쳐 일어날 때이다.
때는 왔다. 무르익었다. 



2020년 2월 21일 금요일

경기장에서 달려가는 경주자는 우승의 일념뿐이다ㅡ바쁜 벌은 근심할 틈이 없다




하나님의 택하심

하나님의 택하심은 "미리 아심"(롬 8:29/11:2/벧전 1:2)에 근거한다.
무엇을 미리 아시느냐 하면 
우리의 자유 의지로써 우리 자신의 미래를 정함에서
긍정/부정적 양 방향 중 택일할 때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 결정이 차질없이 수행되도록 미리 
조처해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자유의지로
믿고 하나님 사랑의 은혜로 구원된 줄 알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된 것으로서
시종 일관 은혜가 작용하셨음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요체.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 택하심을 굳게 하라" 한 것(벧후 1:10).
말씀 순종에서 자기 최선을 다하지는 않고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은 없이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으면 구원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은 불가능"이라는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 자기 멋대로 생각함으로써
그 영혼을 망치는 이들이 너무 많은데 주의를 요한다.
성경을 일방적으로 풀이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성경을 전체적으로 조감(鳥瞰)할 수 있도록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살피는 것이 그래서 요긴한 것이다.

또 하나는, 구원된 자는 마땅히 "성인(a saint)"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이 강조하는 바로서
신약에서 60회 이상이나 나오는 단어이다.
성경의 "성인"과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성인을
구분하려는 미련한 생각은 금물이다.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방향은 대칭을 띠는 둘뿐이니까.
양자 택일이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고 
한 방향으로만 몰입하다보면 자연히 맺어지는 결과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품(창조)은
완벽하고 흠 잡을 데가 없다는 바로 이 사실이다.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이다. 바로 이에 해당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없는 것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감히 변명, 핑계 대려는 생각뿐이라면
그 사람의 구원은 거짓이고 
"헛되이 믿는"(고전 15:2/고후 6:1) 것이다.
이런 것이 멸망길로 접어드는 자기 기만의 첫 걸음이 된다. 

"육신의 약함"(마 26:41)은 주님 안에 있기 전이고
주님과 하나됨에서는 "그리스도의 약함"(고후 13:4)뿐.
이것을 혼동하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아 성령의 가르치심을 외면한 탓.
실제는 부정(不淨)하지 않은 것이라도 부정하다 여기면 
"부정하다"는 것이니(롬 14:14) 깊이 유의해야.
"믿은 대로 된다"는 말씀이 여기서도 통한다 할까.
나는 도저히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여기면
얼마든지 주님 안에서 이길 수 있지만, 실제는
그 믿은 대로 이길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마련.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고전 10:12).
그러므로 섰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뜻이라 할까.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빌 3:14)
자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라는 데에 있다.
현재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는 자에게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도무지 없는 것이다. 
우승하겠다는 일념 외에는(고전 9:24).
세상 사람들이 "성공하기"(:25) 위해 절치부심하는데다
우리의 일을 견준 사실에 우리는 크게 각성할 일이다.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니까
안일한 태도로 임하는 것이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 아닌데   
부디 우리는 이 성령의 경고를 마음에 아로새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