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 전생(輪廻轉生) 또는 환생(還生)은 말 그대로
인생이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태어나기를 되풀이하여
끊임 없이 돌고 도는 원 운동을 한다는 것인데
이는 원인과 결과라는 짝의 법칙에서
어긋나는 고로 비과학적 미신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된다.
인간을 비롯한 우주의 지배 원리인 짝의 법칙은
능동과 피동, 생명과 죽음 등 반드시 양면으로 끝나지
연속해서 되풀이되는 것은 존재하지를 않는다.
영원성과 한시성(限時性)이라는 양면만으로 된 구조이기 때문이다.
고로 죽음이라는 것도 한시적인 이생에서만 통하는 개념이지
영원성을 갖춘 내세에서는 적용 자체가 되지를 않는다.
인생이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태어나기를 되풀이하여
끊임 없이 돌고 도는 원 운동을 한다는 것인데
이는 원인과 결과라는 짝의 법칙에서
어긋나는 고로 비과학적 미신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된다.
인간을 비롯한 우주의 지배 원리인 짝의 법칙은
능동과 피동, 생명과 죽음 등 반드시 양면으로 끝나지
연속해서 되풀이되는 것은 존재하지를 않는다.
영원성과 한시성(限時性)이라는 양면만으로 된 구조이기 때문이다.
고로 죽음이라는 것도 한시적인 이생에서만 통하는 개념이지
영원성을 갖춘 내세에서는 적용 자체가 되지를 않는다.
짝의 원리의 핵심은 짝을 이룬 둘이 대등하지 않고 모자(母子) 관계로 있다는데 있다.
그래서 짝을 이룬 둘은 둘로서 독립하지 않고 제각기의 독립성은 유지하되
하나로서 존재하고 운동한다. 왜 그런가? 애초 하나로 있다가 갈라졌기 때문.
하나님이 선과 악을 동시에 만드시지 않았다는 의미도 여기에 근거한다.
오직 선(의/義)뿐이었는데 나중에 악(불법)이 갈라져 나온 것이다.
반대가 되는 성질 또는 개념 등이 모두 그러하다. 모자 관계다.
장구한 세월 속에 음양론이 뿌리 박아 왔으나 이 둘의 모자 관계를 밝히지 못해
학문(과학)으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일종의 점술로만 인식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짝을 이룬 둘은 둘로서 독립하지 않고 제각기의 독립성은 유지하되
하나로서 존재하고 운동한다. 왜 그런가? 애초 하나로 있다가 갈라졌기 때문.
하나님이 선과 악을 동시에 만드시지 않았다는 의미도 여기에 근거한다.
오직 선(의/義)뿐이었는데 나중에 악(불법)이 갈라져 나온 것이다.
반대가 되는 성질 또는 개념 등이 모두 그러하다. 모자 관계다.
장구한 세월 속에 음양론이 뿌리 박아 왔으나 이 둘의 모자 관계를 밝히지 못해
학문(과학)으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일종의 점술로만 인식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노자(老子)만은 유일하게 달랐으니
그 도덕경 42장에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氣以爲和라 했기 때문인데,
이런 문구는 이상의 짝의 법칙을 모르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표현이다.
둘이 셋을 이루고 이 셋(짝의 법칙)이 만물을 구성하는
원리가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셋을 이루었다"는 말은 이제까지 그 누구도 바로 해석하지 못했다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데, 모두 한결같이 풀이하기를
음과 양의 두 기운과 그 중간(음과 양이 조화된 기운)의 기가 합쳐
3을 구성한다는 정도로만 해석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실은 그 뜻이 아니고 짝을 이룬 갑과 을 둘이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에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닌 별개의 병으로 구성되어
"3위1체"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서 노자는 말한 것이다.
성질이 제각기 정반대로 다른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이 둘이 애초 하나에서 시작, 출발하지 않고는
즉 갑이 을을 낳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본질이 같기 때문에 성질은 달라 갑과 을로 나누어져 있지만
하나로 존재하고 운동할 수 있음이다.
그 도덕경 42장에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氣以爲和라 했기 때문인데,
이런 문구는 이상의 짝의 법칙을 모르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표현이다.
둘이 셋을 이루고 이 셋(짝의 법칙)이 만물을 구성하는
원리가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둘이 셋을 이루었다"는 말은 이제까지 그 누구도 바로 해석하지 못했다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데, 모두 한결같이 풀이하기를
음과 양의 두 기운과 그 중간(음과 양이 조화된 기운)의 기가 합쳐
3을 구성한다는 정도로만 해석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실은 그 뜻이 아니고 짝을 이룬 갑과 을 둘이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에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닌 별개의 병으로 구성되어
"3위1체"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서 노자는 말한 것이다.
성질이 제각기 정반대로 다른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이 둘이 애초 하나에서 시작, 출발하지 않고는
즉 갑이 을을 낳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본질이 같기 때문에 성질은 달라 갑과 을로 나누어져 있지만
하나로 존재하고 운동할 수 있음이다.
그러나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이렇게 지적만 해놓고는
이에 대한 달다쓰다 설명 한 마디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으니
노자는 도대체 신(영물, 천사)인가, 인간인가 고개를 갸웃둥거릴 만도 하다.
악령이라면 지금까지 이천 수백 년이 흘러가도 이것을 이렇다 저렇다 해석하지 않고
그냥 가만 두었으니 악마의 짓거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면 천사가 인간으로 변신하여 이런 말을 해놓고
오늘날 이 21세기를 위해 미리 말해놓은 것이던가?
그러나 그 도덕경 54장에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라는 말이 나오는데
"자손의 제사(붉은 부분) 가 끊이지 않는다"는 말로서
죽은 네피림의 망령들이 귀신이거늘
이런 귀신에게 "제사, 운운"의 말을 거룩한 천사가 말할 턱이 없다.
이에 대한 달다쓰다 설명 한 마디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으니
노자는 도대체 신(영물, 천사)인가, 인간인가 고개를 갸웃둥거릴 만도 하다.
악령이라면 지금까지 이천 수백 년이 흘러가도 이것을 이렇다 저렇다 해석하지 않고
그냥 가만 두었으니 악마의 짓거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면 천사가 인간으로 변신하여 이런 말을 해놓고
오늘날 이 21세기를 위해 미리 말해놓은 것이던가?
그러나 그 도덕경 54장에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라는 말이 나오는데
"자손의 제사(붉은 부분) 가 끊이지 않는다"는 말로서
죽은 네피림의 망령들이 귀신이거늘
이런 귀신에게 "제사, 운운"의 말을 거룩한 천사가 말할 턱이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이 도덕경의 내용 중에 후대인들이 임의로 첨가한 흔적이 명백히 있다는 사실이다.
노자라는 한 인물만의 집필이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면 이 "제사" 언급도 그 중의 하나일까?
노자까지도 실제 역사상의 인물인지 의심할 정도라니까.
그러나 명백한 것은 오늘날에야 밝혀지는 3위1체의 법칙(짝의 법칙)을 꿰뚫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 이 문구를 적어놓았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 이러한 중요한 핵심 진리를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설파한 사실에 걸맞게
충분히 설명하고 또한 제자들을 두어 가르치고도 남았으리라.
그런데 이 노자라는 사람은 제자들도 두었다는 기록이 없고
그 출생과 사망년도도 전연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이 도덕경의 내용 중에 후대인들이 임의로 첨가한 흔적이 명백히 있다는 사실이다.
노자라는 한 인물만의 집필이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면 이 "제사" 언급도 그 중의 하나일까?
노자까지도 실제 역사상의 인물인지 의심할 정도라니까.
그러나 명백한 것은 오늘날에야 밝혀지는 3위1체의 법칙(짝의 법칙)을 꿰뚫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 이 문구를 적어놓았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 이러한 중요한 핵심 진리를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설파한 사실에 걸맞게
충분히 설명하고 또한 제자들을 두어 가르치고도 남았으리라.
그런데 이 노자라는 사람은 제자들도 두었다는 기록이 없고
그 출생과 사망년도도 전연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필자의 판단에, 21세기를 당하여 마지막 때
대대적으로 정확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게 되어 있는
"천사"(계 14:6)의 "큰 음성"(:7)에 어울리게
거대한 인구의 중국 전도에 크나큰 양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미리 노자의 도덕경 42장으로 사전 포석을 해두시지 않았나 싶기도 한 것이다.
이 거대한 숫자를 복음화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래서 이들 구원 얻은 이들마다 기도인/전도인/선교자 역할로 지구를 누빌 때
그 의미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도 한족들의 정신 세계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노자 사상의 핵심이
이 42장에 있음을 밝혀주고 노자가 강조한 도(道)가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은 아니나
태초부터 홀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킴이라 바로 지적해줄 때
그들의 의식 작용에 일종의 친숙감(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에 대한)이
동원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대대적으로 정확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게 되어 있는
"천사"(계 14:6)의 "큰 음성"(:7)에 어울리게
거대한 인구의 중국 전도에 크나큰 양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미리 노자의 도덕경 42장으로 사전 포석을 해두시지 않았나 싶기도 한 것이다.
이 거대한 숫자를 복음화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래서 이들 구원 얻은 이들마다 기도인/전도인/선교자 역할로 지구를 누빌 때
그 의미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도 한족들의 정신 세계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노자 사상의 핵심이
이 42장에 있음을 밝혀주고 노자가 강조한 도(道)가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은 아니나
태초부터 홀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킴이라 바로 지적해줄 때
그들의 의식 작용에 일종의 친숙감(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에 대한)이
동원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불교의 환생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지만, 윤회 전생은 네피림의 장난질일 뿐이다.
이 세상은 아담의 살인자 용(악령이 되어버린 영물)이 아담의 범죄 결과로
이 세상을 현재까지 지배하고 있는 것이요 네피림은 일종의 그 지배 방식이라 할 수 있어,
그 죽은(인간의 육체) 영(원래의 악령의 분신으로서의)들이 작당 치는 속임수인 것이다.
그들은 초능력자들이다. 이런 정도로 사기 치는 행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불교인들은 여기 완전히 속아 넘어가 있는 상태다.
성경 지식이 없는 이마다 이 악령들의 기만술에 아니 넘어갈 장사가 없다.
그들의 초능력에 의한 장난질이지만 사실 그대로의 실증(實證)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단지 "속인다"는 것은 구원 얻을 수 있는 아담의 후예를 상대로 하는 얘기인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이 환생하는 증거로 제시한다는데 있다.
이 부분만은 완전히 거짓말인 것이다.
따라서 이 환생에 대해 어떤 과학적 실험을 할 수 있는 정도라면
어김없이 "과학적 사실"로 검증되어질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아담의 살인자 용(악령이 되어버린 영물)이 아담의 범죄 결과로
이 세상을 현재까지 지배하고 있는 것이요 네피림은 일종의 그 지배 방식이라 할 수 있어,
그 죽은(인간의 육체) 영(원래의 악령의 분신으로서의)들이 작당 치는 속임수인 것이다.
그들은 초능력자들이다. 이런 정도로 사기 치는 행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불교인들은 여기 완전히 속아 넘어가 있는 상태다.
성경 지식이 없는 이마다 이 악령들의 기만술에 아니 넘어갈 장사가 없다.
그들의 초능력에 의한 장난질이지만 사실 그대로의 실증(實證)임에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단지 "속인다"는 것은 구원 얻을 수 있는 아담의 후예를 상대로 하는 얘기인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이 환생하는 증거로 제시한다는데 있다.
이 부분만은 완전히 거짓말인 것이다.
따라서 이 환생에 대해 어떤 과학적 실험을 할 수 있는 정도라면
어김없이 "과학적 사실"로 검증되어질 수밖에 없다.
네피림도 사실이고 그들의 환생 놀음놀이도 사실이니까.
다만 성경대로의 네피림 정체에 대한 설명을 어느 정도로 신뢰하느냐
그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언필칭 "과학 만능"에 대해서도 역시 경계할 일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과학성>을 멸시하는 이마다
악령들의 이러한 모든 "과학"의 <사기성(詐欺性)>에
낚여들 것이므로 절대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성경을 평소에 숙독하여 성경의 진실성에 탐닉해 있지 않고
여타 초능력 하나에만 치우쳐 있는 이마다
결단코 이 마귀의 올문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을 것으로 단언, 경고하는 것이다.
다만 성경대로의 네피림 정체에 대한 설명을 어느 정도로 신뢰하느냐
그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언필칭 "과학 만능"에 대해서도 역시 경계할 일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과학성>을 멸시하는 이마다
악령들의 이러한 모든 "과학"의 <사기성(詐欺性)>에
낚여들 것이므로 절대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성경을 평소에 숙독하여 성경의 진실성에 탐닉해 있지 않고
여타 초능력 하나에만 치우쳐 있는 이마다
결단코 이 마귀의 올문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을 것으로 단언, 경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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