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색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안되는데 맨눈의 <성경>으로 세상울 인식해야 하는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성령)은 수면(물 위)에 운행(움직임)하셨다"(창 1:2). "물이 있으라" 하시지도 않았고 "땅이 있으라" 하시지도 않았고 단지 땅이 물에서 "드러나라"고만 하셨고 기존의 물을 나누시어 "하늘이라 칭/稱하셨다"고만 되어 있으니, 기존의 물에 기존의 땅이 풀어져 있었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했으니, '이전 창조'의 세계가 '와해'되어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그 당시 창조되었던 계명성(새벽별)들 중 그룹(cherub) 하나가 범죄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던 것.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6일 창조".
지금은 영물/靈物들의 일부와 아담(인간)의 범죄로 그 '6일 창조'는 다시 '와해'되고(그 이전 세계는 '물'로 망하고 지금 세계는 '불'로 망하게 예정되어) 그래서 성경에 예언된 대로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계 21:1)이 대기 중인 것. 이상은 '망하는 세상'과 '망하지 않는 세상'과의 대칭이니, 망하는 세상은 '물로써 망함'과 '불로써 망함'으로 대칭되고, 망하지 않는 세상은 다음 말씀에 해당되니 곧 "나 여호와가 말한다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사 66:22).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이 "6일 창조"는 "새 하늘과 새 땅" 창조 이전의 "혼돈", "공허", "흑암", "깊음", "물"(천하가 다 노아 홍수 당시와 같은 물 바다)로서의 참담 그 자체임을 똑바로 직시/直視해야. "6일" 창조 이전의 "혼돈", "공허", "흑암", "깊음", "물"이었던 그 패턴(pattern) 그대로에 해당되는 것 외 아무 의미가 없으니, 20세기 이후 소위 "찬란한 과학 문명"이란 것은 한낱 주검(송장) 위에 색동 비단 치마 저고리 입혀 놓은 것과 같을 뿐임. 죽음이니까 죽음 일색일 따름이지 그것이 만년을 간다 한들 생명일 수는 없으니까!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부자연, 부자유의 허망한 동물적 육체뿐만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이름으로 나오지 않는 그 무엇이든 다 철통 같은 악령들의 지배, 간섭, 통제에 포로되어 꼭두각시로 움직이는 일거수일투족이라는 비극적 실상인즉 이 어찌 "혼돈", "공허", "흑암", "깊음", "물구덩이"가 아니리요! 실상을 제대로 안다면 365일 24시간 통곡과 애처로운 흐느낌으로만 날을 보내고 밤을 지샐 일이다. 악령들에게 눈이 감겨 깜깜하여(행 26:18) 지척울 분간 못하니 악령들이 속이고 몰아가는 그대로 희희덕거리고 원수들의 장단에 놀아나는 비극만의 연출인 것이다! 이것이 일말의 거짓 없는 지금까지의 인류사 6천년 세월의 실제의 맨모습(실상)인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아 정상 상태로 "6일 창조"가 지속되어 나간다 해도 아담 후대의 일부 인간들 및 영물(스랍과 그룹이 아닌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보좌하도록 창조하신 "천사")들의 일부(지금의 사탄 일당처럼) 범죄는 필연일 것이니 어차피 '불로 망할 세상'임은 정해진 것이나, 문제가 된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아담 자신이 범죄하여 죽어버리는 서슬에 현재와 같은 6천년의 대형 사고로 홍역을 치르는 것이다. 허나 그 기한도 드디어 끝나 우리의 구원자(예수) 주님이신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다시 오심으로써 비로소 아담 통치가 이제 시작되려는 시점인 것이다. "6일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이 쉬시려고 하실 즈음에 아담 죽음이라는 이런 사달이 났으니 아담 통치가 6천년이나 늦추어진 것.
고로 그 '아담 시대'의 천년 세월을 앞둔 우리는 모든 실상을 알았으니 어리석게 악령들의 농간에 꺼둘리지 말고 놀아나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들다운 품위와 체통을 지켜 하나님의 "맏아들"로서의 우리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람들 구원해내는 일에만 오직 전념할 것이다. 우리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어떤 본을 보이셨는가. 친히 사형장으로 나가시는 사형수의 모습이셨던 것. 왜냐면 천하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서 (아담 범죄로 죽은 자이니까, 죄 값은 죽음 밖에 없으니까, 생명 아니면 죽음이라는 대칭성 즉 양면성의 짝의 법칙에서) 사형수 죄인이기에. 그 사형수의 모습으로 그 위치에 함께 있어야 함께 생명에로 인도할 수 있음이다.
이 함께 하는, 하나되는, 한 몸을 이투는(짝의 법칙에 기반한 생명의 법칙이 "한 몸"됨에 있으므로ㅡ고전 12: 26)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사즉생/死則生(죽고자 하면 살고)생즉사/生則死(살고자 하면 죽는다)의 방법 외 없는 것과 같은 것. 살면 함께 다 살고 죽으면 함께 다 죽는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이 이상향적 삶의 생명의 법칙.누구는 부하게 태어나 부자로 살고 누구는 없는 자로 태어나 없이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애초 창조가 생명 아닌 죽음으로 일체가 망가져버린 흉물스러운 죽음의 꼴불견인 것. 하나님의 창조의 뜻은 평등, 평균에 있는 것.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됨에 있으니까. 이 죽음의 세상에서 나 혼자 살고자 하는 욕심을 단죄하시는(요 12:25)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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