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봄으로써
상대를 위하는 것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요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며,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13:1-13).
위에 지적한 모든 것은 "성령의 은사/恩賜(선물)에 속한다. 성령의 선물을 나타냄은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증거인데, 성령이 계심에도 사랑이 없을 수 있느냐 하겠지만, 사랑 유무는 나의 자유 의지(자유 선택)와 직결되므로 얼마든지 가능하고 그런 상태가 일정 기간(다소간에) 지나다가 그 죄를 즉각 회개하지 않을 경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히 10:29) 것 즉 "하나님 아들을 짓밟는" 망동/妄動으로 끝난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을 의미함이기도 하고 동시에 성자 하나님이시기도 하는 바 성자께서 성부의 "형상"이시라는 점에서 메시야 구원자(예수) 우리 주님으로서 묘사될 때가 대부분.
이는 초대교회 당시의 얘기이고 지금은 적그리스도 때 즉 하나님 모방의 광란기/期이므로 마귀 악령이 '성령 행세'하는 시대라 별 꼴불견도 다 보는 때다. "하나님 너 까불면 나한테 죽어" 하는 귀신의 언사도 거침 없이 튀어나오는 그런 난장판이다. 그들이 자랑하는 소위 "방언"이 귀신의 주절거림이라는 명백한 증거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그런 소리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미친 자만이 자기 부모더러 "너"라 하고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 하겠지.
바울 사도가 여기서 강조한 대로, '구원 받은 증거'는 자기 위주, 자기 본위, 자기 중심의 소멸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형수로서의 사형 집행을 당한 몸'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즉 그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소유/所有함'이 구원 받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를 위함이 없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롬 14:7). 자기를 위하지 않으면 오로지 나를 위하시어 그 자신을 버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인)님(나를 소유하신 나의 소유주)을 나도 <위하고>, 또한 그 분의 지시를 따라(본을 따라) 나와 상대를 이룬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다.
나의 상대가 되는 이는 내가 대하는 모든 이다. 나의 "원수"까지도(눅 6:27,35). 내가 나를 볼 수 없고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내 상대다. 본다는 것은 '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못보면 위할 수가 없다. 아무도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한다. 내 등 뒤를 볼 수 있는가? 그러나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은 그 앞과 뒤, 좌우, 상하를 다 완벽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노자/老子가 말하는 "무위/無爲"와 "작위/作爲"다. "무위자연/自然"이니까 생긴 대로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 <창조된> 그대로 순응함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 창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마치 창조주인 것 같이 일을 꾸미고 만드려고 함이다. 이 "창조"를 떠올리지 않고는 노자의 "무위자연"은 제대로 이해 불가다. 이런 인간사의 최대 골격을 논파하면서도 제자를 두어 가르치지도 않았고 방대한 저술 행위도 하지 않았으며 태생년과 사망일도 불분명한데다 명칭까지도 "노자/老子"라 노인으로 세상에 불현듯 나타났음을 강력히 암시하는 판이니 그래서 그의 "三生萬物/삼생만물"을 다니엘 예언과 같은 성격의 "봉함/封緘"(단 12:4)예언이라 하는 것이며 아담의 후신/後身인 멜기세덱(히 7:3)의 변신/變身이라 하는 것이다.
생명의 창조주이시니까 그 작정하신 대로 설정하신 대로 무조건 순응함이 곧 생명이요 삶의 지혜다. 만사 형통이요 만사 태평이다. "원수 사랑"이 무슨 대단한 것도 엄청난 것도 아니다. 말씀으로 천지 창조를 하셨으니 그 똑같은 말씀이시므로 그 말씀대로 따르면 그만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눅 5:5) 하면 끝나는 일. "다만 <말씀으로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 8:8).
생명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이 가장 이상향적 삶을 사는 생명의 법칙을 정하셨으니 그
것은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하고 결코 자기를 위하지 않는, 짝(대칭/對稱)을 이룬 <둘>이 <하나>로서 작동하는 3위1체 법칙의 <상대성의 동시성>. 내가 나를 일절 위하지 않음으로써 나 자신을 0(제로)의 위치에 두면 이것이 바로 무한수/無限數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음으로써 모두가 다 나를 위하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든다)가 일어나는 것.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요 10:10) 비결인 것이다. 사람마다 주님과 "주님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고전 11:25) 관계에 들어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을 가리켜 천국이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가리켜 구원 받음이라 함이니 여기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이 믿음에 들어오기 전 필수 요건인 "회개"는, 바로 이 자아중심 즉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만 위했던 일체의 허물 즉 죽을 짓만 쌓아 온 것을 뉘우치고 쓰레기 비우듯 완전히 내다버림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결단하고 믿음의 순종에 들어오는 즉시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는 고로 일사천리로 의/義와 선/善의 고속도로를 주행하게 되어 있는 것. 이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은 주님 안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그 무엇이 아나라 창조주께서 창조를 시작하신 순간부터의 영원한 불문율.
짝의 법칙으로 창조 작업에 착수하셨으니까.
믿음은 이렇게 내가 우리 주님과 함께 하나로서 죽은 <사실>을 믿는 것이니 때문에 이를 가리켜 "믿기만 하면 되는 은혜로 선물로서 얻는 구원"이라 하는 것. "믿음"의 의미 그 정체를 모르고 바벨론 신학의 밑도 끝도 없는 허황된 소위 "믿음"을 안개 잡듯이 갈팡질팡헀던 모든 혼돈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죽었는데 무슨 자기, '자아'가 또 있다던가!
앞의 성경 구절에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남 위해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그것이 얼마든지 사랑이 아닐 수 있는 것은 자기 구원의 한 수단으로 여기거나 하나님께 곱게 보이려는 등의 자아중심적 욕구, 욕심으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바울 사도가 이 대목에서 의미하는 "사랑"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인 것. 그리고 내가 내 원수를 갚는 것은 내가 나를 위하는 자아중심이라 그 원수가 행한 죄와 똑같은 악. 내가 나를 위하지 않고, 나를 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니까,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심이다.
주님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저들이 하는 것을 저들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하심과 같이, 또한 바울 사도가 믿기 전 "알지 못하고 행함"(딤전 1:13)이었음과 같이, 알면서도 행하는 악의 경우라도 하나님만이 아시는 부분이므로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일이지 우리의 소관사가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용서하고> <잊어버리는(마음에 듀지 않는)> 것뿐이다.
자연 만물이 자연법칙 따라 한 치 오차 없이 운행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짝의 법칙에 기반한 생명의 법칙(사랑과 삶의 법칙) 따라 그와 같이 함으로써 우주의 조화(둘이 하나됨)를 이루는 것이다. 짝의 법칙을 이해함으로써 모든 과학적 연구가 완벽한 '하나'로서 오늘날 체계화한 것을 가리켜 이 시대인으로서의 우리는 "2(짝을 상징)의 과학" 또는 "3(3위1체의 뜻)의 과학"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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