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1일 일요일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ㅡ다시 정리하면 (끝)

 사는 것이 무엇인가. 첫째는 생명의 법칙대로 사는 것이니, 나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으로 각자 이웃을 위함이 가장 이상향적 삶의 유일한 방법이기에 그렇고, 둘째는 영원히 사는 것이니 죽어 없어질 것을 창조하실 리가 만무한없는 것입니다. 자연계 동식물은 그 종/種이 처음 창조된 그대로 오늘날까지도 이어 갑니다. 개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은 신진대사 작용과 같을 뿐. 그러나 인간은 영원성의 영혼이 있어 각 개인이 그와 같은 "종"에 해당됩니다. 현재의 동물성 육체는 아담 범죄의 비극적 결과일 뿐. 지저분한 모든 사탄의 거짓말과 속임수에서 한시바삐 벗어남이 시급합니다.우리의 구원자("예수"의 뜻이니 막연히 "예수님"이라 하지 말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 의미 따라 호칭함이 듣는 자에게 유익된 것이니 따라서 구원의 역사가 종료되는 재림시에는 그 호칭도 바뀌어지신다고 했음) 주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이심을 항상 (명심하여) 인식해야.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이므로 첫 창조처럼 <완벽> 그 자체입니다. 두 번 다시 더 손볼 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복음을 받아 믿는 순간부터 이전 아담(범죄 전) 시대와 같은 완전한 상태이 우리가 위치함을 알아야. 다만 사람에 따라 그 반응 정도가 천차만별이라 스데반처럼 믿는 즉시 성령 충만한 이가 있는가 하면 아나니아/삽비라 부부처럼 결국 멸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는 것.


이 "완전"함은 주님의 나 위한 죽으심과 부활 그대로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재하심으로 인하여 말 그대로
나와 "하나"되심(짝의 법칙 따라) 즉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됨으로 형성됩니다.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대로 (문자 그대로)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니 이 사실로써 우리 자신을 세뇌시켜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이루어진 사실>을 믿음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는 이전의 사람들도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 사람에 한하여 넉넉히구원 받아 하나님의 일함에 하등 지장이 없었던 것은 비록 그 자신은 위의 설명과 같은 지식이 없어도 이미 이루어져 있는 "하나"되심의 대역사/大役事는 이루어져 있어 차질 없이 성령 안에서 유감 없이 가동/稼動되므로 그런 것.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것을 이루실 줄 믿은 그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 따라 차질 없이 이루어 주심 입니다.

고로 죄를 이기는 막강한 능력이 내 안에 성령으로 포진/布陣하여 그 힘을 발휘하므로 우리는 사탄과의 모든 전투에서 그야말로 백전백승입니다. "패배, 좌절, 불가능" 따위 부정적이고 소극적 자세는 상념으로든 말로든 표시하면 안됩니다. 단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나의 믿음 여하에 모든 것이 좌우된다는 것. 사랑과 직결된 믿음은 내게 속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대신 믿어 주시는 일은 없으니까. 사랑은 항상 자유의지와 관련되기 때문. 이는 앞서 말한 스데반ㅡ아나니아로도 확인되는 차이입니다. 때문에 성장 속도가 느린 이도 있고, "약한" 이들도 있게 마련이고 "육신"에 얽매여 있는 현상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루신 구원)에 하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임을 항상 명념해야 합니다. 때문에 세상 끝날에까지도 성경을 읽음으로써 성령의 가르치심을 사모함을 멈추지 말아야. 진리를 바로 깨닫고 있어야 내 믿음도 헛되지 않으니까.

성경 진리를 바로 깨닫고 믿음으로써, 능력이 필연적으로 발동하는 것이지 기도한다고 열심히 구하고 조른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일체로 그 무엇이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남들을 위한>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원칙. 이렇게 묵묵한 순종 중에 <상대성의 동시성>으로 하나님께서도 풍성히 베푸시고 주시는 것.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다고 여기는 것까지 빼앗겨(막 4:25). 내가 죄 또는 육신을 스스로 못박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 안에서 못박혀져 궤멸된(롬 6:6) 사실을 믿음으로써 확인, 재확인하는 것뿐임. 주님이 <다 이루셨으니까> 나는 그것을 누리는 것뿐이요 감사, 찬미하는 것뿐. 또한 내가 세상에 대해 주님과 함께 죽었으니(갈 6:14/5:24 ) 세상과 나는 완전 단절됨을 의식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기도. 자아중심은 세상 사랑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기도 하니까.

부정/不淨하지 않은 것도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롬 14:14)과 같이 하나님의 능력도 어린 아이처럼 믿음에서야 나타나십니다. 이미 이루어 놓으셨으니 믿기만 하면 되는 것. 이루어져 있음에도 이를 믿지 않고 내 스스로 무엇을 하겠다, 십자가에 못박겠다 등등으로 몸부림쳐보아야 그 이루심이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기는 백년하청. 내가 나 자신에게(주님과 함께) 죽었고 오직 하나님께만 살아 있다고 믿지 않는 한 자아중심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합니다. 믿어야 구원인데 믿지 않는다는 것이 허물입니다.

성령께 대한 막연하고 흐리멍덩한 일체의 잘못된 인식과 언급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구원자(예수) 우리 주님이 지금 성령으로 여전히 활동하시는 "이름"이 성령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하나로 계시니까 동시에 아버지께서 친히 일하시고 나와 함께 계십니다(요일  2:3).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형상이시니까 항상 전면/前面에 나서시는 것뿐입니다. "세 분 하나남"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부자/父子 관계로서의 "하나"(요 10;30)이십니다. 3운법칙과 상호 검증되는 짝의 법칙에 의해 "삼위일체"는 그 의미가 이제 21세기에 명확히 드러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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