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0일 토요일

이 시점 화급한 자아진단 (2)


"점진적인 창조" 또는 "진화"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는 한 번만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창조는 항구적입니다. 영원히 존속 못할 것이면 아예 처음부터 창조하시려는 마음부터 품지 않으셨을 것이니까. 단 한 번만의 창조이고 영속적이어야 할진대 인간은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 즉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셨다는 결론은 요지부동입니다.


그런데 인간 창조가, 처음부터의 첫 창조가 아니고 여러 생물(먼저 식물 그리고 다음이 동물)을 창조하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최종 작품이셨기에, 즉 동물의 여러 육체를 만들어 가셨던 연장선상에서의 인간의 동물적 육체이었기에, 침펜지 등 유인원 창조에 연이은 순서의 인간 창조이셨던 것.

여기에 영적 요소를 첨가시키신 것이 우리 영혼의 조성이셨고("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ㅡ창 2.7) 그러신 다음 처음 창조하셨던 영계(초자연계 즉 물질 세계와 대칭)로 인간을 옮기시어 거기서 영적 속성을 갖추게 하셨으니 거기서 아담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쳤던 것이기에 이런 2중성을 상징하는 생명과 나무(아담의 신령한 속성을 대표하는)와 선악과 나무(애초의 자연 물질계 속성 대표)를 아담이 거처하는 그 에덴의 "동산"에다 지어 놓으시고 후자에의 접근을 엄금하셨던 것입니다. 이유는, <현재의 신령한 몸>이 즉각 취소되고 <이전의 동물성 육체>로 환원되어버릴 위험이 있었기에.

그러나 아담이 이 경고를 무시, 선악과에 손대어 ,아닌게 아니라 동물성 육체로 회귀되어버리자 방법은 단 하나. 아담과 대칭이 되는 또다른 아담을 설정하시어 그로 말미암아 인생들이 원래의 인간 창조의 모습(신령한 몸으로 영생하는 존재)대로 회복하게 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죽은 자"로서의 동물성 육체를 이런 까닭으로 <물려받아,서> 태어나는 운명의 인간을, 이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의 영(혼) 즉 성령("마지막 아담"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을 <물려받아> 다시 나게(거듭 나게) 하는 방법으로써, 망가져버린 <옛> 인간 창조를 이러한 <새> 창조로 뒤바꾸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 받음"입니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우리가 현재 사람(인자/人子)인 것과 같은 이치로 "마지막 아담"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신자/子)됨이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함이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함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킴입니다. 즉 "하나님의 씨"라 고 한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하나"(요 10.30)되어 계심을 말하는 고로,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만 아니라 동시에 성부 하나님 친히 또한 내 속에 임하심이므로 "하나님의 씨"라는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 곧 "양자/子"(롬 8.15,23/9:4)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남녀 불문)됨이요("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 우리가 지금은("<지금>"이라고 고쳐야) 하나님의 자녀라...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영광의 몸, 신령한 몸의 모습) 같을 줄 아는 것...

"그 안에 거처하는(있는, 사는, 행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함이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한 것이다...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다...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남이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것이다"ㅡ요일 3.1-10), 따라서 양자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음이 판명될 때는 파양/罷養이 되는 위치임은 당연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실로 서릿발 같은 경고인 것입니다("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goodness)>와 <엄위/嚴威(severity)>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될 것이다"(롬 11.20-22).

죄짓지 말라고 거듭거듭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죄를 지으면 즉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아중심이면, 마귀에게 속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까! 이제까지의 바벨론 신학에 의한 소위 "구원"은 주님과 "함께", "하나"됨을 말하지를 않고 난데없는 "대신 죽음"만 반복하여 "주님 죽으신 덕분에 나는 그 대신 산다"는 식의 거짓말만 반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따로, 나 따로"이므로, <성경과 반대>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음"(행 2.38)은 다름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 친히 내 속에 내 영혼처럼 오시어 영원히 나와 "연합하심으로써"(롬 6.3-5/고전 6.17) 단수의 홑사람(나 하나, 혼자)이 아닌 복수의 겹사람(주님과 함께 "하나"로서의 둘)으로 영원히 내가 존재함입니다.

단 "영으로서의 하나님"(요 4.24)께서 사람되시어 영원히 육체를 입으심인지라 이는 어떤 의미냐 하면, <육체이신 사람>으로서 <내 육체 안에> (마치 영혼처럼) 내 안에 계심입니다. 육체인 사람이 내 육체 안에 있을 수 없지만 오직 한 분 내 주님만 홀로 가능하십니다. 창세/創世 이래 이 유일무이의 색다른 현상이 바로 나의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됨으로써 내 "<죄의 몸>은 멸해져"(롬 6.6) 완전 결딴나버려 망가지는 것이, 성령으로 주님 친히 내 안에 임하여 오시는 순간 엄연한 역사적 사실(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심은 <주님과 "하나", "한 영" 됨>으로서의 내 부활이 되어 영원히 나는 주님을 위하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친히 입증해 보이신 대로 나만 위하시는, 이같은 '삶과 생명의 영원한 법칙'으로 영원히 고착화되니,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4.24)으로 완전히 바꿔짐이 나의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갈 5.25) 것이요 "성령으로 행함"(:25)입니다. 이 효과가 어떤 것이냐 하면, 복제/複製된 "나"라는 인간이 이 만우주에 가득 차 있는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나와 하나되신 주님이 그렇게 만유로서 맘유 안에 계시니까! "풍성한 생명"(요 10.10)이 이런 것입니다. 그득하고, 너넉하고, 푸짐하고, 든든하고, 느긋하고...무엇이라 가히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쩨쩨하게 궁색하개 변변찮게 이 세상을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 만우주의 상속자다운 행동거지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각자로서 <겸손히> 세상에 <군림>합시다.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으며...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쫓겨 다니며, 떠돌며, 헤매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이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巖穴(바위)과 토굴/土窟(흙을 파낸 큰 구덩이)에 몸을 숨기는 환란을 당했으나"(히 11.35-38) 건들건들 유유자적함으로 다 소화해낸 것은,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행 9.31) 나간 때문입니다.

하나님 친히 나의 구원 자체가 되심이니 이는 바로 사람되심 즉 "마지막 아담"이 되심인데 그렇게 "마지막 아담" 되심 그대로, 사람의 육체가 되어 계시는 그대로 내 안에 오심을 가리켜, "나의 구원 받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사람의 육체"라 하는 것은 현재의 이 몸과 같은 동물적 육체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직접 목격한 대로, 동물성 육체는 당장 눈이 멀어버리는, 정오의 해보다 더 강하게 발산되는 영광의 광채(행 26.13)의 신령한 몸이니까, 180도로 인식전환을 해야 합니다. 


2025년 12월 18일 목요일

이 시점 화급한 자아진단




성경 해석 그 중에서도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의 우리 위하신 죽으심에서 문제의 본질이 어디 있느냐 하면 "성령" 관련 몰이해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모른다는 중대한 결함에 있습니다. 말을 바꾸면, "3위1체"에 대한 무지/無知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마 28:19)이신(또는, "~으로 계신") 줄은 알지만 그 표현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지금까지는 몰랐기에, "한 분 하나님이시나 어떤 때는 성부로, 어떤 경우에는 성자 혹은 성령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말까지 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로서의 모자/母子(하나님은 성별이 없으시기에 대표적인 남성으로 통일시켜 "부자"라 해야 하지만 부드러운 어감/語感을 위해) 관계이시나, 두 분이 "하나"(요 10.30)로 계심이 "성령"이신 사실을 몰랐기에 빚어지는 혼돈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에서야 밝혀진 것이지만, 이 "하나"라 함은 3위1체의 "제3위"를 뜻합니다. 즉 성질로서의 상반/相反을 이룬 짝은 반드시 "하나"로서 상보/존재하고 활동함을 의미합니다. 여기가 만유 이치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부와 성자의 "하나"되심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이시기에 성령을 "성부"시라 해도 맞고 "성자"로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요 14.9) 하셨고,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임하여 오심을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14.23)이라 하신 것이며, "하나"이시니까 복수가 아닌 3인칭단수로 표현되시어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함이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앎이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7)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보혜사/保惠師(Comforter)"시라고도 하셨는데,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26)이라 하셨습니다. 성령은 또한 주님 자신을 가리키심이기도 하기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나 너희는 그를 앎이니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17)이라 하시어, 다름아닌 당시 제자들이 항상 뵙고 함께 거처하시던 주님 친히(우리 위한 죽으심 및 부활하심 후에) 그 제자들 각인에게 임하여 오실 것인 바 이 곧 성령이심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나의 구원과 관련된 일체의 사실 즉 나 위하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구체화하고 현실화함이 단지 이론만으로써가 아닌 실제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시어(내가 주님을 실제 내 안에 성령으로 모심으로써) 나와 "하나"(10.30)를 이루시어 "한 영"(고전 6.17)이 되심으로써만 비로소 달성됨에 있다는 이 핵심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고 그 부활하심이 나의 실제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됨으로써 나의 <구원 받음>이 성립되고, 동시에 상대성의 동시성(일방적인 것은 없어ㅡ은혜의 새 창조이기는 하지만 사랑 즉 "하나"됨에 의한 창조이니까 상호 작용)이므로, 나의 모든 것 즉 나의 언행심사 일체 그리고 내 몸과 영 및 나의 삶 자체가 주님께 바쳐져 주님의 소유가 됨입니다. 나를 "피로 사심"(행 20.28/
고전 7.23)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는 육체로 "한 몸"(창 2.24/마 19.5)이 됨에서 아내의 육체가 남편의 것, 남편의 육체가 아내의 소유가 되는 맞바꿈과 똑같은 것입니다(고전 7.4). 그래서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개역한글/개역개정의 잘못된 번역이니 "위하여"로 고쳐야)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대신하여(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한 것입니다.

내 삶 자체가 주님의 소유라 더 이상 나를 위한 것이 아니기에 당연히 그러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 임자)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그리고 엄중한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무릇 "나는 구원 받았노라" 하는 이라면 모름지기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데 다시 말해 주님만을 위하는 일상생활이어야 함에도 그렇지 않고 여전히 이전처럼 자아중심일 때는 예외없이 자기를 속임이요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된 알도 없거니와 성령 받아 모신 역사도 없다는 최종 결론입니다.

여기서 유일한 해결책은 즉각적 회개입니다. 이모저모 자기를 합리화하려 하지 말고 자아중심 즉 주님 위해 살지 않았음을 뉘우쳐 차후로는 어떤 경우에도 여하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 중심, 상대방 중심의 순종으로 나아가리라는 무조건적 결단입니다. 이것만이 이 순간 가장 안전한 방안입니다.     (계속)

2025년 12월 17일 수요일

참고 선을 행함으로 영생


"참고 선을 행함"이 "영생"(롬 2.7)이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10)이다. 반복한다; "참고 선을 행함"="영생"(롬 2.7).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영광과 존귀와 평강". 여기에는(하나님 말씀으로 분명히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믿음"="영생",
"믿음으로 의롭게 됨"= "영광과 존귀와 평강" 등의 말은 일언반구도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 그것은 이미 <전단계>이기에!
지금은 그 때를 훨씬 넘어 <최종 단계>다!
언제까지 제자리 걸음만 되풀이하려는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하나님의 영원하신 계명 곧 가장 이상향적 삶을 약속하여 지향하는 생명의 법칙 다시 말해 더 다시는 자아중심이 아닌 상대방 중심의 사랑으로 "하나"됨 즉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함>ㅡ요 10:30/고전 6:17/고전 7:4)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주님과 내가 명실공히 하나, 한 영됨으로써).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법칙)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마 5:16-18).

이런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실현 가능한) 이상적인 삶의 방법은 지금까지 그 어느 세상 철학도 종교도 가르쳐본 역사가 없으니 이유인즉 "3위1체"의 오묘한 이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 "머리"로서의 창조주 하나님 아래 모두가 그 "몸"의 "한 몸"("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이니"ㅡ고전 12:26) 역할을 하게 되면 각자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대신 사람마다가 다 나를 위해 주는> 구조/체제인지라 모든 사람이 마치 나 자신처럼 되어 나를 위해 주므로 이보다 더 이상적 삶은 없는 것.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불가결성은 여기서도 훌륭히, 완벽히 입증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만인간울 품어 주는(3위1체의 생명의 법칙의 근원이 되심으로써) 하나님이 없이는 이상향적 삶이 도무지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 이같은 이치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김으로써만 각자 자기 모든 이웃을 예외 없이 사랑하여 섬길 수 있기에. 바로 이런 이치를 바벨론 신학은 말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부터 거짓말로만 일관했기에. "구원"과 "사랑", "영생"은 말만 했을 뿐 이런 "하나"됨은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선을 행함"(롬 2:7)은 일절 배제했기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들로 너희 착한 행실(생명의 법칙을 사랑하여 나타내는ㅡ사랑의 하나님을 현실적으로 입증하는)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ㅡ이렇게 명령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임이 명백하고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라 못을 박으셨는데 대관절 무슨 재주로 천국에 가려는가? 



2025년 12월 16일 화요일

여고보(약 2.2~9), 요한(요일 3.18), 바울(고전 16.14) 모두가 강조한 것은 사랑(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과 '행함'과 '구원'ㅡ고로 이제는 더 이상 헷갈리지 마시기를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과 '행함'과 '구원'



○●●●   <구원>이 무엇이냐   ●●●○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으니(디도서 3.5)



○●●●  이 구원을 <믿어야>   ●●●○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다(3.8)



○●●●   그러나 말로는 믿는다 하나 행위로는 <믿지 않으니>(하나님을 시인하지 않고 부인하니)   ●●●○

저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않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1.16).



○●●●   그러므로 결론은, "행함(행위)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아아 허망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20).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 존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인간 창조와 함께 인간에게 주신 계명이니 이는 성자이신 주님께서 성부이신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지키시는 "계명"과 동일한 3위1체의 기본 틀에서 준수하게 되어 있는 생명의 영원한 법칙을 말함ㅡ요 10.18)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자아중심이 아닌 상대중심의 자기 부인에 의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병'을 이루는 "하나", "한 영"ㅡ요 10.30/고전 6.17)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음>"(롬 2.6~13)에 있어(1.16).  ●●●○



○●●●   따라서 이 글을 마무리 지으면, 아담 범죄로 죽은 자가 되었으니 가장 먼저 산 자부터 되어야 했었고, 이 목적으로 새로이 창조됨이 "구원 받는" 것이며, 이제는 산 자가 되었으니 산 자로서 마땅히 생명의 법칙을 지켜야. 아담이 이 생명의 법칙을 지키지 않아 죽은 자가 되었고 천사가 범죄하여 악령이 되었으므로.

이 생명의 법칙은 이제 구원된 우리에게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라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모든 것을 하고"("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ㅡ고전 10.31), 주님을 섬겨 주님의 말씀대로 삶을 영위함인데("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ㅡ골 3.17), 어찌 그 모든 것이 "선을 행함"(롬 2.7)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선한 행위가 아니면 그럼 악행이란 말인가.  ●●●○

2025년 12월 14일 일요일

항상 대면하는 사람 어느 누구보다 더 가까우신 사이

"하나님"이시라 하면 우선 인식이 "볼 수 없다"는 것만 머리에 박혀 있어, 애매모호 막연한 인상으로만 남기 쉬우나, 이는 크나큰 착각입니다. 성령으로 계시기에 말 그대로, 문자 그대로 365일 24시간 내 앞에, 옆에 "사랑의 하나님"(요일 4:8,16)으로 계심인데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사람이 되어 계신다는 사실을 왜 마음에 두지를 않는가요? 사람이 되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바로 '성부 하나님'의 "형상"(고후 4:4/골 1:15)이시라는 성경 기록을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요? 아들께서 아버지의 형상이시기 때문에,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건만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 인간은 보았고, 그리하여 24시간 사람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서 대면/對面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가 아무리 가까워도 이 정도로 가까이할 수 있으며 가깝게 될 수 있나요?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지만, 그래서 육체로서의 사람 몸이 되시어 육체로서 누구나 뵐 수 있으나,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 즉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기에 성부 하나님과 "하나"(10:30)되심이 영원불변이시라 사람-하나님, 하나님-사람으로서 유일하시다는 차이뿐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계셔도 이런 유일무이의 특이성 때문에 <육체로 내 앞에 계심>과 똑같고 그냥 보이지 않는 영으로만 계심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신 것입니다. 미시세계에서 파동성과 입자성이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둘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법이 없고 둘 중 어느 하나만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 이 "하나"됨의 특성이기에 성부와 성자 관련해 이상과 같이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성자 하나님의 육체로서의 사람의 모습 그대로이시라고ㅡ.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분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라 아멘"(딤전 6:16). "하나님은 <영>"이시라 할 때와 천사는 "부리는 <영>"(히 1:14)이라 할 때의 개념 차이는 엄청난 것이니 창조주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은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피조물에게만 한정되는 특성일 뿐입니다. 창조주께는 전연 해당되지 않습니다.

단 성부 하나님 홀로 계심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을 낳으시어 두 분이시지만 "하나"로 존재하시는데 인간 창조에서 불상사가 야기되어 인생들이 죽음의 폐기물이 되어버리자 성자께서 부득불 피조물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피조물 중 하나처럼 되어 있으시니, 그래서 만유의 기본 원리인 '3위1체'를 따라 성부 하나님 또한 친히 "형상"을 취하시게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모습 그대로이시다"의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설/假說도 아니고 실제 상황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적지 않은 위로의 은혜를 받습니다. 온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 각자 손을 내어밀어 잡듯이("곧 거기서도 주님의 손이 저를 인도하시며 <주님의 오른손>이 저를 붙드실 것입니다"ㅡ시 139:10). "제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니 주님께서 <제 오른손>을 붙드셨습니다"ㅡ73:23).

"주님과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ㅡ행 20:28)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7-20). 생명의 법칙은 영원히 상대성의 동시성임니다. 일방적이 아님을 항상 명심합시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한 주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으나 사랑치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자기를 속임이 문제

혹자는 말할 것입니다. "사탄이라는 피조물이 제가 무엇이라고 전쟁에서 패해 땅으로 영구 추방되었다고 해서 그런 재앙을  일으키며 분노를 발산시키느냐"라고. 지금껏 강조했듯이 인간 자체가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라 즉 심히 나약한 동물성 육체로 전락했고 게다가 사탄이 아담의 인간 세상 통치권을 아담 대신(아담으로부터 넘겨 받아) 행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원리원칙을 따라 우주를 관할하시지, 일시적 기분(감정)에 좌우되어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한 핵심입니다. 따라서 인생 구원도 아담의 범죄의 보응으로 된 형벌 차원이기에, 형벌은 형벌대로 시행하시면서 무한 자비와 은혜를 베푸셔야 하므로 친히 사람되시어 우리 위해 죽음의 고통을 맛보시는 지경에까지 이르신 것.

그러므로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성급하게 판단하여 자취/自取하는 어리석음이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씩 인도하심 따라 한 발자국씩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앞서거나 초월하는 피조물의 역량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당장 보기에는 석연치 않게 나타나도 결국 지나놓고 보면 찬양과 감사 밖에 없는 법이니까.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이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런 신뢰 없이 무턱대고 오만한 생각을 품음으로써 악령 사탄의 범죄도 인간의 파멸도 발생한 것이므로 우리는 이를 거울 삼아 스스로를 단속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언 4:23) 하였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라"(고후 10:5) 한 것이니 끊임 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의 <인자(goodness>와 <엄위(severity)>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될 것이다"(롬 11:19-22).

"항상 복종함으로써(성경을 통하여 나타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성경은 경고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요일 4:8,16)이시지만 동시에 3위1체의 하나님으로서 상반/相反이시기에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시라 그렇습니다. 

2025년 12월 13일 토요일

21세기는 천사의 복음에 의한 교회 최종 연단의 때



왜 "천사가 복음을 가졌다"(계 14:6)고 했을까, 복음을 천사의 활동과 관련시킨 것으로는 이 외의 성경 다른 부분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지금의 "마지막 때"와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계시록 14장 앞 13장에서는 적그리스도("짐승"으로 표현되어ㅡ네피림으로서 악령의 '씨'이니까)의 출현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고로 이 21세기 사건임은 명백합니다.

기록된 순서가 반드시 시간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설명상 그렇게 앞뒤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하늘의 전쟁"(12:7)에서 미가엘이 통솔하는 천사 군단이 사탄 일당을 상대하여 일대 접전을 벌였다는 기록도 마지막 때의 예언서인 계시록에만 나옵니다.

따라서 사탄이 대패하여 그 악당 떼거리가 항구적으로 천상으로부터 추방 당하는 광경이 역시 묘사되어 있는데, 바로 1908년 6월 30일의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 사건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는 세상 사람에게는 "퉁구스카 대폭발(tunguska event, tunguska explosion)"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그 후로 1백년 넘게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 대충돌의 원인이 과학적으로 규명된 바가 없고 뿐만 아니라 당시 이를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길다란 전신주 같은 것이 지상으로 내리꽂히는 것이 보여졌으며 두 눈이 퉁방울 같이 거대한 용이 흐느적거리며(인터넷 검색에서 확인됨) 공중 높이 지나갔다는 진술이 있어 확인되는 까닭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연 성경에 예언한 대로("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 것이다.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ㅡ계 12:12), 1908년 이후 연속되는 대재앙들이 또한 그 증거입니다. 1917년 시작된 소위 "공산주의 혁명"의 난동으로 희생되거나 숙청된 사람들, 그 외 기아, 강제 노동, 처형, 추방 등으로 인한 사망자를 모두 포함하여 수천만에서 최대 1억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공산주의 흑서"(The Black Book of Communism)에서는 약 9,4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독감(1918~1919)으로 2천만 명에서 최대 5천만 명(일부 추정치는 그 이상)이 세계적으로 사망했고,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약 1,500만 명에서 2,200만 명의 사망자, 제2차 세계대전(1939ㅡ45)에서는 홀로코스트와 원자폭탄 투하 등 포함해 7천만~8천5백만 명의 사망자. 소련 대기근(1932ㅡ33)에서 최소 500만 명 이상, 중국 대기근(1959ㅡ61)에 2천만~4천만 명의 추정 사망자라고 합니다. 그 외 간헐적으로 일어난 대소 사건 사고까지 합치면 실로 "땅과 바다는 화 있을 것이다" 한 그대로입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미루어 볼 때 지금이야말로 "내 백성아, 거기서(바벨론에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였다"(14:6,7)ㅡ이 메시지의 때가 바로 지금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음 단계>는 바벨론 심판으로서 각종 재앙이 닥치고("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이다 하더라ㅡ14:8), 그 <다음>이 악한 자 곧 적그리스도 출현입니다("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ㅡ14:9).

또 하나님 백성들에 관해서는,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지금 이후로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 하니,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다 저들의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니 이는 저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다' 하셨다"(14:13) 함이 이루어지고, 또한 "짐승 앞에서 이적을 행하는 거짓 선지자"(19:20)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는"(13:15) 사태가 일어날 것입니다.

계시록은 또한 이 때를 가리켜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추방된)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는다"(계 12:14) 했는데, 천사가 다니엘에게 말해 준 그 "하나, 둘, 반"이란 특이한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 21세기 하나님의 교회 연단은 "천사의 복음"이 그 주축을 이룬다고 할 것입니다. 

2025년 12월 12일 금요일

천사의 복음과 바벨론 신학 그 구체적인 핵심적 차이

야고보서는 평이/平易하게 아주 쉽게 성경을 풀이합니다. 아래와 같은 대목이 그러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아래 요한의 지적도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 사랑치 않는(사랑의 행위가 없는) 자는 사망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다"(요일 3:15).

즉 믿음은 마음으로만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몰라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다가 이제는 알았으니(믿었으니) 당연히 순종하여 악(나쁜 것)이 아닌 선(좋은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함이란 뜻입니다. 바벨론 신학 곧 사탄의 거짓말은 이러한 믿음=순종=행위라는 너무나 상식적인 것도 말끔 지워버린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지 행함으로 얻는 구원이 아니라"면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는, "믿는" 자가 그러하다는 주님의 말씀이신데("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다"ㅡ요 5:24), 이를 요한이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 즉 믿으니까 순종의 행함으로 그 믿음이 드러난다는 의미인 것.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인데 그 <믿음이 순종의 행함으로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너무나 상식적인 이치도 그 옛적 에덴에서처럼 사탄은 바벨론 신학의 황당무계의 거짓말로 뭉개버린 것입니다. 논리에도 맞지 않는 속임수임이 뻔하건만 먹혀들어가니 놀라울 뿐입니다. 이는 아담의 죽음을 "영적"이라고 둘러대는 것과도 관련됩니다. 무척이나 알쏭달쏭한 얼버무리기 표현으로 거짓말의 고수나 즐겨 쓰는 수법의 주절거림입니다.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율법을 행함(순종)으로써만 의롭게 될 수밖에 없었던 모세 시대 개념을 억지로 갖다 붙인 횡설수설의 넌센스입니다. 은혜 시대에 왔으므로 아무도 율법적 행함을 들먹이는 자가 없는데도! 아무리 바벨론 신학자라도 이다지도 분간을 못한단 말인가요!

"선을 행함"("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ㅡ롬 2:6,7)은, 창조 이래 모든 삶의 기본 자세인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럼 악을 행하란 말인가요. 미워하고 강탈하고 도둑질하면서 삶을 영위할 수 있나요.
 
그러하나 아담 범죄로 돌연히 동물성 육체 즉 자아중심의 "죄의 몸"(롬 6:6)이 되어버린 결과로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게"(3:10) 되렇듯 "죽은 자"(마 8:22)는 산 자부터 되는 것 즉 새로 창조됨(성령으로 다시 남)이 시급하고 최우선 순위입니다. 우리의 "구원 받음"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구원만 받으면 무조건 영생 복락이 아니니, 천만의 말씀! 이제야 비로소 <산 자로서의 선을 행함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그 뜻일 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롬 8:2)되는 것부터가 시급했었는데 이제 해방된 것입니다. 성경이 설명하는 바가 바로 이 의미입니다.

"율법(선행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계명/"하나님의 뜻"ㅡ마 7:21)이 육신("죄의 몸")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죄와 사망의 법" 즉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옴으로써"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세!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했었던ㅡ롬 7:23,24) 그것을 하나님은 (해결)하심입니다.

곧 죄(자아중심의 동물성 육체 때문인)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을 단죄하심으로써(사형에 처하시어ㅡ우리 위한 죽으심) 이제 이 육신(저아중심의 죄의 몸)을 따르지 않고(주님의 이 죽으심이 내 죽음 즉 나와 함께 하나되어 죽으심이라 내가 죽었은즉) 그 영(성령)을 따라 행하는(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써 문자 그대로 주님과 "하나", "한 영"됨으로써 다시는 자아중심이 어닌 상대방중심, 하나님 중심이기에ㅡ요 10:30/고전 6:17)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이 사탄 지배하의 악한 세상에서 "참고 선을 행함"ㅡ롬 2:7)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3,4)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 받음"은 하나님 앞 <산 자>로서 마땅한 <사랑과 순종의 "선을 행함"으로써 영원무궁 삶을 향유함에 있는 것이지, 그냥 무턱대고 영생 누림이 아님(선행이든 악행이든 무조건 죽지 않고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을 말함이 아닌)을 명확히 다시 밝히는 바로서 재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 받은 증거, 그 열매가 무엇이냐 물을 때 서슴지 않고 나오는 답변이 자아중심이 아닌 하나님중심일 수밖에 없는 "참고 선을 행함"(롬 2:7)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선행의 결론이 "영생"(:7,10)입니다.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6:22) 한 그대로입니다.    

무지의 암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해방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신성한 역할에 충실해야 할 때

더 이상 바벨론 신학과 바벨론 교회의 종살이에 매여 있지 맙시다. 사탄의 멍에일 뿐입니다. 왜 에덴을 자연계 동산이라고 부질없는 고집을 부리시나요? 에덴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있어("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ㅡ창4:16) 그것이 근거라고요?


"에덴"아라는 말이 금기어가 아닌 이상 아담 부부가 에덴에서 쫓겨나 그 옛 추억의 황금 복지 에덴을 그리면서 얼마든지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지 않나요? 그것도 무슨 잘못인가요? 에덴의 강 이름 유프라테스(현재의 메소포타미아 강)도 마찬가지입니다("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ㅡ창 2:14). 지명만 아니라 강명도 얼마든 이름 지어 부를 수 있지요.

성경(구약)은 분명히 에덴을 "하나님의 동산"이라 못박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우셔서 자연계 동산을 "하나님의 동산"이라 하시겠나요.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으니"(이사야 51:3).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뭇가지"(에스겔 31:9).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움으로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다"(에스겔 28:13,14). "두로왕/"을 타락한 그룹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자연계 동산에 무슨 영물 그룹(cherub)이있답디까?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스랍을 상징함인 듯)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3:24) 했는데, 천사도 아닌 막강한 스랍/그룹을 동원하심은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이 인간 관련해 협잡질을 못하게 아예 차단하심입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에덴 족속"(왕하 19:12)도 있고 사람 이름도 있다고 해서("요아의 아들 에덴"ㅡ대하 29:12) 성경의 에덴이 실제 자연계 동산이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앞서의 설명대로 스랍과 그룹이 진을 칠 수 있는 영계(초자연계)가 에덴 동산인 것입니다.

이 세계가 대칭성으로 양립하는 양면의 세계임을 알려야 합니다. 보이는 가시적 물질세계뿐인 줄 착각하는 미망에서 세계 사람들이 벗어나도록 하는 선각자 구실을 합시다. 악령들의 농간으로 너무 무식 무지의 어두움 가운데 방황했습니다. 

2025년 12월 11일 목요일

아직도 구태의연한 바벨론 신학의 복음 아닌 복음을 말하시는가

 ○●○●○●○●○●○●○●○●○●○●○●○○●○●


세상 사람 모두 죽은 자들이니까 산 자가 되도록(산 자로 복귀되도록) 복음을 전파하라 하셨는데 왜 "너희(구원된)는 <죽었고> 너희 생명이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 했는가? 왜 또 "죽었다"고 말하느냐? 아담 범죄로 인해 신령한 몸을 잃어버려 하나님이 애당초 산 자로 창조하셨던 그 창조된 인간이 아니기 때문.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닌 두루뭉술 어정쩡 어중간한 상태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산 자가 아니면 죽은 자일 수밖에 없기에. 이렇게 아담이 범죄로 죽음으로써 이전의 그 신령한 몸을 잃고 현재와 같은 동물적 육체로 남아 있기 때문에 "죽은 자"라 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고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신령한 몸 즉 완벽한 육체로써 살지 않는 한 절대로 "산다"는 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연속일 뿐이니 우리도 이제부터는 이런 인식으로 시종일관하기를 요구하심은 당연하십니다. 동물이야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생명이기에 죽는 것과 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생명이지만 인간(아담)은 처음에는 동물성 육체를 바탕으로 "하나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으나 다음 단계로 실제 하나님의 형상답게 영생하도록 영혼을 다시 조성해 넣으셨기(아담의 코를 통해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때문에 신령한 몸이 아니고서는 '사람'이란 요건에 들어맞지를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애초 창조된 사람의 형상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한 번 태어났다가는 죽는 존재이므로 도저히 원래의 "사람"이라 할 수는 없고 그 대신에 "죽은 자"("산 자"가 아닌)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강조하지만, 현재의 인간을 우리는 "죽은 자"라는 수식어를 꼭 붙여 사용하는 것이(주님 친히 본을 보이시어 말씀하신 것처럼ㅡ마 8:22), 이 "천사의 복음" 시대인 21세기 우리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땅히 견지할 온당한 자세라 할 것입니다.

21세기 전도법이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왜냐면 이렇게 강조하면 듣는 이마다 황당하다 싶어, "당신 미쳤어? 왜 멀쩡한 사람을 두고 죽었다고 해?" 하고 그 이유를 묻개 되고 자연히 전도의 대화는 시작될 테니까. 우리는 또 진실 그대로를 피력함이니까 꿇릴 이유도 없습니다. 이 중요 핵심 진실을 혼자만 알고 전달하지를 않는다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다"(고전 9:16) 한 바울 사도의 말 그대로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21새기 복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영생하도록 만드셨다 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고/人間苦에 대한 완벽한 설명의 답변이 되니까 바로 "천사의 복음"(계 14:6)이요 이제까지의 바벨론 신학의 어처구니 없는 "영적 죽음"이란 궤변을 단번에 격파하는 철퇴가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 어버이 자정의 하나님이신데 이렇게 이유 없이 육체적 고통 중에 인생을 방치해 두실 리가 있나요? 일론 머스크를 위시해 많은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 아닌가요? 입을 닫아 둘, 도리어 이 질문 앞에 쩔쩔 맬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는 새로 등장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부터 전파되었던 것이나 사탄이 초능력의 세상 지배권(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넘겨 받은"ㅡ눅 4:6,7)으로 재빨리 손댐으로써 감추어졌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했던 바울 사도 생전에 그 지경이 났으니 하물며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말해 무엇하리!

그러고도 2천년 세월이 지났으니! 이것이 세상 실상입니다. 세상을 제멋대로 주물러놓은 것입니다. 성경에 무식한 사람들은 "하나님 통치하는 세계인데 감히 피조물 사탄이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에 손대다니" 하고 철부지 소리만 하겠지만, 손댄 것이 아니지요. 에덴에서처럼 거짓말을 해놓고 꼬드긴(여자를 꼬드긴 것처럼) 것이고 세상은 여자처럼 넘어간 것입니다.

약해서가 아니고 악해서입니다. 약한 것은 악한 것으로서 성경은 규정합니다. 허물과 불찰은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정확한 진단이십니다. 인간을 약한 자로 만드신 적이 없으시니까. 언제나 자아중심에 휘말려 지내는 것이 그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련해서는 게으름도 자아중심이요 무식무지도 자아중심이 그 뿌리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소리를 꺼낸 적이 없는데 새삼스레 '영생하게 되어 있었던 아담의 신령한 몸, 운운' 하면 이상하게 들리지 않겠느냐?" 하고 이 내용으로 복음을 말하기를 꺼린다면, 분명히 단언컨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게 되리라"(마 10:33)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입니다. 이 내용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신지 아닌지 그것만 각자 자기 심중에 판단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확실하면 지체없이 목숨을 걸고라도 그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막 8:38) 하신 말씀과 같은 결과로 되어질 수밖에 없을 터이니까. 이 "천사의 복음"이 진리라는 증거는 이와 관련된 그 증표에 있으니 다름아닌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계 12:14)가 그것입니다. 이 도식/圖式 따라 3운법칙, 3위1체 등이 밝혀졌으니까.


○●○●○●○●○●○●○●○●○●○●○●○○●○●

하나님을 최고 으뜸의 낙을 삼아 "항상 기뻐함"(살전 5:16)이 나의 힘/운동력(느헤미야 8:10)

하나님을 최고 으뜸의 낙을 삼아 "항상 기뻐함"(살전 5:16)이 나의 힘/운동력(느헤미야 8:10). "아버지 품속"(요 1:18)의 의미.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신다"(요 8:29).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 상대성의 동시성입니다. 하나된 둘은 함께 동시에 움직임이 그 하나됨의 특징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은혜인 줄로만 착각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거저 은혜로 선물로서 믿으면 되는 구원으로만 생각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주의에 흘러 우리 구원을 우리 자신 스스로가 망칠 뻔한 것입니다.


물의 성질 그리고 그 생명은 흐름에 있어 흘러 보내지 않으면 고여 썩게 마련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은 모름지기 흘러가는 데가 있어 그리로 방향을 정하듯이 그래서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듯 
나 쪽으로가 아니라 항상 나 밖의 상대방 쪽을 택하여 일향/一向 일진/一進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도 항상 상대방중심입니다. 이를 생명의 법칙이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3위1체 법칙에서의 "3위"적 작용 즉 "하나"됨(사랑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이제까지 그저 막연히 사랑은 사랑일 뿐이라고만 인식해 왔지만, 이와 같이 엄밀히 법칙임이 명확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어느 것 하나 빈 틈이 없고 아리송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원리원칙대로 하시니까 우리도 100%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 앞에서 만인 균등입니다. 여기 진정한 자유가 깃듭니다.

물론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요일 4:19)입니다. 주종 관계이니까. 본을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어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심이니"(요 5:19) 하심과 같습니다.

노동을 해도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상대(남)를 위함입니다. 모두가 다 그러하니까, "우리"를 위함입니다. 공산주의(인류의 오랜 염원/숙원으로 인식되어)가 이상은 거창하게 보였지만 실패한 것이 이같은 공동체 의식 결여에서 온 것입니다. 3위1체에서의 핵심되는 부분으로서의 "하나"(요 10:30)됨에 대한 무식무지 때문입니다. "한 몸"의 원리에서 보듯이 갑은 을의 것, 을은 또 갑의 것이 되는 이치를 간과함입니다.

이것이 짝을 이룬 둘의 "제3위"로서의 관계 형성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갑 안에 을이 있으면 을 안에 갑이 또 있어 갑의 것은 을의 소유이고 을의 소유는 갑의 것입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설명을 해 오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14:10)이라 하셨고, 또한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17:10)이라 하심이 모두 이 대원리를 말씀하심입니다.

나만 구원 받으면 끝난다는 자아중심에서 이제는 탈피해야 합니다. 애당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 창조주 아래에서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머리로 모셔, 만민이 그 몸의 지체로서 평등하게 소중한 한 부분씩 이루어 있음을 말함이니까.

여기서 만인 구원설을 피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이요 그 뜻을 따르지 못함으로 현재의 비극이 빚어졌은즉 본시 형태로 돌아가자는 호소인 것입니다. 자아중심을 버리고 너나 없이 상대방중심인 생명의 법칙에 순응하자는 아주 단순한, 누구나 이해하기에 어려울 것이 없는 구체적 방법론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오셔서 확립해 주신 영원 불변의 것으로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 하신 그대로입니다.




2025년 12월 10일 수요일

우리는 "죽은 자", "죽은 자", "죽은 자"들

 


영혼은 신령한 몸에 있어야 당연한 정상이 아닌가


 

세상을 죽은 자들의 세계로 보지 않는 한 구원의 여망은 없다



한 서기관이(마 8:19)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 제가 따르겠습니다" 하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먼저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눅 9:57-62) 하므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어떤 이가 "제가 주님을 좇(따르)겠습니다마는 먼저 제 가족을 작별케 허락해 주십시오" 하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저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ㅡ세상 모든 인간을 "죽은 자들"이라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을 창조하실 리 없습니다. "영적 죽음"이라는 어슬픈 따위 의미로는 단 한 마디도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면 결론은, 아담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롬 5:12) 것인즉, 현재의 이 동물적 육체가 죽음이고 그래서 모든 인생을 "죽은 자"라 하신 것입니다.

인간을 친히 지으셨던 창조주께서 하신 설명이십니다. 인간을 처음부터 죽지 아니하는 몸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이런 동물적 육체가 아니라 아담이 신령한 몸이었다는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령한 몸을 잃고 전연 생소한 동물적 육체이다보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여우나 새는 원래부터 동물로 살도록 창조되어 그렇게 안정되어 있지만, 인간은 신령한 육체였다가 돌연변이로 동물성 육체가 되니 어색하고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설명은 확실하게 나온 것입니다. 이런 죽어 썩어 없어져버리는 동물적 육체로 "산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말고 현재 죽은 자이니 무조건 "살고부터" 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으로서의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입니다. 다른 것은 일절 여유 부릴 건더기 하나도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다섯 마디뿐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모두의 지금 현주소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그렇고 이제 비로소 눈을 뜨게 된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이 그렇습니다. 이외 한눈을 팔면 하나님의 진노 밖에 없어요. 왜 그러냐,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원래 뜻이 완전히 망가져 내려 하나님 인상을 철저히 구겨놓은 것이 인간 자신인데 이틀 안타까워하고  그 복구에 전념하느라 눈코뜰 새 없어야 하는 북새통임에도 이 박살이 나 산산히 흩어진 사금파리(사기그릇의 깨어진 작은 조각)를 쓸어 담아 놓고, "에헤야디야, 살 맛 나네" 키득거리며 강강술래 도는 꼴사나운 작태이니까! 목놓아 울어도 시원찮은 판에!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시 126:6). 지금은 울 때입니다. 울며 복음의 씨를 뿌릴 때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첫째기도와 둘째는 복음 전파, 그리고 동병상련의 구제(함께 나눔) 이 셋 밖에 없습니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당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 혼자 배 부르면 그만이라는 안일에 젖은 자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

2025년 12월 8일 월요일

바벨론 신학화한 기독교도 이런 초대교회 진리는 가르치지 않았다


 

바벨론 신학은 이 양심을 시궁창에 쑤셔 박는 만행을 저질렀다

바벨론 신학은 이 양심을 시궁창에 쑤셔 박는 만행을 저질렀다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1).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24:15,16).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딤전 1:5).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1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 것이니"(3:9).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딤후 1:3).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함이다"(히 13:18).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다"(벧전 3:16).

2025년 12월 7일 일요일

3위1체의 "3위"의 정체가 "하나"(요 10:30) 곧 사랑의 실체

현재 우리 인간의 유일무이의 목표는 죽는 인생이라고 해서 영생이 아닌 것입니다. 영생하는 인간인데 그렇게 창조되었는데 죄를 지어 즉 "범법/犯法하여"("죄는 불법/범법이다"ㅡ요한1서 3:4) 이런 덧없는 무상/無常 인생 다시 말해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린 즉 현재와 같이 죽어 썩어 모든 인간고/人間苦의 대상이 되어 이런 고통 고난 중에 허덕이고 있는 한없는 고달픔인 것입니다.


고로 "영생"이 아니라 지금 비정상 상태에 빠져 있으니 "정상 회복"이 화급하다고 해야 정답입니다. 이 정상으로 복구되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인 것입니다. 이는 백 번 되풀이해 강조해도 좋습니다.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매 순간 이 의식 속에서 지낼 수 있으면 이보다 더 이상적인 것은 없다 할 것입니다. 이 인식 차이가 사실상 굉장한 의미를 지닙니다.

"불법, 범법"일진대 어떤 법(칙)을 어겼느냐인데, '사는 법' 즉 생명의 법칙을 위반한 것입니다. 그녕 목숨이 붙어 있으니 그냥 살면 되는 것이지 사는 데에 무슨 법이 있느냐 하겠지만 어랍쇼? 나라에 왜 법이 있고 국가 헌법이 있죠? 똑같은 이치입니다. 우주 천하 나 혼자 있는 것이 어니라 단 둘만 있어도 피차간의 암묵적 약속이 필수·필연입니다. 이 언약이 바로 법(칙)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는 고로 그 분이 징치하신 양심이란 불문율이 작동함은 당연하고 이는 바로 하나님 실존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를 성문화한 것이 법(칙)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평등하게, 함께, 가장 이상적으로 살 수 있게 짜여진 것이 곧 "사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신 모습을 근거로 해서 기반으로 삼은 것이니 따라서 영원불변입니다. 다시 말해 "3위1체"로 계심이니 여기서 만유의 기본 대원리(우주 만유에 시행·적용되는)로서의 3위1체의 법칙이 나온 것. 생명의 법칙 또한 여기서 나왔으니 이를 정확히 대변하는 것이 디름아닌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 한 마디 말씀이야말로 "3위1체"의 핵심으로서 곧 "3위"의 명확한 정체를 밝히심이기에 그러합니다. 이를 또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성경에(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바) 바로 "한 몸" 즉 남녀 육체의 "하나"됨과 관련된 것으로 이를 가리켜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주관)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함이라"(고전 7:4) 한 데에서 충분히 밝혀진 것은 놀라운 알입니다.

이로써 "한 영"됨의 원리 더 정확히 말해 "생명의 법칙"이 적나라하게 설명되어진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밝히신 "하나"됨의 구조·얼개·짜임새가 정확하게 가름되어진 것입니다. 즉 갑과 을이 하나되어 병이 되는데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절대로 자기를 위하지 않는 철칙을 따름으로 각자 자기 구실에 충실/충성하는 그 결과가 '병'을 이룸이라는 것입니다. 곧 자아중심이 아닌 자기 부인 곧 상대방중심을 쌍방이 고수함으로 영원한 "하나"로서의 완벽한 조화·상합/相合을 유지함의 오묘한 이치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고 우리 피조물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요 10:17,18).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다"(요일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 3:16).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계명"이 바로 이 "3위1체의 법칙"인 것입니다. 사랑의 법칙, 생명의 법칙, 하나됨의 법칙. 짝의 법칙.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도 동일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태양)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다...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38-48).

백이면 거의 백사람이 이상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줄 아시면서도 이런 말씀을 하심이니 이는 우리가 별 수 없는 죄인임을 단지 자각하게 하려 하심이다"라고 변명하겠지만(바벨론 신학이 그렇게 말하도록 부추겨),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생각일 뿐입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여기 이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살라고 주신 이 동물적 육체가 아님을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하고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눈으로 늘 자주 대하는 것이 사람이라 하나님보다 사람이 내게 더 가까운 줄 착각하겠지만 천만에! 우리를 친히 지으신 바 어버이 이상의 자정/姿情이요 인자/仁慈시기에 하나님을 "품속"(요 1:28)으로 묘사했듯이 하나님 이상 가는 사랑의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 주님의 나 위하신 고통의 죽으심으로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 역사적 진실로서 영원히 각인되어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마 22:37)이라 하심이 바로 이를 근거하심입니다.

"천사의 복음"(계 14:6)을 통하여 이제 하나님을 새로 사랑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상대성의 동시성입니다 3위1체의 세계에서 일방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대칭성 원리를 따라 상대성입니다. 앞에서 "한 몸", "한 영", "하나"됨에서 설명했듯이 똑같이 항상 동시에 작동합니다. 이것이 "3위" <하나>됨의 뜻입니다. 

2025년 12월 6일 토요일

바벨론 신학의 "행위/행함"과 성경의 "순종"



 

마귀의 어처구니 없는 말씀 혼잡ㅡ"행함/행위"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포상·보답)하시고"(롬 2:7)ㅡ이것이 "순종"으로서의 <행위>이다. 왜 "율법의 행위"("율법의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는 것이다"갈 2:16)와 혼동하는가! 너무나 명백하므로, 혼동할 이유가 없다. "율법의 행위"는 바울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야 예수님의 죽으심이 필요 없이 종전대로 율법에 순종하면 구원된다는 또는 예수님도 믿되 모세 율법도 함께 행해야 한다는 주장(실질적으로는 둘 다 똑같은 것)을 말함이다.


이 둘이 하늘과 땅의 현격한 차이가 있는데도 이를 분간 못해,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ㅡ디도 3:5)를 <롬 2:7>의 "참고 선을 행함"으로서의 <순종>과 혼동한다는 말인가! 혼동할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혼동도 아래 사실과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그 진상이 단박 드러난다. 즉 우리는 아담 범죄로 모두 죽은 자이다. 죽은 자가 자기를 위해ㅡ자기 구원을 위해 무엇 하나 손가락 하나라도 꼼지락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런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한 것이다.

고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수 있는 것은 새 창조 즉 성령으로 다시(거듭) 나는 방법 외에는 전무한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의로운 자, 거룩한 자로서 단장되어 출발하는 법이니까! 죄인으로 창조하실 리 만무하니까.

그리고 우리가 성령으로 나는 것은, 성령을 선물로 받아 모심으로 됨이니 이는 다름아닌 나와 하나되시려고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님 친히 성령으로 내 영혼처럼 오시어 나와 영원히 하나되심이기에 그 죽으심이 내 죽음되고 그 부활 내 부활되어 문자 그대로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 탄생함이다. 그래서 새 영혼처럼 내 안에 임하심이 아닌가!

이렇게 산 자가 되어 생명을 구가하게 되니 당연히 산 자(아담처럼 아담과 함께 죽음으로서의 몰락 밖에 없던 과거 상태와 달리)로서의 행함 즉 행위 다시 말해 하나님의 양자들이 된 아들로서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이 생명이 됨은 너무나 당연하다. 어렵고 복잡할 것 일절 없는 것이다. 혼동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됨은 우리 사후/死後도 아니고 어느 특정 기간을 지나서도 아니고 성령을 선물로서 은혜 안에서의 믿음으로 받아 모심으로써 됨이니까!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심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심 그대로이시므로 성부 친히 또한 내게 임하심이기에 그래서 말씀으로 나를 아들로 "낳으심"("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것"ㅡ약 1:18)이다. 그러니 "참고(악마가 지배 관할하는 세상이라 갖가지 장애와 고난 고통이 뒤따르더라도 하나님의 변함 없으신 은혜로 힘 주심을 따라) 선을 행한다"(롬 2:7) 한 것이다.

이렇게 자명/自明한 것을 가지고 사탄은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사람들을 속여 멸망으로 빠뜨려 왔었다. 물론 성경적으로 말하면 미리 택하심을 따라 택하심 받지 못한 이들이 속아 넘어갔다고 말하면 될지 몰라도 하여간 사태는 이러하므로 바벨론에서 탈출하라 분부하심인 것이다. 


2025년 12월 5일 금요일

멜기세덱이 오늘날 21세기에 크게 부각되어야 하는 이유


멜기세덱이란, 바로 <아담이 살아난 것>을 말함이라 전에 지적한 적이 있기는 하나 이를 오늘날 "천사의 복음" 시대에 본격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싶어 다시 씁니다. 5천 살(5,000세/歲ㅡ아담으로서 930년을 살았으니)이 된 현존 인물인데도 21세기 오늘날 "천사의 복음" 시대에 그냥 덮어 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저촉되는 문제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다"(히 5:11-6:20) 했으니 제대로 설명하면(ㅡ해도) 능히 알아들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 하고는 더 이상 설명 않고 지나갔으니 지금까지 사탄의 사악한 거짓말의 "바벨론 신학"이 판쳐 온 지가 2천년이 흘렀는데 더 이상 침묵할 수는 없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라는 결론이니 "천사의 복음" 시대에서는 싫든 좋든 마땅한 공론화의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으로 "완전한 데 나아갈 일이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할 것"(히 5:11-6:20)이라 했으니 정히 때는 이제 온 것입니다. "아비,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히 7:3) 멜기세덱이니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역사가 없지요. 아담 외에는.

우리 주님께서 "멜기세덱의 빈차/班次(계열, 제사장 직무 수행에서의 차례/순서 등을 의미)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다" 함은 "마지막 아담"이 되시기 위해 즉 범죄로 죽어 없어진 "아담"의 빈 자리를 채우시려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니, 모든 면으로 아담과 같이 되셔야 마땅함을 의미하기에 그러합니다.

아담이 왜 또 제사장 역할이어야 하느냐 하면(아담으로서는 죽어 없어진 존재이고 별도의 이름으로서의 멜기세덱이나) 아담을 인해 모든 인간이 "죄의 몸"(롬 6:6)으로 돌연변이해 있어 하나님 앞 죄인인지라 그 중간의 조정자로서의 위치이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아담 스스로 범죄한 것이면 이런 자리가 결코 어울릴 수가 없지만 여자와 한 몸이 되어 있는 운명적인 측면이 감안되어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4)고 성경이 판단함과 같은 까닭에, 여자의 죄에 동참(이는 몸된 교회를 위한 머리로서의 메시야 우리 주님의 대속적 죽으심의 예표/豫表 같은 것)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자처럼 일단 죽음에는 이르렀으나 멜기세덱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났고 그리하여 하나님 앞 제사장 구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죽음을 보지 않은 에녹과 엘리야는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과 관련된 의미의 부활이지만 멜기세덱의 경우는 아담 자신이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 아예 죽음을 보지 않음은 아니고 일단 죽은 다음의 부활함입니다. 그러나 멜기세덱, 에녹, 엘리야 모두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반으로 한 "죽음으로부터의 승리"("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독을 뿜어 내는] 것이 어디 있느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ㅡ고전 15:55-57)인 것.

"생명의 끝도 없다"고 결론이 난 맬기세덱을 통해서도 확인되었으니 아담이 영생하는 자로 즉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에 이제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성의 영혼을 주셨는데도 썩어 없어지는 동물적 육체를 주셨다고 말하는 "미친 마음"(전도서 9:3)이 부끄럽지도 않나요? 하나님을 그렇게 이상한, 이해 못할 분으로 세상 앞에 광고해 놓고는 양심의 가책도 없어요? 아담 범죄 이후 사탄이 인간 세상읗 지배하면서 그 원수의 거짓말에 우리는 이같이 한없이 놀아난 것을 창피스러워하는 마음도 없나요? 이제는 그런 정처 없는 방황을 끝낼 때입니다.

따라서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존재는 하고 살아 있는 인물이지만 아담으로서는 "범죄자"요 "죽은 자"로서 역사적으로 종결되었고 끝난 것입니다. 더 이상 아담으로는 인식되지 못하므로 히브리서 기록자(여러 가지 정황으로 바울 사도로 인정되는)가 "듣기에 둔하다", "어렵다", 어린 아이", "장성한 자가 아니다" 등 우회적인 표현으로만 일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신학으로써 사탄 역시 필사적으로 막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껏 그루빔(cherubim, 그룹의 복수형) 중 하나로 속여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본 자로 인식시켜 왔는데, 왕년에 아담의 보좌역(천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자기 위상에 치명타가 된다는 판단에서 그러했던 것. 그러나 거짓말로 온통 속여 온 사탄의 새력을 한 판 싸움에 실력으로 꺾어버리고 "천사의 복음"을 확립한 천사들 앞에서는 모든 것이 여지 없이 폭로되는 오늘날 순간입니다.

인간 수명이 지금처럼 단축된 시점은 노아 대홍수 이후입니다. 홍수 이전에는 아담(930세), 므두셀라(969세), 노아(950세) 등 다 8,9백 년 수명이었지만 홍수 사건을 기점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노아의 아들 셈이 600세로 죽자 그 후손들의 수명 역시 점차 줄어들어 아브라함은 175세까지만 생존했습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지만, 이 시기 일반적 평균 수명은 7,80세 정도였습니다(시 90:10)

인간 수명이 아담 때는 천년 가까이었다가 세월이 갈수록 자연적으로 짧아져 오늘처럼 된 것이 아니니, 애초 천년 가까운 수명이 하나님 정하신 것이면 즉 하나님의 뜻이면 세월이 오래 되었다고 변동이 생기는 일이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은 인간(아담)을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즉 신령한 몸으로 만드셨는데 아담의 범죄로 "죽은 자"(마 8:22) 곧 현재의 동물성 육체로 전락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신령한 몸의 기력이 결딴나버리면서 그 막강했던 기운이 세월 따라 서서히 소멸되어 가는 과정의 자취였던 것입니다. "그래 그게 무엇이 중요하다는 것이냐! 어쨌거나 구원만 받았으면 된 것 아니냐!" 혹자는 그렇게 말하겠지만, 이것이 바로 "바벨론 신학"과 "천사의 복음" 그 차이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곧바로 생사 문제인 바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바벨론 신학(사탄의 거짓말)을 죽음이라 하는 것은, "믿기만 하면 영생 구원"이라고 뭉뚱그려 밑도 끝도 없이 얼렁뚱땅 얼버무림에 있습니다. 이는 아주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생명은 이와 아주 판이합니다. 아담의 "범죄와 죽음으로 인해" 구원이 불가결하게 되었은즉 "<죄를 회개하고 다시는 범죄하지 말아야> 영생으로 복귀되는데 지금 당장 "죽은 자"이므로 가장 먼저 "산 자"부터 되는 것이 시급하고 이에는 새로 창조됨이 필연이라 따라서 이 하나님의 선물을 은혜로써 믿고 받기만 하면 되는데, 이렇게 산 자로 회복된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아담의 범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다는 자유의지의 결단) 그 "뜻을 행하기"(마 7:21) 시작함이 필수"요 이것으로 구원이 보장된다"는 바로 이런 인식 차이가 핵심이고 여기서 정작 생사가 가름된다는 점입니다.

죽음의 바벨론 신학에서는, 믿어 일단 새 창조만 되면 그것을 끝이요 완성이라고 단정해버리므로 이것이 속임수요 멸망의 함정인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을 덮어버리니 죽음의 <결과>는 백날 가야 봉합되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되풀이만 될 것뿐입니다. 전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모든 인간을 거짓말로 꾀어 멸망의 함정으로 내어모는 사탄의 책략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영원히 사는 존재로 처음부터 창조되지 않고 우리처럼 한낱 덧없는(더덥는ㅡ발음에 주의, "너무 순간적이어서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무상/無常 인생으로 만들어졌다면 결단코 멜기세덱으로 변신하여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마음에 새깁시다.

영원 불변의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3)라는 말이 생겨날 수가 없음을 상기/想起합시다.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2) 라고 하며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4)면서 감히 일개 인간, 한 <사람>임을 명시하면서까지!

그리고 또한 명심합시다. 자연계 동산인데 사람이 먹으면 영생하게 되는 신령한 나무가 존재함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나요! 하나님 말씀 그것도 첫머리 창세기에!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그러면 그 한 마디 거짓말은 이후 모든 기록이 되어 나오는 것도 다 거짓말이라는 <선언>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니 거짓이 아니라면 진실일 수밖에 없고, 진실이니까 만유의 기본 원리가 짝의 법칙으로서의 3위1체일 수밖에 없고, 이 <상반/相反은 상보/
補>에 따라 자연계 물질과 더불어 영체/靈體인 초자연계로서 에덴이라는 "하나님의 동산"("하나님의 동산 에덴"ㅡ에스겔 28:13/31:9)이 이미 창조되어 있었고 그 에덴 동편에 또 아담을 위해 한 "동산을 창설"(창 2:8)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산 에덴"이라는 표현이 연달아 두 번 중복되어 강조됩니다. 이런 에덴의 특성상 아담이 신령한 몸이 아니고는 거기가 아담의 보금자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는 것은 처음의 자연계 동물성 육체("6일" 째에 동물 창조를 마치시고 맨나중에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은즉)가 에덴의 신령한 속성으로 즉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음을 의미함입니다. 하나님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에 의해 한 번 결정하심은 영원불변이라 아담은 영생하는 자로 정착되었던 것입니다


2025년 12월 4일 목요일

멜기세덱-老子신학 또는 멜기세덱신학론/論

멜기세덱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성경이 유일하게 "거짓말 같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신화 같은" 언급 속에 나오는 인물인데 성경에 그런 신화/神話가 있을 수 없으니 유일하게 신비한 존재라 하겠고, 인간 중에 유일성을 띄는 사람은 오직 아담이니 히브리서의 표현대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 한 그대로입니다.


참으로 유일무이하게 
6천 살을 먹은(6,000세/) 오직 한 사람의 생존 인물인데 이 멜기세덱이 노자/老子로 변신하여 다시 그 역사적 역할을 해냈다는 것이 절대로 이상히 여길 횡설수설은 아니니, "영적 죽음"이란 황당한 거짓말에 대척하여 "천사의 복음"을 전하는 오늘날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훌륭한 근거로 삼읍시다. 그래서 "영적 죽음"이란 황당한 거짓말을 쳐부수는 무기/武器로서 이 노자가 멜기세덱이라는 <사실>을 적극 활용하여 주의를 환기시킵시다. 그래서 21세기 천사의 복음 전파의 역군/役軍으로 맹활약합시다!

이는 모든 면에서 아주 이상적인 활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 전파가 계시에 속하지 신학일 수 없고 "신학"은 바벨론 신학의 잔재/殘滓일 뿐이나, 이 경우에서만큼은 예외로 "멜기세덱신학" 또는 독창적인 "한국 신학"(K-theology)으로 세계 만방에 고하여 활용합시다! 마지막 때이니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영혼들을 깨우치고 구원해 내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할 때이니까!

누구시든 앞장 서서 공론화시키세요.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필자에게 연락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니까 누구든지 주인입니다. 주체의식을 가지고 뛰어듭시다.  

2025년 12월 3일 수요일

춭바벨론기 (2)

21세기 "천사의 복음"(계 14:6)의 하늘 표징으로서 2,500년 전 천사가 다니엘 예언자에게 미리 예고해 준 바로서의 "한 때와 두 때, 반 때"(단 7:25/12:7)라는 기기묘묘한 수수께끼는 5백년이 지난 후의 요한 계시록(같은 21세기를 지목한)에 의해서 또한 재차 확인 절차를 마쳐(계 12:14) 드디어 오늘날 21세기에 때 맞추어 세상에 드러났으니 주님 재림을 코 앞에 둔 바로 이 시대 지금까지의 2천년 해묵은 "바벨론 신학"을 드러내어 그 거짓됨을 파헤치고 있는 이 시점입니다.


고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고 하시는 엄중 경고와 함께 전달되는 종전과는 딴판의 성경 풀이에 일절 동요 없이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재삼재사 강조합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의 천사의 표징과 똑같은 내용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그 진실성이 자체 증명되고 있음입니다.

이는 교회사상 처음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요 성령으로 이미 각 사도들로 말미암아 전파된 것이었고 교회가 이로써 육성되어 나갔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따르기를"(갈 1:6) 되풀이하던 끝에 완전히 이질화가 되어버린 탓으로 이렇듯 오늘날 "천사의 복음"이 대두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자연 물질계로 국한된 것일 수 없고 짝의 법칙 따라 대칭성을 이루는 완벽한 작품인데 반해 사탄의 옛 에덴 동산에서의 수법 따라 거짓말을 농/하여 에덴·아담을 자연계 물질로만 한정시켜 창조하신 것으로 "온 천하를 속인"(계 12:9) 것입니다. 그 간악한 거짓말의 한 가지 두드러진 예입니다. "영적 죽음"이라든가, "우리를 <대신하신> 죽음"이라든가 등등의 파멸에 이르는 끔찍한 거짓말들입니다. 우리 각자 진실된 복음 전도인이 되십시다. 이 모든 거짓의 미혹으로주터 헤어나오도록 기도의 제사장직 수행에 앞장 섭시다.        (계속)



성경은 처음부터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의 구원 즉 새 창조도 같은 원리를 따라 완성하심을 아래 말씀으로써 달려가는 자라도 충분히 알아보도록 밝혀 두신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성령)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다"(이사야 34:16).

천사의 복음ㅡ우리 각자가 써 내려 가는 "출/出바벨론기/記" (1)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인가"(요 6:30) 하고, 믿을 수 있는 특별한 "표적과 기사"(4:48)를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요구한 것처럼 지금까지 사탄의 거짓말인 바벨론 신학을 아무 의심 없이 태평스럽게 믿어 오다가 "그 모두 거짓말이다" 하고 "천사가 가진 복음"이 등장하니 모두 황당함을 느낌은 당연합니다.

천사의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징 즉 "표적과 기사"는 천사가 정확히 이 21세기 "마지막 때"를 겨냥하여 다니엘에게 미리 고지/告知해 준 3위1체의 도식/圖式을 문자화/文字한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로써 명확히 드러났고 같은 성격(21세기 예언)의 요한 계시록의 "한 때, 두 때, 반 때"(계 12:14)로 재차 강조되어 확인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한 이유를 말하면, 이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신비한 문구가 이 21세기 오늘 이전까지는 무엇을 상징함인지 무엇을 가리킴인지 아무도 제대로 알고 설명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 예언이라는 것은 그 속성상 예언이 성취된 다음에야 비로소 소상히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시점입니다. 3운법칙과 동시에 3위1체가 알려지면서입니다.

아인슈타인도 오늘날의 여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둘>의 <하나>됨 즉 "3위1체의 제3위"에 친숙하지 못했던 관계로, 비교적 이 점을 각종 실험으로 대략적으로나마 간파하고 있었던 보어의 결론에 쉽게 동조하지 못하였기에 필자는 "틀렸다" 한 것이고, 그러나 보어도 "몰랐다"고 한 것은 짝의 법칙의 최초 발견자로서의 위업은 달성해 그 공은 가상하지만 이로써 창조주의 실존을 영적으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했기에 이를 지적함인 것입니다.

고로 "아인슈타인은 몰랐고 보어는 몰랐네"를 <천사의 3위1체 복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제/表題어처럼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역시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보어가 자신을 상징하는 가문/家門 휘장에 태극도/太極圖(주역의 태극 문양)와 라틴어로 "상반/相反(짝 곧 대칭을 이룸)"은 "상보/補" 즉 "대립적인 것은 상호 보완적"이라는 라틴어 문구(아래 그림)를 직접 도안해서 새겨 넣었다는 사실은, 어느 과학적 서술의 수식/數式에도 뒤지지 않는 위대성과 당당함을 영원성/永遠性으로 구비한 기념비적 금자탑/金字塔으로 후대/後代, 만대/萬代에 세워 준 쾌거/快擧라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만한 불후/不朽역사적 가치로 보기에 아낌 없는 상찬/賞讚을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리시면서까지 오늘날 "마지막 때"의 우리들에게 "3위1체"라는 만유의 최고 기본 원리를 가르치신다고 했지만(그렇게 하심으로써 "바벨론 신학"[계 18:4]의 거짓됨을 훼파하시고 "천사의 복음"[14:6]을 드러내심), 오늘날 닐스 보어의 특이한 가문 휘장도 그런 일환(영원한 진리를 <도안>이라는 "그림"으로 설명하는)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교황'이라 불리기도 했던 보어만이 주역을 공부한 것은 아니고, 알버트 아인슈타인, 칼 융,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치, 존슨 얀, 헤르만 헤세, 요한 괴테, 옥타비오 파스 등 각 분야의 서양 지식인들도 관심을 가졌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동양인인 우리도 철학관이나 점집 등을 연상시키는 기호에 불과해 보이고 한없이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주역"이란 것이, 쉽게 이해될 리 만무합니다.

우리처럼 단순히 음양론(더욱 정확히 말하면 노자의 도덕경 42장 25언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삼생만물],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로서 대표되는)에만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보어는 이같은 상징을 통해 자신의 필생의 업적으로 중요시했었던 양자역학의 상보성 원리가 음양론 즉 노자의 "三生萬物/삼생만물"과 유관함을 확실하게 증명한 것입니다.

81장에 걸치는 노자  도덕경의 핵심 사상으로 언급되는 것이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이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는 삶"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노자'라는 인물을 '멜기세덱'적 관점에서 고찰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정하신(창조하신) 대로만 따르고 거기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 생명(영생)>이라는 유일한 결론에 금방 이를 수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비극도 그렇고, 우리 주님 예수(히브리어로 "구원자"의 뜻) 메시야로 말미암는 21세기 현재까지의 "새 창조"도 이에서 벗어남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말씀, 그 뜻대로만 따르면 일체의 잡다한 인생 문제가 일거에 해소된다는 사자후/獅子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3위1체' 시대 이 21세기의 "전도서"(Ecclesiastes)라고 노아 도덕경을 명명해도 무방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일체의 인위적 작용(유위/有爲) 즉 범죄·자아중심을 떨쳐 버리고(무위/無爲), "자연/自然"(상대방중심·하나님중심) 곧 창조주 하나님과 그 말씀 곧 계명 지키기("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이다"ㅡ요 14:23)로 되돌아가 그 "뜻대로만 하면"(마 7:21) 그야말로 만사 형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게 되면, "자연무위"란 말은 어폐가 있을 수밖에 없는 공허한 메아리만 되기 때문. 왜냐, 생긴 그대로 가만 두고 그냥 지낸다 해봅시다. "문명의 발달"은 기약할 수조차 없게 되지 않나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머리를 굴려 "유위"에 "유위"를 거듭했기에 오늘날의 과학시대를 마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노자의 "무위자연"을 하나님의 창조와 결부시켜 일체의 인위적인 헛됨과 연결시키지 않고는 말 자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용(사탄·마귀)은 부질없이 아담을 했던가요? 하나님이 "6일" 창조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로 아담을 세우신 것은 용/을 비롯한 모든 창조물을 위하심 곧 그들에게 덕을 끼치기 위함 곧 하나님의 사랑의 <최선>이셨던 것입니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주신 것을 왜 <최악>처럼 여겨 듣지를 않고 그 반대로 행하는 "有爲"를 범하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 정하신 대로 시키시는 대로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롬 8:28)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쓸 데 없는 짓을 해요? 모든 죄악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자아중심의 더럽고 구차한 "욕심"("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인 것입니다.

무신론도 그렇고, 불교나 이슬람교 등 세상 종교도, 인간의 각종 범죄 행위도(창조주 하나님의 붊문율인 양심을 어겨 가면서도 저지르니까) 모두 <인위적인> 것,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마치 각자 자기가 하나님인 양 우겨대는 "유위/有爲"가 빚어내는 해독이요 자초하는 비극입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계인들이여,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3운법칙 등으로써 완벽하게 자기를 증거하셨다!"가 21세기 "천사의 복음"의 서두/序頭입니다. "천사의 복음"을 알리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 땅, 바다,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였다"(계 14:7)고 함과 같습니다.

왜냐 하면 악령이든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이든 3운법칙이나 3위1체와 같은 "표적과 기사"는 일절 나타낼 재간이 없기에 그러합니다. 홀로 창조주께서만이 나타내실 수 있는 유일무이의 "표적과 기사"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대로 "큰 이적을 행하여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할망정"(계 13:13) 이 21세기 표적과 기사와 같은 내용은 유일무이한지라 되풀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애를 낱낱이 "3위1체"를 따라 세 갈래로만 구분하여 빈 듬 없이 갈라낼 수 있나요. 그리고 그렇게 철통같이 나타나도록 정하신 <그 때>와 <그 이유>가 성경상으로 입증되어 드러나도록 할 수 있나요. 그 어느 천재일지라도 또는 아무리 초능력을 동원하더라도 그렇게는 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3운범칙의 기본 틀 즉 3위1체의 도식/圖式이 이미 2,500년 전 다니엘 선지자(예언자)에게 천사로 말미암아 "한 때, 두 때, 반 때"로 예고된 것이었고, 다른 예언서 요한의 계시록으로도 재차 확인된 것입니다. 이 2천5백년 전의 시점/時點 역시 도덕경의 노자가 등장했던 바로 그 무렵입니다. 이와 같이 역시 21세기에 등장하게 되어 있는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과 3운법칙은 모든 것이 정확히 맞물려 있어 그 중량감을 더해 줍니다. 이런 것을 그 누가 모방하겠나요.

앞으로 적그리스도가 나타낼 아무리 기상천외의 초자연계적 기적이라도(성경은 사탄이 "거짓 기적"도 섞어 속인다고 했으니까ㅡ살후 2:9) 이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적의 유형이 다르고 질적으로도 차이가 있어서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이 행하는 것은 초자연계 신령한 몸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초능력 수준에 불과합니다. 현재의 인간이 워낙 <초라한 동물성 육체>이기 에 이런 초능력에 한 때나마 기절초풍 넋을 잃고 허둥댈 뿐입니다.

"무위자연"을 다시 강조합니다. 왜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고 잘난 것처럼 마치 하나님도 없어 스스로가 하나님인 것처럼 자기 판단으로 일을 저지름으로써 자멸/自滅의 길을 택하느냐 말입니다. 괜한 엉뚱한 교만이 들어 그런 것입니다. 속말로, 죽으려고 "환장해서" 그런 것인갸요.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하셨으면 그 "원수 사랑"이 내게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해요? 그래서 성경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잠 4:23)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요일 5:3)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거짓말하신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원수 사랑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고,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강조하셨듯이 모든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모든 용서하심도 일체 무효가 됩니다("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ㅡ마 6:12). 이 주님의 가르치신 기도를 <매일> 올리는 이유입니다. 용서 않고 원수 갚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이 기도에서 확인되듯 내 죄는 용서가 안되고 나의 구원도 유야무야 허공에 흩어져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한 까닭입니다.

아담 범죄로 "죄의 몸"이 되어 있는 인생들입니다. 가인이 첫 살인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벌하시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의 원하는 것까지 들어 주시고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신"(창 4:15) 것입니다. 과부 사정 과부가 알고 홀애비는 홀애비가 안다 하듯 똑같이 "죄의 몸"(롬 6:6)으로 태어난 터에 나와 똑같이 새 창조로 새 사람 되기까지 기다려 줄 마음도 없는가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이러하신대 우리가 무엇인데 심판하고 벌 주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단 말인가요.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신다"(롬 12:19). 원수 갚겠다 는 생각은 자아중심이요 자아중심으로써 영광의 몸으로 되돌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 18:33) 하시는 선고와 함께 영생 구원에서 영원 낙오자가 됩니다. 바벨론 신학은 이런 모든 하나님의 엄정한 뜻을 묵살해버린 것이니, 소위 "행함으로 얻는 구원" 등의 핑계를 달아 주어 아담처럼 죄에 빠지게 하여 영생 구원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막아 온 것입니다. "은혜의 믿음으로 구원 받았노라",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자기 기만의 핑계로 헛되이 천국 소망을 가지며 무수한 사람이 멸망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약하다" 타령에 빠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세상 살라"는 말이 없어요. 외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는 말씀뿐입니다. 이유는 명백하니 이 "죽은 자"("죽은 자들로 저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ㅡ마 8:22)의 세상에서는 죽음뿐이지 생명이 있음으로써 사는 데가 아닌 것입니다.

<애초 신령한 몸으로 살다가 범죄 탓에 "죽은 자"로 전락해 이런 인간고에 휘말리는 동물적 육체가 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천사의 복음"과, "바벨론 신학"("처음부터 이런 걸레같은 허접스러운 육체로 창조된 인간이니까 하나님의 예정하심 따라 믿음으로 구원 받아 어쨌든 재주껏 구불텅거리며 살다가 영생에 들어가면 그만이다")과의 현저한 차이를 분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 생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고 했으면 벌써부터 알아채고 대비했어야 할 일입니다. 대비커녕 무식무지의 난장판이었음이 2천년 기독교회사로 드러난 바벨론 신학인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소스라쳐 깨어날 때입니다. 동물성 육체의 한없는 고달픔에다 왜 사탄의 거짓말의 멍에까지 짊어지고 야단입니까.

이런 엉뚱한 거짓말의 합리화를 위해 "바벨론"은 에덴도 자연계 동산이라, 로마서 7장은 구원된 바울의 개인 채험이라, 한 번 일단 구원 받아 놓으면 영원 불변으로 보장되는 것이라는 따위 논리에도 어긋나는 갖가지 거짓말을 덕지덕지 겹겹으로 덧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어쭙잖게 세상 <학문>("신학")으로 둔갑시켜 그럴듯하게 꾸며 놓은 마귀 일당의 요란한 난장판의 가설무대인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이는 주님의 말씀에 반신반의하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천사의 복음" 역시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2천년 전통의 바벨론 신학의 역사가 스가랴 예언처럼 "태산/泰山"으로 군림해 있기에 그러합니다.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ㅡ오늘날 "천사의 복음"에서는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인하여"로써 대체됩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아직 주님 다시 오시기 전이므로)의 <일>이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천사의 여러 기적(홍해가 갈라지는 등)은 악령들도 할 수 있을 뿐더러 거짓된 속임수까지 가세되므로 더욱 엄청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21세기 표적과 기사만큼은 사탄이 모방할 수 없음을 앞에서 강조했습니다. 단순한 신령한 몸으로서의 초능력과는 완전 별도의 영역이기에. 이러한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힘입어 "천사의 복음"에 착념합시다.

다시금 정리하면, 초대교회 그것도 사도 바울 당시였건만 사람들은 "신속히" 진리의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따름을 바울 자신도 "이상하게 여겨"(갈 1:6) 기괴하기 짝이 없다고 판단했는데, 하물며 2천년 세월을 훌쩍 넘긴 오늘이겠나요. 사탄이 지배 통치하는 세상임을 증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악령들의 지배와 선동이 아니고는 그렇게 "신속히" 바울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까지 바울의 가르침에서 떠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게 됨을 계기로 모든 진실 진리가 바로 드러나게 되려면 그동안 지구인들을 속여 지배해 왔던 세력을 강제로 꺾어야 하겠기에 이 "마지막 때" 영/들간의 대판 싸움이 불가피함을 "마지막 때"를 총정리하는 예언서 요한 계시록에 이미 예고되었던 것입니다(계 12:7-9). 미가엘 천사 군단과 사탄 일당의 대접전입니다.

그 결과로 빛을 보게 된 것이 의당히 "천사의 복음"일 수밖에 없고, 이 천사의 복음으로 인하여 사탄의 그간 자행되어 왔던 갖가지 거짓말이  드러나져 성경의 잘못 이해되어 오던 여러 부분이 바로잡아지게 됨은 필연입니다. 일례로, 지금까지 천사와 그룹/스랍 등을 혼동하여 동일시해 온 것인대 엄연한 별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스랍/그룹은 하나님이 친히 부리시는 영들(하나님이 "그룹을 타고 날으심"ㅡ삼하 22:11/시 18:10)입니다.

반면 천사들로 말하면은 "구원 얻을 (하나님의) 상속자("후사/後嗣)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히 1:14)이라 헸으니 아담에게 도우미(helper) 역할을 하도록 에덴 동산에서 창조되었던 영물들인 것입니다("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ㅡ창 2:15-19). 이미 "5일"째 되는 날 모든 동물의 창조를 마치셨는데 또 창조를 하신다는 것은 어불성설. 따라서 그런 동물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역시 더욱 언어도단.

계시록에 "4생물", "24장로"란 말이 나옵니다(계 5:8/19:4). 또한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어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11) 했으니 미가엘 등 천사들은 생물과 장로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네 생물이 날개가 여섯이라(이사야 6:2/계 4:8) 했고 24장로가 4생물과 동급으로 이 부분의 계시록에 서술되어 있은즉 "장로"는 그룹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그룹(cherub) 하나가 있어(겔 28:14-16) 이 총중에서는 제외됨으로써 지금은 무저갱에 들어가 아바돈 또는 아볼루온(계 9:11)이라는 이름으로 격리된 상태에 놓인 자인데, 24장로가 그룹들이라면 그럼 타락 이전에는 25그룹(장로)이었던가, 25(홀수)와 24(짝수, "4생물"과 맞대응되는 것같은)의 숫자가 좀 어색해 보이는 듯하나 현재로는 더 자세한 무엇을 알고자 함은 불필요한 것. 성경이 설명하지 않는 것은 그냥 간과함이 좋습니다.    
      (계속)




"하나님을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호세아 6:3)

"주 예수 그리스도("3위1체"에서의 제2위)의 은혜와, 하나님("성부 하나님"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 제1위)의 사랑과, 성령

(닐스 보어의 "상보/補"[상보성 원리]에 해당하시니 제3위)의 교통(친교·교제·교감/commumion)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으시기를"(고후 13:13ㅡ개역한글).

당시 성령 충만 중에 베드로가 성령 강림하심을 설명하여, "다윗이 그를 가리켜 말하기를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심이다'"(행 2:25) 한 것처럼 "성령의 교통하심"은 나 위해 죽음을 맛보시고 부활하신 주님 친히 "항상 내 앞에 계심을 뵙는" 것이니 시편 139편 또한 이 너무나 복된 사실을 가리킴입니다.

"항상 내 앞에 계심"은, 다시 말해 "주님께서 저의 전후를 두르시며(안으시며) 제게 안수/按手(제 머리를 쓰다듬으심)하셨습니다. 이 지식이 제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제가 능히 미치지 못합니다"(139:5, 6)의 대목이 대표적으로 이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게 그 어떤 인간 관계보다 더 가까우신 사실을 우리는 명념할 일입니다. <보이시지 않는다>는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보이는> 사람보다 소원한 감을 느낀다지만ㅡ.

메시야 우리 주님을 가리켜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사야 9:6)시라 함과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성부 하나님을 가리킴이 아니요 성자 하나님을 지칭함인즉, 나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6) 곧 창조주이신 까닭입니다. 현재로는(천국에서는 천사들처럼 되어 성별이 없으나ㅡ눅 20:34,35) 사람은 남자 아니면 여자인지라 부모도 그러한즉 어버이이신 하나님을 표현할 때 대표적으로 "아버지"(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었던 그 위계 질서를 따라)시라 하는 것이니 오해함이 없기를.

나 위해 죽으시도록까지 나를 사랑하신 주님 친히 나에게만 와 계시는 모습이 <성령으로 오심>입니다. 사람은 육체라 오직 한 사람과만 상대 가능하니까.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성령)가 너희에게로 오시지(존칭어를 쓰심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어 오심이므로 즉 일면으로 아버지 친히 오심이 되기에)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또 다른 일면으로는, 주님의 영 곧 주님 자신이시기에) 것이니"(요 16:7).

<사람>으로서는 오로지 한 사람을 상대로 내게만 와 계시나, 성령으로 즉 <하나님>으로 오심인즉 모든 믿는 사람에게 똑같이 그렇게 그 사람에게만 와 계심입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유익"이라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와 계시는데 그 중에 나도 포함된다"와, "문자 그대로 나에게만 와 계신다"는 것과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2025년 11월 29일 토요일

나는 죽었고 내 생명 감춰져 있으니 굳이 <찾으려> 말 것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주님의 것이 내 것이 되어 돌아오는 철칙

 


부자는 스스로를 없는 자 되게 해야 천국 들어가


 

21세기 "천사의 복음"의 핵심은 "3위1체"에 있어


글을 올리기 전에, 전에 한 번 얘기를 했지만, 필자의 한자 사용은 습관이 되어서가 아니고 한자의 유사 발음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한글 전용의 우리나라 학생이 일본, 중국 등의 학생보다 문장 독해력(이해도)이 상당히 뒤쳐진다는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에서 일단 손실입니다. 글 쓰는 사람 처지에서도 보통으로 느끼는 당혹감이 아닙니다. 그래서 문장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부득불 쓰고 또 그렇게 쓰다보니 어떤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고 싶을 때 내친 김에 또 쓰기도 합니다. 양해해 주시기를.

오늘날 전도는 성경도 허나님도 모르는 이들을 상대함과 더불어, 믿는다면서도 자기 몸이 성령의 성전이 되어 있지 않아 뜬 구름만 잡듯 하는 <이름만의 "기독교인">들 대상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의 바벨론 신학과 달리 모든 점에서 면모를 쇄신한 "천사의 복음"들 전해야 하기 때입니다. 이 21세기 천사의 복음은 강력한 "21세기 표적과 기사"가 그 배경임을 알리면 말씀을 듣는 자에게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만유의 기본 원리로서의 3위1체 바로 그 도식을 천사가 오늘날을 직접 예고/豫告하며 다니엘에게 2,500년 전 알렸던 것이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이기에, 이는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역사적 중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 역시 21세기 지향/志向 예언서답게 이 기이한 <문자화/文字된 도식>을 성령의 감동으로 역시 함께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계 1214).

"이는 힘으로 되지 않으며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성령)으로 된다"(스가랴 4:6) 하신 첫머리 말씀대로 성령께서 이 대목의 주제/主題이십니다. 지금까지 "3위1체"라는 말은 많았으나 정작 그 뜻이 어떻게 되는지 몰랐으니, "바벨론 신학"에 철저히 가려졌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셋이 되실 리는 만무하다고 해서 그냥 <3면(세 모습을 지니신)의 한 분 하나님> 정도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어렵기만 하다"는 사탄의 부추김에 장단만 맞추는 꼴이 되는 슬픈 현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 그대로의 뜻일 뿐입니다. 장차 닥쳐야 실감할 수 있는 예언적 성격의 말씀을 제외하고는.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낳으셨다"고 성경에 명시된 그대로 하나님은 모자(부모 자식) 관계로 존재하십니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요 14:28) 하신 대로입니다. 단, 둘로서 계시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하나"(10:30)로서 계시기 때문에 이 이치를 만유 창조와 운영의 기본 원리로 삼으신 관계로, 마귀는 이 핵심 진리를 여러 거짓말로 감추려 했던 것입니다.

상보성 원리에서 닐스 보어(1885-1962)가 갈파함으로써 상반/相反은 상보/(CONTRARIA SUNT COMPLEMENTA)라는 유명 문구에서 드러나듯 인과율/因果律이 입증되어(파생자와 피/파생자의 관계) 이 특이한 3위1체의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까지 약방의 감초처럼 마귀가 써먹어 왔던 무신론, 회의주의 등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는 까닭입니다. 최고 원인으로서의 창조주가 입증되시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인과율 붕괴 가능성"을 말하는 이들은 예컨대 양자역학에서 매우 미시적 영역에서는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사성 원자의 붕괴는 <예측 불가능한> 확률적 현상으로 나타나 인과율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보인다고들 합니다. 또 특수상대성 이론에서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은 인과율을 위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특정 사건에서 <인과관계의 뒤바뀜>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두 경우 다 "상반'이 되어 있는 둘이 "상보'가 됨 더 정확히 간단히 말해 짝을 이룬 둘이 <둘>로서가 아닌 <하나>(요 10:30)로서 존재함 즉 "3위1체"의 근본 이치를 외면함에서 오는 혼돈일 뿐입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다룸도 아니고 "특정 상황에서의 다른 원리가 적용됨"도 아닌 것입니다. 

21세기 "천사의 복음"이라는 천사들의 획기적 거사/와 용단/勇斷에 의해(하늘 전쟁에서의 승리로 악령들을 제압하여 더 이상 거짓말로 인간 세상을 농락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ㅡ계 12:7-9) 모든 막혔던 물꼬가 트이게 된 오늘입니다. (진리가 드러났다뿐이지 사탄의 거짓말이 이제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님).

사탄이 이렇게 세상을 장악하게 된 것은, 아담 스스로 불러들인 화근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따르기보다 사탄의 거짓말에 더 복종해 그를 경배한 꼴이 되어, 연약해 빠진 동물성 육체가 됨으로써 막강한 신령한 몸을 박탈 당하자 벌어진 (종전까지의) 위계질서의 비극적 전복/顚覆 내지 도치/倒置 결과인 것입니다.

즉 아담 아래 있던 영물들이 일부 하극상을 함으로써 아담을 시해/弑害한(아담이 사탄의 거짓말대로 따른 결과 죽은 자 곧 동물적 육체로 돌변하여 종전의 신령한 몸을 상실했으므로)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사탄 및 그 아래 악령들의 인간 세상 지배는 <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이기도 하여 요지부동이었는데, "마지막 때"를 당해 "마지막 아담"의 등장을 계기로 비로소 천사 군단이 행동할 여유가 생긴 까닭에, 그나마도 힘 겨루기를 통해 이겨야만 가능한 까다로움을 천사들은 극복한 것이니, 이것이 21세기 "천사의 복음"(계 14:6)의 시동/始動입니다.

이런 사실 즉 사탄의 이 세상 지배를 모르니까 바벨론 신학의 정체를 알 리가 없고, "하나님 창조하신 세상에서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 말씀에 거짓말 같은 것으로 손대랴" 하며 사탄이 대놓고 세뇌시키는 대로 허무하게 맹종했던 것이 오늘날과 같은 파탄을 낳은 것입니다. 이제는 시급히 깨어날 때입니다.

사탄이 나꿔챈 통치권은 하나님의 이 세상 지배가 아닌 세상 모든 피조물의 수장/首長/으로 세우신 아담의 인간 세상 지배권("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ㅡ창 1:26)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탄의 왕국이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현세의 삶)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요일 2:15).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요 12:25)이라고 엄중 경고하신 이유입니다. 소위 "기복 신앙" 즉 하나님 축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은 멸망의 확실한 지름길 외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 주 예수님께,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이니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인즉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는 고로 당신이 내게 절하면(나의 자아중심을 따르면) 다 당신 것이 될 것"(눅 4:5-7)이라 했던 근거이기도 합니다. "나의 이 뜻을 거스르는 그 누구든 이 세상에서 결단코 볕 볼 날이 없을 뿐더러 그 정반대인 고통 고난뿐임을 각오해 두라"는 당당한 위협인("마지막 아담"에게 소속되어 있는 그 누구를 향해서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축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산다"는 헛된 꿈이니 이것이 바로 "미친 마음"(전도서 9:3)인 것입니다. 구약(유치원생 수준의 예비교육)과 신약(성인으로서의 실생활)도 구분 못하는 무지 속에 갇혀 있음은 성경을 읽지 않은 탓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축복, 운운" 한다고 해서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헛소리'를 하게 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共用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행 4:32) 초대교회의 본보기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도 관심도 없다는 증거입니다.

"도둑질했던("도둑질하는"은 오역ㅡ개역한글)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했는데 가난 구제는 국가도 못당한다는 말도 있듯이 베풀다보면 나 자신 (이 세상에서) 호의호식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는"(히 13:3) 것이 마땅한 세상인즉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그렇게 나의 안위만 생각할 마음이 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아중심이기에 그렇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믿는 자의 공동체인 교회 내에서의 부자와 거지 행색의 여타 사람들을 빗대어 말씀하심입니다.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하셨으니까. 부자의 죄는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다"는 오직 그것입니다. 죄명은 이 세상에서 "위로를 이미 받아버렸다"(눅 6:24ㅡ"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는 것. 부유하게 교회당을 번듯하게 세워 올리고 최고급 자가용을 자랑스럽게 굴리고 다니는 소위 "교역자"들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뒤쫓고 있으니 한시바삐 깨어나세요!

미국의 오랄 로버츠라는 한 이름 날리던 소위 "신유 부흥사"는 생전에 곧잘 하던 소리가, "나는 하나님의 축복 받은 증거로 일부러 자가용을 여러 대 구입하여 번갈아 타고 다닌다"였습니다. 당시는 미국만 해도 자가용은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냈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물성 육체로서의 만 가지 고초(인간고)에서 해방되는 것이 천국 곧 "신령한 몸"(고전 15:44)이자 "영광의 몸"(빌 3:21)으로의 복귀/復歸/입니다. 이것이 구원 받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않고 자아중심으로 자기 생각대로 했기 때문에 아담이 영생을 잃고 현재와 같은 동물성 육체가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구원 받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ㅡ마 7:21)에 있음을 확증적으로 단정하게 됩니다.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이 아니니, 믿음으로서의 "은혜", "선물"은 우리가 아담 범죄로 모두 죽은 자가 되어버렸은즉 새 창조를 받아 산 자부터 되고보는 것이 급선무라 그렇습니다. 창조는 다 <선물>이지 그렇지 않음이 없는 것.
새 피조물로 거듭 난 다음의 단계가 필수이자 필연이니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 즉 순종 다시 말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은 무조건 "믿음" 일변도로만 끝낼 뿐인 사탄의 속임수인 것입니다.

아무리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 거듭 나고 새 피조물이 되었다 치더라도 상대방중심/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아중심이면 그 나물에 그 밥, 그것이 또 그것이기에,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아예 임하시지를 않습니다. "성령으로 날"(요 3:5,6) 수가 없으니, 한 마디로 불가능입니다. 이 자기 기만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음을 "확신한다"지만 허공에 떠 사라지는 메아리 같은 허무로 끝나고 있으니, 다시 자기를 살펴 여의치 못하면 새로 확실히 시작하여 출발하시기를! 

이 시점 화급한 자아진단 (2)

"점진적인 창조" 또는 "진화"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는 한 번만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창조는 항구적입니다. 영원히 존속 못할 것이면 아예 처음부터 창조하시려는 마음부터 품지 않으셨을 것이니까. 단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