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9일 월요일

단순히 생각하고 쉽게 설명하도록 되어야 (2)

단순하게 생각하고 쉽게 설명해야 하는 것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것이 있으니, 그것은 "상대방중심으로 살기"로 모든 사람이 서로 약속하는 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대신에 모두가 나를 위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은 이상주의 실천은 없는 것입니다. 소위 공산주의가 이상주의인 것만은 사실이나 이렇개 단순히 생각하여 쉽게 설명할 줄을 몰랐기에 "20세기 최대 악마의 화신"으로 전락하는 환멸의 비애를 맛보는 불행을 겪은 것이니 이는 누구나 시인하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솔선 수범의 상대방중심으로 나가는 약속 운동을 하는 대신, 미련하게도 강요, 강제하는 것으로 시종일관하다보니 "이보다 더한 악마 짓을 일찍이 구경한 적이 없다"라는 소리만 듣게 된 것입니다. 쉽게 설명해서 사람마다 성자, 성인이 되자는 약속을 이행하는 솔선수범입니다. 이것은 공허한 헛구호가 아닙니다. 파급력이 확실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창조주 하나님이 정해 주신 "양심"이라는 불문율이 새겨져 있기에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해 이 "약속 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으로서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는 절대불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은 오늘날 3위1체와 3운법칙으로 충분히 입증되기에 서두에서부터 소개한 것입니다.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 정풍 내지 정화운동이라 해도 좋으나 대국적으로 보면 전도 활동입니다. 오늘 죽울지 모르는 인생인데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을 확신하니까. 선한 행실을 앞세우는 건전한 전도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무턱대고 영생 구원을 말함이 아니라 3위1체에 의한 생명의 법칙 소개 또는 구체적인 삶의 방향(자아 지향이 아닌 상대방 지향) 제시라 해도 무방하기에 그러합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남을 생각하는, 정다운 이웃, 친절한 사람 만들기 운동입니다. 상대방중심이니까 그런 것이야 말하나마나입니다. 세계 평화 운동이기도 합니다. 반복하지만 나 한 사람 나 위하지 않음이 만인의 나 위함의 혜택을 누리게 함으로 전환되어 오는 극적인 역전/逆轉사람마다 맛보고 직접 체험하는 희열을 누리게함이 이 약속의 특점이자 장점인 것입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니고 남이 손해 보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더 풍성한 삶"(요 10.10)을 향유하는 방법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합니다. 자기 상대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모두가 나를 위하는 것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나를 위함보다 여러 갑절로 그 수백, 수천, 수만, 수억배로 위해지는 기적 아닌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단 모두가 이 약속 운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하는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다 함께 <우리>를 위하는 운동입니다. 전체 인류 사회로 하여금 훈훈한 훈풍에 휩싸이게 하는 운동입니다.

"그러면 여기 노숙자가 있는데 내가 가진 것 다 그에게 주어야 하느냐" 한다면, 부유함 자체를 성경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눅 6.24). 죽음의 세상이므로 이런 동물적 육체(신령한 몸을 잃어버린)로서의 삶이란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시니까(:25-35). 따라서 이런 것을 문제 삼는 것부터가 무의미.

"노숙자, 운운" 하기 전에 자기의 부유함 또는 "세상에서 산다"는 의식부터 즉각 청산함이 시급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작 자기 생명(하나님 앞에서의 영생의 희망과 기대)마저 심각한 위협을 받으니까. 하나님의 복음 전파 사업에 희사할 계획이 되어 있지 않다면 사회 공익 사업에 헌납하는 것이 최선책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훌(사회 또는 국가 차원에서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빈민 상대로 구제 활동을 하는 것) 사업체를 설립해 운영하거나. 



단순하게 생각하고 쉽게 설명하도록 되어야

 



여기서 가장 의의가 깊고 따라서 가장 큰 주목을 받아 마땅한 것은 삶과 생명의 법칙이 이에서 파생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당연 귀결로서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상식적이어야 할 이 일이 너무나 오랫동안 감추어져("무시되었다"고 해야 오히려 옳은 표현일 듯)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 생명의 법칙(다른 말로는 "사랑의 법칙" 또는 "하나"됨의 법칙ㅡ여기서 "하나"는 요 10.30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을 어김이 죄("범법/犯法, 불법"ㅡ요일 3.4)요 따라서 아담의 자아중심이 그것이고, 악마 사탄의 범죄가 그러하고, 주님의 우리 위한 희생 제물되심도 이에서 비롯되는(상대방중심으로서의 "의"ㅡ"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 것",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일 2.29/3.7) 것인만큼 성경의 핵심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제까지 역설해 온 대로, 죄와 악은 <자아중심>이요 그 반대인 의와 선을 행함은 <상대방중심>입니다. 이와 같이 나를 위하지 않고 일관되게 남을 위하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 즉 주님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어 있으면 예외없이 그러하니, "우리 중 누구든 자기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으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소유)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된 모두를 가리켜 성경"은 성인("saint")"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성도/聖徒"라 되어 있는데 제대로 된 번역이라면 "성자들",  "성인들"이라 해야 마땅합니다. 마치 단지 <명칭>만으로서의 "성인"인 양 아주 그릇된 인식을 심어 놓은 것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기독교"의 실태였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런 고로 "참고 선을 행함이 영생"(롬 2.7)이라 한 것인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갈 2.16)는 말을 엉뚱한 데에다 갖다 붙여(마귀의 농단인 바벨론 신학), 믿은 다음의 핵심인 순종의 행위마저 무조건 부인하여 배척해버리는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절대 다수를 지금까지 멸망으로 유인해 들인 것.

이런 "바벨론"으로부터 화급히 틸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ㅡ계 18.4)만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심판 전의 경고이신 것입니다. 만유는 상반/相反(대칭/對稱)입니다. 이것 아니면 반드시 저것일 뿐이니 그 선택은 각자의 자유 의지로써 좌우됨인즉 이 경고를 절대로 가볍게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또한 상반이니까 반드시 인과/因果 관계라 창조된 세계요 창조주 하나님이 관할하시는 세계임이 명백함을 이해함은 상식 수준입니다. 자기 의지로써 각자의 선택에 따른 정당한 응보/應報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대로 살아야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님을 3위1체는 가르칩니다. 그 가리키는 방향은 모든 사람에게 덕이 되어 이득이 되는 <상대방중심>입니다.

이 상대방중심이야말로 이상향적 삶을 꿈 꾸는 모든 이지적 삶의 방법인 것입니다. 짝을 이룬 둘의 "하나"됨입니다. 곧 3위1체에서의 '제3위"의 의미로서 모든 아름다움의 본질입니다. 대칭미/對稱美는 성경 고전 7.4의 "한 몸"(창 2.24) 기능/機能이 그 대표적 설명입니다. 즉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이요 남자의 육체는 여자의 소유.

갑과 을 둘이 "하나"로서 "짝"을 이루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합니다. 이것이 상대방중심인 고로 쌍방 어느 쪽도 자아중심일 수 없습니다. 상대가 자기를 위해 주는 상호간의 관계이니까. 이것이 하나님 정해 주신 삶과 생명의 법칙 즉 사람이든 영물/靈物이든 두루 통하는 <사는 법>인 것입니다.

아무리 "구원 받음을 확신한다" 해도,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 하신 대로 여전히 이기주의적 욕심대로 하여 자아중심이면 이율배반이라 자기를 속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천사의 복음"(계 14.6)이 이를 지적합니다. 고로 21세기 복음 전파는 <여기서부터 시작>함이 마땅하니 무턱대고 "믿음으로 영생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자아중심의 길로 잘못 들어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린 아담 범죄이므로, 이러한 "죄의 몸"(롬 6.6)으로부터의 해방이 영생/구원앤즉,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하나, 한 영이 된 증거는 상대방중심의 마땅한 삶이라는 것을 함께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이비요, 속이는 자 사탄적일 수밖에 없고, 여전히 바벨론의 <죄와 재앙>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아중심>의 살인마적 죄악과 <상대방중심>이라는 원래부터의 사람 사는 법 즉 상식 차원의 기초 지식부터 전파해야 마땅합니다. '상대방중심'은 최소한의 기본 도덕율인 것입니다. 소위 율법폐기론(Anitinomianism)이든 율법주의(Legalism)든 백해무익의 부질없는 말장난으로 사탄의 주구 노릇일 뿐입니다.

"혼잡하게"(고후 2.17/4.2) 말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서 왜 "구약에 나오는 도덕법, 십계명"을 들먹이며, "칭의만으로 구원을 얻는다", "죄가 거의 언급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다는 표현이 잘 사용되지 않는다" 등 해괴한 말이 왜 나돌아야 하느냐입니다.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마 18.3),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할 것"(막 10.15)입니다.

초대교회에서 3위1체 관련해 지식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혼란 중에 헤맨 것도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아는 것으로 충분했고,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전 2.11) 했으니, <'사람' 따로 '사람 속에 있는 영' 따로>로써 <'하나님' 따로 '하나님의 영' 따로>를 설명했은즉 그렇게만 알면 충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성부"와 "성자"의 구분도 없이 무턱대고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미신과 망념에는 사로잡히지 않은 것입니다.




2025년 12월 27일 토요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거룩한 제사장의 거룩한 제물로서의 우리 기도

"인자를 인해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악평하여 너희를 버릴 때에는 너희가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reward)이 큼이다"(눅 6.22,23). "주님과 그 복음을 인하여"(막 8.35) "세상이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악평하여 버릴 때" 그 자체가 축복이니,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 것은 하늘에서의 상이 엄청나다"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당하셨고 지금도 그 '몸'된(주님 친히 그 '머리'가 되시므로) 교회를 위하여 또 교회와 함께 받고 계시는 모든 고통 고난에 참여하여 주님의 고난과 함께 함이라는 단순한 그 이유 때문이니, 이것이 굉장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입니다.

일국을 호령하는 왕이나 황제가 한 때 어려움을 겪었을 당시 그 고난에 돔참해 주었던 신하에게 (나중에) 그 공을 포상하여 보답하는 것과 같은 뜻이기에, 그 정황을 참작하면 위의 주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심이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롬 8.26)이라 한 대로, 이 주님의 "형언할 수 없는 탄식"의 고통에 모든 <제사장적 기도>를 하는 기도자는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제사장>적이라 하는 이유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자기를 위해서가 아닌 남을 위해 바쳐져 그(들)를 살리는 일을 담당하는)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합리적) 예배>"(롬 12.1)라 한 대로 그런 성격의 간구이기 때문.

여기 "성령"은 주님을 가리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하나"(요 10.30)로 계심이 "성령"이시지만, 성자께서 성부의 "형상"(고후 4.4/골 1.15)이신 까닭입니다. '실체'를 대변하는 '형체"이심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에 함께 참여함(방금 설명한 "주님의 고통 동참/同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복음 전파 사업을 위한, 심장을 쥐어짜듯 하는 우리의 눈물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산 자"는, 자아중심으로서 자기를 위하는 자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관계와 관계 속에 맞물려 있기에 반드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함>으로써 상호간 "하나"(요 10.30)됨이 생명 자체이기에 그렇습니다. 비록 자기 신변에 관련되는 일로 기도 제목을 삼는 경우라도, 반드시 하나님 소유로서의 "나'인 것이지 내것으로서의 '나'가 아닌 까닭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고전 10.31)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과 제물로서의 우리 기도인지라 이는 실로 형용할 수 없는 막중한 가치이기에, 베드로는 "말씀 전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행 6.4)을 첫쨰로 앞세운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그 가르치심을 직접 몸으로 느끼면서 배운 이러한 사도들의 지도 아래 세워진 초대교회이기에, 얼마나 기도 생활에 비중을 둔 일상 생활이었는지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서로 분방(부부가 방을 따로 쓰는 것)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방)하라"(고전 7.1-5) 했던 편지 문구로도 충분히 확인됩니다.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ㅡ부부라도 <방을 나누기까지> 기도를 일상화했던 증거입니다. 오늘날 기도를 게을리하는 우리가 마땅히 귀담아 들어야 할 경고라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가 지적했듯 우리는 문자 그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살전 5.17)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삶도 적당히 누리면서 영생의 미래도 보장되는 그런 안일하고 편한 것이 천국 복음이 아닙니다.

자빠졌으니 당장 일어나야 하고 내가 일어났으면 다른 사람도 일으켜 세워 주기에 여념이 없는 그런 절박성으로 특징지어져 있는 것이 지금 이 세상입니다. 악령 원수들이 천하에 넘치게 깔려 있어 하시라도 덮쳐오는, 밀어닥치는 순간들로 점철되어 있는 영적 싸움 마당인 것입니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기를"(마 6.13) 구하라 하심도 같은 뚯잆니다. 사탄이 장악한 세상이 아니라면 "시험과 악"에 대해 이 정도로까지 심각해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함도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림을 인해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존의 위협이 있기에 그러하며, "마지막 아담" 안에 있지 않는 한에는 사람마다 "죄의 몸"(롬 6.6)이 되어 있음도 이에("육의 몸"ㅡ고전 15.44/"육신"ㅡ롬 8.13)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위한 끊임 없이 올리는 기도가 필수입니다. "기도나 하지"가 아니라, "기도부터 하는" 것을 몸에 익힌 사람이야말로 실로 <복 있는 자>라 할 것입니다.

2025년 12월 25일 목요일

마귀가 기도를 적극 방해하는 이유

<말씀> 전파는 하나님의 인생 구원의 복되고 은혜스러운 말씀(복음)을 이제까지 듣지 못한 사람에게 처음 알리는 역할입니다. 즉 전도인 것입니다. 고로 교역자 또는 설교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들 목회자에게 걸맞는 것은 하나님의 양떼들 개개인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 중에 받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적절한 메시지> 전달에만 한합니다. 오늘날 "설교자"로서 허구한 날 같은 내용에 불과한 것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은 바벨론 신학 바벨론 교회의 잔재일 따름입니다. <사이비 교역자> 여부가 대체적으로 여기서 판가름됩니다.

영적 훈련/단련을 거치지 않은 오늘날 대부분 교회 담임자들이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여기에 속하는 것이 무척이나 서글픈 현실입니다. 그들에게는 <교역자> 생활이 "더러운 이/
"(딤전 3.8/디도 1.7,11/벧전 5.2)를 탐내는 즉 편한 직장 생활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사귐("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ㅡ요일 1.3)은 기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말씀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으로써는 우리의 <영적 위치> 즉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정확히 자리잡아 있는지 여부가 
진단되어 가름되는 것뿐입니다. 이 극명한 차이를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요구되는 진정한 일꾼은 기도자이지 설교자가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같습니다. 기도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에 한해 설교자의 진가/眞價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이러한 영적 안목으로 자기 교회 교역자들을 위한 "쉬지 않는"(살전 5.17) 기도에 임해야 마땅한 것이니,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 5.25)고 영적 거장/巨匠인 바울 사도마저 끊임 없이 형제들 격려하기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2025년 12월 23일 화요일

인간은 의인으로 성인(聖人)으로 선하게 영생하도록 창조되었었다

 


'자아중심'이 만악의 근원이고 그와는 정반대인 '상대방중심'이 만복의 근원임이 밝혀졌으니 이것은 3위1체에서 나온 것이요 3위1체야말로 창조주 하나님 계시는 모습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유를 창조하셨으니 이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리/事理입니다. 이로써도 오늘날 21세기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實存은 훌륭히 완벽하게 입증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탄의 거짓말 바벨론 신학을 척결하는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의 웅장/雄壯함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불교 등 세상 종교와도 물론 맥이 닿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맥락을 이어 받은 것도 아니라고 함은 초대교회가 시작함과 거의 동세에 바벨론 신학 즉 악마의 거짓말이 준동/蠢動음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와 같이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고 바울 사도가 심히 놀라워 헸던 바로 그대로입니다.

그리하여 에덴, 아담이 초자연계 속성임을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영적 죽음" 따위 해괴한 속임수가 지금까지 기독교계를 지배해 왔던 것울 감안한다면, "천사가 가진 복음"이라는 독자적 개념이 등장할 만도 합니다. "3위1체"라는 소위 신학자들의 용어조차 이미 등장한 지 2천년 세월을 거쳤지만 그동안 무지/無知 속에 갇혀 있다가 오늘에서야 빛을 보게 된 것도 그러한 맥락이라 할 것입니다.

"자아중심이"니 "상대방중심"이니 하는 개념도 3위1체 기반의 생명의 법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상대성의 동시성'입니다. 정반대의 성질로서 짝을 이룬 둘은 반드시 "하나"(요 10.30)를 이루는 바 이 "하나"됨의 요건이 있으니 갑은 갑 자신을 위하지 않고 그 상대인 을을 위하며 을 역시 그러한 것이니 이 명확한 현상은 남녀 "한 몸"(창 2.24)됨에서 검증된 것입니다("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주관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함이니"ㅡ고전 7.4).

이는 오늘날 미시세계에서의 양자역학으로 확인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즉 입자성과 파동성은 둘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 없고 반드시 둘 중 어느 하나만 나타남이니 이는 둘이 "하나"를 이루어 있기 때문에 그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상대방중심은 애오라지 다음과 같은 여건하에서만 완전하게 성립한다는 결론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시인할 것, 이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생이 죽은 자가 되었고 그 범죄 이유가 자아중심이었으므로 이 자아중심을 뉘우치는 "회개"가 급선무임을 각자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사람에게만 한해서 만인간에게 해당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 친히 사람되시어 우리 위해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있으시니, 각자 이 사실을 믿고서 성령으로 임하시는 그 분을 자기 몸 안에 자기 영혼처럼 모실 것, 이것이 세번째입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임하여 오시는 이유는, 아담 범죄로 모두 죽은 자가 되어 신령한 몸을 잃어 영생이 불가능하게 되었기에 애초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던 처음 창조는 폐기시키고 새 창조를 받기 위함입니다.

성령으로 오시는 그 분을 내 안에 모시는 이유는, 그 분과 "합하여"(고전 6.17) "하나" 곧 "한 영"되기 위함이니 이로써 그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고 그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태동/胎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으로 끝난 후에는 동시에 새 생명 새 사람으로 다시(거듭) 나 새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이 일이 가능하게 하심입니다.

이로써 처음 창조되었던 대로 상대방중심의 의롭고 선한 존재로서의 거룩함으로 창조됨이 새로이 이루어져 영원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주님은 오직 나만 위하시고(십자가 죽으심으로 이미 증명하셨음) 나는 이렇게 다시 난 순간부터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으로써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소유물)"(롬 14.8,9)이 됨입니다.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시는 즉시 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다시 나게 되는 우리 각자는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으로 나는(요 3.6) 것이기에, 우리 각자 개개인이 다 마치 아담처럼 개별적으로 단독 창조됨과 같은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담의 코에 숨을 불어 넣으시던 때의 형용을 해 보이시어,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요 20.22) "성령을 받으라" 하셨으니, 아담이 당시 그렇게 하나님 친히 내쉬시는(아담의 코에ㅡ창 2.7) 숨("생기")으로 영(혼)이 조성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후에 아담이 신령한 몸이 된 것처럼 우리도 성령 받아 새로 창조됨 즉 다시 남으로 인하여 신령한 몸을 입음 즉 영생이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동물적 육체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지으심 받은 후 에덴에 한 동산을 창설하신 다음 아담을 거기 두심으로써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었던 그 동일한 과정을 밟음을 밝히심으로써,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하신 것입니다. 즉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일제히 순식간에 신령한 몸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새 창조가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 일렽의 과정이 그림처럼 묘사되었으니, 어찌 성경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무책임한 말을 한단 말입니까! 단 현재의 인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낳고 낳음으로 생겨나는지라 2천년이 소요된 것이나, 신령한 몸 변화는 주님 오심과 맞추어 순식간에 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 받음이 위의 설명처럼 새 창조이니까, 아담이 창조될 당시 선하고 의로운 자, 거룩한 자였던 것과 같이 무릇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는 자마다 모름지기 상대방중심,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함이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하나님 믿음", "구원의 확신" 등은 일체가 자기 기만에 그칠 뿐입니다. 바벨론 신학은 이 중대 사실을 지적하지 않은 것입니다. 무조건하고 "믿으면 구원"이라고만 속여 온 것입니다. 그런 것은 백날 외쳐보아야, 백날 믿어보아야 구원이 아닙니다. 크게 경각심을 가져 마땅한 일입니다.



자아중심 아닌 상대방중심은 관점/인식 차이 및 의지 유무로 좌우될 뿐 무슨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과 바벨론 신학(사탄의 거짓말)의 차이는 <초대교회 432>("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공용/共用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ㅡ행 4.32)에서 당장 드러납니다. "영광의 몸"(빌 3.17)/ "신령한 몸"(고후 15.44)이 아닌 동물성 육체의 특징은 <자아중심>의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 내지 집착>("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ㅡ눅 14.33)에서 완연히 드러나집니다.


그러나 구원 받음의 증거는 <상대방 중심, 하나님 중심>이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이므로("우리 중에 누구든 자기 위해 사는 자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ㅡ롬 14.7-9), 초대교회는 당연히 그 증거로서 <행 432>가 두드러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자칭 "교회"로서, 우리가 아는 한 이 소중한 초대교회 전통을 따르는 데라고는 단 한 군데도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은 무엇이냐, 초대교회와 오늘날 교회가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니 이는 전자는 "자기 부인"의 하나님 중심이요 후자는 자아중심이라는 그런 극명한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소위 "교회"는, "자기 소유"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구원 받았다는 증거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그 뜻인가요? 그러합니다.  <달리 설명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행 432>는 눈 씻고 찾아 볼려야 볼 수 없고 구경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이 현상에 대한 유일한 풀이가 있다면,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에 사로잡혀 "구원 받았다" 하지만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믿는다"고 하나 믿는 것이 전연 아니었다는 것.

"저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ㅡ롬 2.6-9)을 버리는 자"(디도서 1.16)라는 판단 기준에서 벗어날 재주가 없습니다. <행 432>라는 초대교회적 "행위"는 구경도 할 수 없으니,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을 못합니다.

자아중심이 죄의 정체요 뿌리입니다. 성경에서 정확히 집어 말하는 "욕심"("<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ㅡ약 1.15)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관된 상대방 중심에서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본능적> 삶이 아닌 <이지적> 삶의 특징인 것입니다. 본능적이고 기계적 삶은 짐승에게만 해당됩니다.

"해당된다"라는 말은 애초 하나님의 창조 결과로서 처음부터 그렇게 작동되도록 정해져 있는 정상 작용이라는 뜻입니다. 기계 작용은 생존을 위한 최적 작동으로 그 이상의 욕구는 없으니까 그래서 그 자체가 선/善(좋은 것)("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ㅡ창 1.31)인 것입니다. 짐승의 욕구는 단지 생존을 위한 기계 작용이므로 하나님 창조 의도에서 벗어남이 없기 때문에 좋은(선한) 것입니다.

허나 인간 등 영적 존재는 그 지향하는 바가 이 기본 욕구에만 머물지 않고 무한정입니다. 용(뱀)이 아담을 <시기하여> <미워하고> 종내에는 <살인>("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ㅡ요 8.44)까지 하게 되어 범죄자가 된 것이 그 예입니다. 따라서 무릇 자유 의지를 구사하는 피조물일일진대 모름지기 상대방 중심으로 행해야 한다는 <삶과 생명의 법칙>을 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법칙은 그 기본 바탕이 언약/言約, 약속에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언약인 것입니다. "내가 너를 창조한 것은 내가 전적으로 너를 위할 수 있고 나를 위함이 아니니까, 고로 너는 네 자신을 위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내가 너를 전폭적으로 위해 주므로) 오직 나만을 위함으로써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여 내 명령/계명("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있는, 머무는, 사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ㅡ요 15.10)을 따라 네 이웃들을 위하는 언행심사 일체로 임하는 상대방 중심으로만 나가고 자아중심은 일절. 배척하라"는 분부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대방중심"과 '자아중심'을 분명히 가려서 행동하는 것이 어른과 아이, 짐승과 사람,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과의 <하늘 땅의 엄청난 차이>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은 마귀의 거짓말로서 인생들을 속여 멸망시킴이 목적이므로 이런 엄숙한 이치를 감추기에 급급하여 <자아중심> 일변도의 "하나님 시인(믿음)", "구원 받음" 심지어는 "하나님 잘 믿어 축복 받아 잘 산다"는 황당무계까지 지어내어 퍼뜨린 것이 오늘날까지의 역사입니다.

애초 인간 창조의 기본이셨던 신령한 몸의 특색은 자유·평등입니다. 기계적 작용인 짐승들의 동물성 육체처럼 죽음에 얽매이지 않고 굶주림, 헐벗음 등등에 얽매이지 않는 그런 자유를 똑같이 누리니까 평등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동물성 육체라는 일대 참사/慘事, 대형 사고를 만나 "죽은 자"(마 8.22)가 되어 있는 아수라장 속에서의 고통 고난의 아우성 가운데에서나마 삶의 흉내라도 내겠다면 모름지기 이 평등, "평균"(고후 8.13,14)케 하려는 노력, 본보기만큼은 교회가 나타내어야 마땅하고 이는 상식에 속합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행 432>에 힘썼고 충실했던 것입니다.

비록 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21세기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천사의 복음" 시대 삶/생활 양식/樣式("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ㅡ마 19.21)에 최대한 관심을 기울여 힘써야 마땅한 줄로 압니다. 우리 주님 분부하신 대로이니 지체 없이 앞 다투어 행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믿음", "구원 받음''이 이 순간에라도 말짱 물거품으로 끝남을 부디 명심해야.

"잘 믿어 축복 받아 잘 산다"는 미신/迷信 아니, "바벨론"의 올무, 함정, 덫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소위 "잘 믿음"은 "십일조" 충실히 내는 따위의 '무의미"를 가리킴입니다. 10분의 1만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나의 1백%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나의 구원 받음입니다. 주님 친히 자기의 전부 즉 100%를 내게 주심으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이니까.

바로 이것이 "한 영"(고전 6.17)됨 즉 "하나"(요 10.30)됨으로서 우리의 구원 받음입니다. 이 "하나"됨의 구조는 "한 몸"(창 2.24)됨과 같으니, 즉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 남편 것은 아내의 소유됨과 같아,  "한 영"에서는 삶/생활 자체가 그렇게ㅈ 되는 것 곧 <상대방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 중심이 "거룩함"(성결)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했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히 12.14) 했으니, 하나님을 아무리 시인한다 해도 자아중심이면 "행위로는 부인함"(디도서 1.16)이니까 모든 것이 도로무공/徒勞無功(십일조 열심히 내고 교회 집회 열심히 나가도 헛되이 애만 쓰고 아무런 보람이 없음)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이든 사람 사랑이든 말로만 끝나면 위선/僞善(겉치레)이요 자기 기만이지만 행위("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 누구든 그에게 '평안히 가라, 따뜻이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ㅡ약 2.15-17/요일 3.18)가 따름으로써 그 진정성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 그윽한 데서 생명수 샘물 강물되어 흐르네(중복게재ㅡ앞당겨 놓음)

 


                                                                       이안삼(1943-2020)

   

"내 마음 그 깊은 곳에"...이안삼의 최대 히트곡에 접목시킨
"내 마음 그윽한 데서"
(이 곡과 가사는 독자 여러분이 개인적으로만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고 공식 발표는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저작권에 저촉되기 때문임을 감안해 주시기를)

이안삼은 "독실한 기독교인"⁸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성가곡 '선하신 목자'를 작곡하며 음악계에서 전국적 지명도를 얻기 시작했고 이 곡은 그의 전체적인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로 평가받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자비량 선교 활동에 동의하며 해외 활동에도 참여한 기록이 있다. 그를 추억하는 음악계 인사들은 그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기억하며, 그의 음악적 영감이 신앙과 깊이 닿아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내 마음 그윽한 데서"

1.
내 마음 그윽한 데(에)서 내 마음 그 깊은 데(에)서
생명 샘(계 7:17)물 강물(요 7:38)되어 흘러 흘러 넘치네
주님 안 '늘 평안'(요 14:27)되어 
주님의 '늘 기쁨'(15:11/17:13)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흘러 넘치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는
아버님 품속(요 1:18)에서 강물처럼 흐르네

2.
내 영혼 그윽한 데서 내 영혼 그 깊은 데서
영생수/永生水가(계 22:1,2/요 3:16) 강물되어 넘쳐 넘쳐(요 10:10) 흐르네
성령으로 거듭 나서(요 3:3,6,8) 주님과 한 영이(고전 6:17) 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넘쳐 흐르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이
하나님 은혜 속에 영생수로 흐르네

*  "그윽하다"→ 깊숙하고 고요하다. 잔잔하고 은근하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찬송가 412장에서. 


"나의 영혼이 주님을 가까이 따르니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시 63: 8). "내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니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습니다"(시 73: 23). 주님의 오른 손이 나의 오른 손을 붙잡으시면 자연스럽게 주님의 왼손이 나를 감싸 안으심이 됩니다. 나는 항상 내 옆에, 앞에 계시는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오른손은 항상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니, 주님 친히 내게 그와 같은 힘이 되어 주심입니다.


"하나님, 저를 위하시는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우리말 번역 단순히 "제가 주님의 생각을 보배롭게 여긴다"와는 달리 영역으로는 구체적으로 "저를 위하시는 주님의 생각이 보배스러우시다"의 뜻).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으신지요. 제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습니다"(시 139:17,18).


"내 마음 그 깊은 곳에"란 가곡은 그 음조가 강의 흐름을 연상시킨다고 느껴집니다. "강물"이라면 우리에게는 성령과 관련된 주님의 말씀이 너무나 유명합니다(요 7:38). 영역으로는 "rivers"로 되어 있으니 그 풍성함을 직감하게 됩니다. 성경에 "주님께 노래한다"는 또 다른 풍성한,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 잊기 쉬운 의미가 있습니다. 365일 24시간 내 앞에 성령으로서 서 계시는, 인생 중에서도 당연히 가장 아름다우신 모습의 주님(행 2:25). "성령" 이라는 말은, 또 아버지 하나님 친히 그렇게 계셔 주시는 형상이시기도 하다는 뜻. 3위1체 법칙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알게 된 놀라운 실상입니다. 즐거운 노래가 없을 수 없지요.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다"(:26)가 그것입니다.

강물은 흐느적 흐느적 흐느끼며 흘러가는 것이라기보담은 흥에 겨워 신나게 몸을 구을며 즐겁게 노래하면서 활기 차게 흘러가는 것이 제격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마음 속으로 흥얼거릴 수 있는 가사를 마련해보았습니다. 곡조가 아주 시원스럽게 강의 유동/流動을 묘사하고 있어 그냥 두자니 아깝기에ㅡ. 특정 성경 구절들을 마음에 새기는 것에 치증하는 쪽으로 다듬었습니다. 모든 찬송 찬미가도 가급적 그런 특색을 지님이 마땅하다 봅니다.


(아래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악보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노래는 박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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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0일 토요일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는 의식 없이 단지 영생만 욕심 내는 자에게 구원은 해당되지 않는다







 


이 시점 화급한 자아진단 (2)


"점진적인 창조" 또는 "진화"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는 한 번만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창조는 항구적입니다. 영원히 존속 못할 것이면 아예 처음부터 창조하시려는 마음부터 품지 않으셨을 것이니까. 단 한 번만의 창조이고 영속적이어야 할진대 인간은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 즉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셨다는 결론은 요지부동입니다.


그런데 인간 창조가, 처음부터의 첫 창조가 아니고 여러 생물(먼저 식물 그리고 다음이 동물)을 창조하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최종 작품이셨기에, 즉 동물의 여러 육체를 만들어 가셨던 연장선상에서의 인간의 동물적 육체이었기에, 침펜지 등 유인원 창조에 연이은 순서의 인간 창조이셨던 것.

여기에 영적 요소를 첨가시키신 것이 우리 영혼의 조성이셨고("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ㅡ창 2.7) 그러신 다음 처음 창조하셨던 영계(초자연계 즉 물질 세계와 대칭)로 인간을 옮기시어 거기서 영적 속성을 갖추게 하셨으니 거기서 아담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쳤던 것이기에 이런 2중성을 상징하는 생명과 나무(아담의 신령한 속성을 대표하는)와 선악과 나무(애초의 자연 물질계 속성 대표)를 아담이 거처하는 그 에덴의 "동산"에다 지어 놓으시고 후자에의 접근을 엄금하셨던 것입니다. 이유는, <현재의 신령한 몸>이 즉각 취소되고 <이전의 동물성 육체>로 환원되어버릴 위험이 있었기에.

그러나 아담이 이 경고를 무시, 선악과에 손대어 ,아닌게 아니라 동물성 육체로 회귀되어버리자 방법은 단 하나. 아담과 대칭이 되는 또다른 아담을 설정하시어 그로 말미암아 인생들이 원래의 인간 창조의 모습(신령한 몸으로 영생하는 존재)대로 회복하게 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죽은 자"로서의 동물성 육체를 이런 까닭으로 <물려받아,서> 태어나는 운명의 인간을, 이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의 영(혼) 즉 성령("마지막 아담"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을 <물려받아> 다시 나게(거듭 나게) 하는 방법으로써, 망가져버린 <옛> 인간 창조를 이러한 <새> 창조로 뒤바꾸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 받음"입니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우리가 현재 사람(인자/人子)인 것과 같은 이치로 "마지막 아담"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신자/子)됨이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함이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함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킴입니다. 즉 "하나님의 씨"라 고 한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하나"(요 10.30)되어 계심을 말하는 고로,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만 아니라 동시에 성부 하나님 친히 또한 내 속에 임하심이므로 "하나님의 씨"라는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 곧 "양자/子"(롬 8.15,23/9:4)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아들(남녀 불문)됨이요("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 우리가 지금은("<지금>"이라고 고쳐야) 하나님의 자녀라...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영광의 몸, 신령한 몸의 모습) 같을 줄 아는 것...

"그 안에 거처하는(있는, 사는, 행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함이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한 것이다...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다...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남이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것이다"ㅡ요일 3.1-10), 따라서 양자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음이 판명될 때는 파양/罷養이 되는 위치임은 당연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실로 서릿발 같은 경고인 것입니다("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니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goodness)>와 <엄위/嚴威(severity)>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될 것이다"(롬 11.20-22).

죄짓지 말라고 거듭거듭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죄를 지으면 즉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아중심이면, 마귀에게 속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까! 이제까지의 바벨론 신학에 의한 소위 "구원"은 주님과 "함께", "하나"됨을 말하지를 않고 난데없는 "대신 죽음"만 반복하여 "주님 죽으신 덕분에 나는 그 대신 산다"는 식의 거짓말만 반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따로, 나 따로"이므로, <성경과 반대>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음"(행 2.38)은 다름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 친히 내 속에 내 영혼처럼 오시어 영원히 나와 "연합하심으로써"(롬 6.3-5/고전 6.17) 단수의 홑사람(나 하나, 혼자)이 아닌 복수의 겹사람(주님과 함께 "하나"로서의 둘)으로 영원히 내가 존재함입니다.

단 "영으로서의 하나님"(요 4.24)께서 사람되시어 영원히 육체를 입으심인지라 이는 어떤 의미냐 하면, <육체이신 사람>으로서 <내 육체 안에> (마치 영혼처럼) 내 안에 계심입니다. 육체인 사람이 내 육체 안에 있을 수 없지만 오직 한 분 내 주님만 홀로 가능하십니다. 창세/創世 이래 이 유일무이의 색다른 현상이 바로 나의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됨으로써 내 "<죄의 몸>은 멸해져"(롬 6.6) 완전 결딴나버려 망가지는 것이, 성령으로 주님 친히 내 안에 임하여 오시는 순간 엄연한 역사적 사실(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심은 <주님과 "하나", "한 영" 됨>으로서의 내 부활이 되어 영원히 나는 주님을 위하고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친히 입증해 보이신 대로 나만 위하시는, 이같은 '삶과 생명의 영원한 법칙'으로 영원히 고착화되니,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4.24)으로 완전히 바꿔짐이 나의 구원 받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사는"(갈 5.25) 것이요 "성령으로 행함"(:25)입니다. 이 효과가 어떤 것이냐 하면, 복제/複製된 "나"라는 인간이 이 만우주에 가득 차 있는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나와 하나되신 주님이 그렇게 만유로서 맘유 안에 계시니까! "풍성한 생명"(요 10.10)이 이런 것입니다. 그득하고, 너넉하고, 푸짐하고, 든든하고, 느긋하고...무엇이라 가히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쩨쩨하게 궁색하개 변변찮게 이 세상을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 만우주의 상속자다운 행동거지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각자로서 <겸손히> 세상에 <군림>합시다.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으며...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쫓겨 다니며, 떠돌며, 헤매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이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巖穴(바위)과 토굴/土窟(흙을 파낸 큰 구덩이)에 몸을 숨기는 환란을 당했으나"(히 11.35-38) 건들건들 유유자적함으로 다 소화해낸 것은,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행 9.31) 나간 때문입니다.

하나님 친히 나의 구원 자체가 되심이니 이는 바로 사람되심 즉 "마지막 아담"이 되심인데 그렇게 "마지막 아담" 되심 그대로, 사람의 육체가 되어 계시는 그대로 내 안에 오심을 가리켜, "나의 구원 받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사람의 육체"라 하는 것은 현재의 이 몸과 같은 동물적 육체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직접 목격한 대로, 동물성 육체는 당장 눈이 멀어버리는, 정오의 해보다 더 강하게 발산되는 영광의 광채(행 26.13)의 신령한 몸이니까, 180도로 인식전환을 해야 합니다. 


2025년 12월 18일 목요일

이 시점 화급한 자아진단




성경 해석 그 중에서도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의 우리 위하신 죽으심에서 문제의 본질이 어디 있느냐 하면 "성령" 관련 몰이해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모른다는 중대한 결함에 있습니다. 말을 바꾸면, "3위1체"에 대한 무지/無知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마 28:19)이신(또는, "~으로 계신") 줄은 알지만 그 표현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지금까지는 몰랐기에, "한 분 하나님이시나 어떤 때는 성부로, 어떤 경우에는 성자 혹은 성령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말까지 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로서의 모자/母子(하나님은 성별이 없으시기에 대표적인 남성으로 통일시켜 "부자"라 해야 하지만 부드러운 어감/語感을 위해) 관계이시나, 두 분이 "하나"(요 10.30)로 계심이 "성령"이신 사실을 몰랐기에 빚어지는 혼돈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에서야 밝혀진 것이지만, 이 "하나"라 함은 3위1체의 "제3위"를 뜻합니다. 즉 성질로서의 상반/相反을 이룬 짝은 반드시 "하나"로서 상보/존재하고 활동함을 의미합니다. 여기가 만유 이치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부와 성자의 "하나"되심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이시기에 성령을 "성부"시라 해도 맞고 "성자"로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요 14.9) 하셨고,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임하여 오심을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14.23)이라 하신 것이며, "하나"이시니까 복수가 아닌 3인칭단수로 표현되시어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함이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앎이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7) 하신 것입니다.

성령을 "보혜사/保惠師(Comforter)"시라고도 하셨는데,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26)이라 하셨습니다. 성령은 또한 주님 자신을 가리키심이기도 하기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나 너희는 그를 앎이니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17)이라 하시어, 다름아닌 당시 제자들이 항상 뵙고 함께 거처하시던 주님 친히(우리 위한 죽으심 및 부활하심 후에) 그 제자들 각인에게 임하여 오실 것인 바 이 곧 성령이심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나의 구원과 관련된 일체의 사실 즉 나 위하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구체화하고 현실화함이 단지 이론만으로써가 아닌 실제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시어(내가 주님을 실제 내 안에 성령으로 모심으로써) 나와 "하나"(10.30)를 이루시어 "한 영"(고전 6.17)이 되심으로써만 비로소 달성됨에 있다는 이 핵심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고 그 부활하심이 나의 실제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됨으로써 나의 <구원 받음>이 성립되고, 동시에 상대성의 동시성(일방적인 것은 없어ㅡ은혜의 새 창조이기는 하지만 사랑 즉 "하나"됨에 의한 창조이니까 상호 작용)이므로, 나의 모든 것 즉 나의 언행심사 일체 그리고 내 몸과 영 및 나의 삶 자체가 주님께 바쳐져 주님의 소유가 됨입니다. 나를 "피로 사심"(행 20.28/
고전 7.23)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는 육체로 "한 몸"(창 2.24/마 19.5)이 됨에서 아내의 육체가 남편의 것, 남편의 육체가 아내의 소유가 되는 맞바꿈과 똑같은 것입니다(고전 7.4). 그래서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개역한글/개역개정의 잘못된 번역이니 "위하여"로 고쳐야)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대신하여(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한 것입니다.

내 삶 자체가 주님의 소유라 더 이상 나를 위한 것이 아니기에 당연히 그러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 임자)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그리고 엄중한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무릇 "나는 구원 받았노라" 하는 이라면 모름지기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데 다시 말해 주님만을 위하는 일상생활이어야 함에도 그렇지 않고 여전히 이전처럼 자아중심일 때는 예외없이 자기를 속임이요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된 알도 없거니와 성령 받아 모신 역사도 없다는 최종 결론입니다.

여기서 유일한 해결책은 즉각적 회개입니다. 이모저모 자기를 합리화하려 하지 말고 자아중심 즉 주님 위해 살지 않았음을 뉘우쳐 차후로는 어떤 경우에도 여하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 중심, 상대방 중심의 순종으로 나아가리라는 무조건적 결단입니다. 이것만이 이 순간 가장 안전한 방안입니다.     (계속)

2025년 12월 17일 수요일

참고 선을 행함으로 영생


"참고 선을 행함"이 "영생"(롬 2.7)이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10)이다. 반복한다; "참고 선을 행함"="영생"(롬 2.7).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영광과 존귀와 평강". 여기에는(하나님 말씀으로 분명히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믿음"="영생",
"믿음으로 의롭게 됨"= "영광과 존귀와 평강" 등의 말은 일언반구도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 그것은 이미 <전단계>이기에!
지금은 그 때를 훨씬 넘어 <최종 단계>다!
언제까지 제자리 걸음만 되풀이하려는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하나님의 영원하신 계명 곧 가장 이상향적 삶을 약속하여 지향하는 생명의 법칙 다시 말해 더 다시는 자아중심이 아닌 상대방 중심의 사랑으로 "하나"됨 즉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함>ㅡ요 10:30/고전 6:17/고전 7:4)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주님과 내가 명실공히 하나, 한 영됨으로써).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법칙)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마 5:16-18).

이런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실현 가능한) 이상적인 삶의 방법은 지금까지 그 어느 세상 철학도 종교도 가르쳐본 역사가 없으니 이유인즉 "3위1체"의 오묘한 이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 "머리"로서의 창조주 하나님 아래 모두가 그 "몸"의 "한 몸"("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이니"ㅡ고전 12:26) 역할을 하게 되면 각자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대신 사람마다가 다 나를 위해 주는> 구조/체제인지라 모든 사람이 마치 나 자신처럼 되어 나를 위해 주므로 이보다 더 이상적 삶은 없는 것.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불가결성은 여기서도 훌륭히, 완벽히 입증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렇게 만인간울 품어 주는(3위1체의 생명의 법칙의 근원이 되심으로써) 하나님이 없이는 이상향적 삶이 도무지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 이같은 이치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김으로써만 각자 자기 모든 이웃을 예외 없이 사랑하여 섬길 수 있기에. 바로 이런 이치를 바벨론 신학은 말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부터 거짓말로만 일관했기에. "구원"과 "사랑", "영생"은 말만 했을 뿐 이런 "하나"됨은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선을 행함"(롬 2:7)은 일절 배제했기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들로 너희 착한 행실(생명의 법칙을 사랑하여 나타내는ㅡ사랑의 하나님을 현실적으로 입증하는)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ㅡ이렇게 명령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임이 명백하고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라 못을 박으셨는데 대관절 무슨 재주로 천국에 가려는가? 



2025년 12월 16일 화요일

여고보(약 2.2~9), 요한(요일 3.18), 바울(고전 16.14) 모두가 강조한 것은 사랑(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과 '행함'과 '구원'ㅡ고로 이제는 더 이상 헷갈리지 마시기를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과 '행함'과 '구원'



○●●●   <구원>이 무엇이냐   ●●●○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으니(디도서 3.5)



○●●●  이 구원을 <믿어야>   ●●●○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다(3.8)



○●●●   그러나 말로는 믿는다 하나 행위로는 <믿지 않으니>(하나님을 시인하지 않고 부인하니)   ●●●○

저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않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1.16).



○●●●   그러므로 결론은, "행함(행위)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아아 허망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20).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 존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인간 창조와 함께 인간에게 주신 계명이니 이는 성자이신 주님께서 성부이신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지키시는 "계명"과 동일한 3위1체의 기본 틀에서 준수하게 되어 있는 생명의 영원한 법칙을 말함ㅡ요 10.18)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자아중심이 아닌 상대중심의 자기 부인에 의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병'을 이루는 "하나", "한 영"ㅡ요 10.30/고전 6.17)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음>"(롬 2.6~13)에 있어(1.16).  ●●●○



○●●●   따라서 이 글을 마무리 지으면, 아담 범죄로 죽은 자가 되었으니 가장 먼저 산 자부터 되어야 했었고, 이 목적으로 새로이 창조됨이 "구원 받는" 것이며, 이제는 산 자가 되었으니 산 자로서 마땅히 생명의 법칙을 지켜야. 아담이 이 생명의 법칙을 지키지 않아 죽은 자가 되었고 천사가 범죄하여 악령이 되었으므로.

이 생명의 법칙은 이제 구원된 우리에게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라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모든 것을 하고"("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ㅡ고전 10.31), 주님을 섬겨 주님의 말씀대로 삶을 영위함인데("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ㅡ골 3.17), 어찌 그 모든 것이 "선을 행함"(롬 2.7)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선한 행위가 아니면 그럼 악행이란 말인가.  ●●●○

2025년 12월 14일 일요일

항상 대면하는 사람 어느 누구보다 더 가까우신 사이

"하나님"이시라 하면 우선 인식이 "볼 수 없다"는 것만 머리에 박혀 있어, 애매모호 막연한 인상으로만 남기 쉬우나, 이는 크나큰 착각입니다. 성령으로 계시기에 말 그대로, 문자 그대로 365일 24시간 내 앞에, 옆에 "사랑의 하나님"(요일 4:8,16)으로 계심인데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사람이 되어 계신다는 사실을 왜 마음에 두지를 않는가요? 사람이 되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바로 '성부 하나님'의 "형상"(고후 4:4/골 1:15)이시라는 성경 기록을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요? 아들께서 아버지의 형상이시기 때문에,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건만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 인간은 보았고, 그리하여 24시간 사람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서 대면/對面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가 아무리 가까워도 이 정도로 가까이할 수 있으며 가깝게 될 수 있나요?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지만, 그래서 육체로서의 사람 몸이 되시어 육체로서 누구나 뵐 수 있으나,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 즉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기에 성부 하나님과 "하나"(10:30)되심이 영원불변이시라 사람-하나님, 하나님-사람으로서 유일하시다는 차이뿐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계셔도 이런 유일무이의 특이성 때문에 <육체로 내 앞에 계심>과 똑같고 그냥 보이지 않는 영으로만 계심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신 것입니다. 미시세계에서 파동성과 입자성이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둘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법이 없고 둘 중 어느 하나만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 이 "하나"됨의 특성이기에 성부와 성자 관련해 이상과 같이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성자 하나님의 육체로서의 사람의 모습 그대로이시라고ㅡ.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분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라 아멘"(딤전 6:16). "하나님은 <영>"이시라 할 때와 천사는 "부리는 <영>"(히 1:14)이라 할 때의 개념 차이는 엄청난 것이니 창조주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은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피조물에게만 한정되는 특성일 뿐입니다. 창조주께는 전연 해당되지 않습니다.

단 성부 하나님 홀로 계심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을 낳으시어 두 분이시지만 "하나"로 존재하시는데 인간 창조에서 불상사가 야기되어 인생들이 죽음의 폐기물이 되어버리자 성자께서 부득불 피조물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피조물 중 하나처럼 되어 있으시니, 그래서 만유의 기본 원리인 '3위1체'를 따라 성부 하나님 또한 친히 "형상"을 취하시게 되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모습 그대로이시다"의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설/假說도 아니고 실제 상황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적지 않은 위로의 은혜를 받습니다. 온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 각자 손을 내어밀어 잡듯이("곧 거기서도 주님의 손이 저를 인도하시며 <주님의 오른손>이 저를 붙드실 것입니다"ㅡ시 139:10). "제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니 주님께서 <제 오른손>을 붙드셨습니다"ㅡ73:23).

"주님과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ㅡ행 20:28)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7-20). 생명의 법칙은 영원히 상대성의 동시성임니다. 일방적이 아님을 항상 명심합시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한 주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으나 사랑치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자기를 속임이 문제

혹자는 말할 것입니다. "사탄이라는 피조물이 제가 무엇이라고 전쟁에서 패해 땅으로 영구 추방되었다고 해서 그런 재앙을  일으키며 분노를 발산시키느냐"라고. 지금껏 강조했듯이 인간 자체가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라 즉 심히 나약한 동물성 육체로 전락했고 게다가 사탄이 아담의 인간 세상 통치권을 아담 대신(아담으로부터 넘겨 받아) 행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원리원칙을 따라 우주를 관할하시지, 일시적 기분(감정)에 좌우되어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한 핵심입니다. 따라서 인생 구원도 아담의 범죄의 보응으로 된 형벌 차원이기에, 형벌은 형벌대로 시행하시면서 무한 자비와 은혜를 베푸셔야 하므로 친히 사람되시어 우리 위해 죽음의 고통을 맛보시는 지경에까지 이르신 것.

그러므로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성급하게 판단하여 자취/自取하는 어리석음이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씩 인도하심 따라 한 발자국씩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앞서거나 초월하는 피조물의 역량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당장 보기에는 석연치 않게 나타나도 결국 지나놓고 보면 찬양과 감사 밖에 없는 법이니까.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이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런 신뢰 없이 무턱대고 오만한 생각을 품음으로써 악령 사탄의 범죄도 인간의 파멸도 발생한 것이므로 우리는 이를 거울 삼아 스스로를 단속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언 4:23) 하였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라"(고후 10:5) 한 것이니 끊임 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의 <인자(goodness>와 <엄위(severity)>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될 것이다"(롬 11:19-22).

"항상 복종함으로써(성경을 통하여 나타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성경은 경고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요일 4:8,16)이시지만 동시에 3위1체의 하나님으로서 상반/相反이시기에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시라 그렇습니다. 

2025년 12월 13일 토요일

21세기는 천사의 복음에 의한 교회 최종 연단의 때



왜 "천사가 복음을 가졌다"(계 14:6)고 했을까, 복음을 천사의 활동과 관련시킨 것으로는 이 외의 성경 다른 부분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지금의 "마지막 때"와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계시록 14장 앞 13장에서는 적그리스도("짐승"으로 표현되어ㅡ네피림으로서 악령의 '씨'이니까)의 출현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고로 이 21세기 사건임은 명백합니다.

기록된 순서가 반드시 시간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설명상 그렇게 앞뒤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하늘의 전쟁"(12:7)에서 미가엘이 통솔하는 천사 군단이 사탄 일당을 상대하여 일대 접전을 벌였다는 기록도 마지막 때의 예언서인 계시록에만 나옵니다.

따라서 사탄이 대패하여 그 악당 떼거리가 항구적으로 천상으로부터 추방 당하는 광경이 역시 묘사되어 있는데, 바로 1908년 6월 30일의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 사건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는 세상 사람에게는 "퉁구스카 대폭발(tunguska event, tunguska explosion)"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그 후로 1백년 넘게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 대충돌의 원인이 과학적으로 규명된 바가 없고 뿐만 아니라 당시 이를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길다란 전신주 같은 것이 지상으로 내리꽂히는 것이 보여졌으며 두 눈이 퉁방울 같이 거대한 용이 흐느적거리며(인터넷 검색에서 확인됨) 공중 높이 지나갔다는 진술이 있어 확인되는 까닭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연 성경에 예언한 대로("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 것이다.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ㅡ계 12:12), 1908년 이후 연속되는 대재앙들이 또한 그 증거입니다. 1917년 시작된 소위 "공산주의 혁명"의 난동으로 희생되거나 숙청된 사람들, 그 외 기아, 강제 노동, 처형, 추방 등으로 인한 사망자를 모두 포함하여 수천만에서 최대 1억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공산주의 흑서"(The Black Book of Communism)에서는 약 9,4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독감(1918~1919)으로 2천만 명에서 최대 5천만 명(일부 추정치는 그 이상)이 세계적으로 사망했고,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서 약 1,500만 명에서 2,200만 명의 사망자, 제2차 세계대전(1939ㅡ45)에서는 홀로코스트와 원자폭탄 투하 등 포함해 7천만~8천5백만 명의 사망자. 소련 대기근(1932ㅡ33)에서 최소 500만 명 이상, 중국 대기근(1959ㅡ61)에 2천만~4천만 명의 추정 사망자라고 합니다. 그 외 간헐적으로 일어난 대소 사건 사고까지 합치면 실로 "땅과 바다는 화 있을 것이다" 한 그대로입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미루어 볼 때 지금이야말로 "내 백성아, 거기서(바벨론에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였다"(14:6,7)ㅡ이 메시지의 때가 바로 지금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음 단계>는 바벨론 심판으로서 각종 재앙이 닥치고("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이다 하더라ㅡ14:8), 그 <다음>이 악한 자 곧 적그리스도 출현입니다("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ㅡ14:9).

또 하나님 백성들에 관해서는,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지금 이후로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 하니,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다 저들의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니 이는 저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다' 하셨다"(14:13) 함이 이루어지고, 또한 "짐승 앞에서 이적을 행하는 거짓 선지자"(19:20)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는"(13:15) 사태가 일어날 것입니다.

계시록은 또한 이 때를 가리켜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추방된)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는다"(계 12:14) 했는데, 천사가 다니엘에게 말해 준 그 "하나, 둘, 반"이란 특이한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 21세기 하나님의 교회 연단은 "천사의 복음"이 그 주축을 이룬다고 할 것입니다. 

2025년 12월 12일 금요일

천사의 복음과 바벨론 신학 그 구체적인 핵심적 차이

야고보서는 평이/平易하게 아주 쉽게 성경을 풀이합니다. 아래와 같은 대목이 그러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아래 요한의 지적도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 사랑치 않는(사랑의 행위가 없는) 자는 사망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다"(요일 3:15).

즉 믿음은 마음으로만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몰라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다가 이제는 알았으니(믿었으니) 당연히 순종하여 악(나쁜 것)이 아닌 선(좋은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함이란 뜻입니다. 바벨론 신학 곧 사탄의 거짓말은 이러한 믿음=순종=행위라는 너무나 상식적인 것도 말끔 지워버린 것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지 행함으로 얻는 구원이 아니라"면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는, "믿는" 자가 그러하다는 주님의 말씀이신데("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다"ㅡ요 5:24), 이를 요한이 다시 설명한 것입니다. 즉 믿으니까 순종의 행함으로 그 믿음이 드러난다는 의미인 것.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인데 그 <믿음이 순종의 행함으로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너무나 상식적인 이치도 그 옛적 에덴에서처럼 사탄은 바벨론 신학의 황당무계의 거짓말로 뭉개버린 것입니다. 논리에도 맞지 않는 속임수임이 뻔하건만 먹혀들어가니 놀라울 뿐입니다. 이는 아담의 죽음을 "영적"이라고 둘러대는 것과도 관련됩니다. 무척이나 알쏭달쏭한 얼버무리기 표현으로 거짓말의 고수나 즐겨 쓰는 수법의 주절거림입니다.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 율법을 행함(순종)으로써만 의롭게 될 수밖에 없었던 모세 시대 개념을 억지로 갖다 붙인 횡설수설의 넌센스입니다. 은혜 시대에 왔으므로 아무도 율법적 행함을 들먹이는 자가 없는데도! 아무리 바벨론 신학자라도 이다지도 분간을 못한단 말인가요!

"선을 행함"("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ㅡ롬 2:6,7)은, 창조 이래 모든 삶의 기본 자세인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럼 악을 행하란 말인가요. 미워하고 강탈하고 도둑질하면서 삶을 영위할 수 있나요.
 
그러하나 아담 범죄로 돌연히 동물성 육체 즉 자아중심의 "죄의 몸"(롬 6:6)이 되어버린 결과로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게"(3:10) 되렇듯 "죽은 자"(마 8:22)는 산 자부터 되는 것 즉 새로 창조됨(성령으로 다시 남)이 시급하고 최우선 순위입니다. 우리의 "구원 받음"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구원만 받으면 무조건 영생 복락이 아니니, 천만의 말씀! 이제야 비로소 <산 자로서의 선을 행함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그 뜻일 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롬 8:2)되는 것부터가 시급했었는데 이제 해방된 것입니다. 성경이 설명하는 바가 바로 이 의미입니다.

"율법(선행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계명/"하나님의 뜻"ㅡ마 7:21)이 육신("죄의 몸")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죄와 사망의 법" 즉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옴으로써"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세!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했었던ㅡ롬 7:23,24) 그것을 하나님은 (해결)하심입니다.

곧 죄(자아중심의 동물성 육체 때문인)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을 단죄하심으로써(사형에 처하시어ㅡ우리 위한 죽으심) 이제 이 육신(저아중심의 죄의 몸)을 따르지 않고(주님의 이 죽으심이 내 죽음 즉 나와 함께 하나되어 죽으심이라 내가 죽었은즉) 그 영(성령)을 따라 행하는(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써 문자 그대로 주님과 "하나", "한 영"됨으로써 다시는 자아중심이 어닌 상대방중심, 하나님 중심이기에ㅡ요 10:30/고전 6:17)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이 사탄 지배하의 악한 세상에서 "참고 선을 행함"ㅡ롬 2:7)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3,4)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 받음"은 하나님 앞 <산 자>로서 마땅한 <사랑과 순종의 "선을 행함"으로써 영원무궁 삶을 향유함에 있는 것이지, 그냥 무턱대고 영생 누림이 아님(선행이든 악행이든 무조건 죽지 않고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을 말함이 아닌)을 명확히 다시 밝히는 바로서 재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 받은 증거, 그 열매가 무엇이냐 물을 때 서슴지 않고 나오는 답변이 자아중심이 아닌 하나님중심일 수밖에 없는 "참고 선을 행함"(롬 2:7)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선행의 결론이 "영생"(:7,10)입니다.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6:22) 한 그대로입니다.    

무지의 암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해방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신성한 역할에 충실해야 할 때

더 이상 바벨론 신학과 바벨론 교회의 종살이에 매여 있지 맙시다. 사탄의 멍에일 뿐입니다. 왜 에덴을 자연계 동산이라고 부질없는 고집을 부리시나요? 에덴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있어("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ㅡ창4:16) 그것이 근거라고요?


"에덴"아라는 말이 금기어가 아닌 이상 아담 부부가 에덴에서 쫓겨나 그 옛 추억의 황금 복지 에덴을 그리면서 얼마든지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지 않나요? 그것도 무슨 잘못인가요? 에덴의 강 이름 유프라테스(현재의 메소포타미아 강)도 마찬가지입니다("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ㅡ창 2:14). 지명만 아니라 강명도 얼마든 이름 지어 부를 수 있지요.

성경(구약)은 분명히 에덴을 "하나님의 동산"이라 못박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우셔서 자연계 동산을 "하나님의 동산"이라 하시겠나요.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으니"(이사야 51:3).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뭇가지"(에스겔 31:9).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움으로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다"(에스겔 28:13,14). "두로왕/"을 타락한 그룹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자연계 동산에 무슨 영물 그룹(cherub)이있답디까?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스랍을 상징함인 듯)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3:24) 했는데, 천사도 아닌 막강한 스랍/그룹을 동원하심은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이 인간 관련해 협잡질을 못하게 아예 차단하심입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에덴 족속"(왕하 19:12)도 있고 사람 이름도 있다고 해서("요아의 아들 에덴"ㅡ대하 29:12) 성경의 에덴이 실제 자연계 동산이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앞서의 설명대로 스랍과 그룹이 진을 칠 수 있는 영계(초자연계)가 에덴 동산인 것입니다.

이 세계가 대칭성으로 양립하는 양면의 세계임을 알려야 합니다. 보이는 가시적 물질세계뿐인 줄 착각하는 미망에서 세계 사람들이 벗어나도록 하는 선각자 구실을 합시다. 악령들의 농간으로 너무 무식 무지의 어두움 가운데 방황했습니다. 

2025년 12월 11일 목요일

아직도 구태의연한 바벨론 신학의 복음 아닌 복음을 말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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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 모두 죽은 자들이니까 산 자가 되도록(산 자로 복귀되도록) 복음을 전파하라 하셨는데 왜 "너희(구원된)는 <죽었고> 너희 생명이 주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 했는가? 왜 또 "죽었다"고 말하느냐? 아담 범죄로 인해 신령한 몸을 잃어버려 하나님이 애당초 산 자로 창조하셨던 그 창조된 인간이 아니기 때문.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닌 두루뭉술 어정쩡 어중간한 상태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산 자가 아니면 죽은 자일 수밖에 없기에. 이렇게 아담이 범죄로 죽음으로써 이전의 그 신령한 몸을 잃고 현재와 같은 동물적 육체로 남아 있기 때문에 "죽은 자"라 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고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신령한 몸 즉 완벽한 육체로써 살지 않는 한 절대로 "산다"는 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연속일 뿐이니 우리도 이제부터는 이런 인식으로 시종일관하기를 요구하심은 당연하십니다. 동물이야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생명이기에 죽는 것과 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생명이지만 인간(아담)은 처음에는 동물성 육체를 바탕으로 "하나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으나 다음 단계로 실제 하나님의 형상답게 영생하도록 영혼을 다시 조성해 넣으셨기(아담의 코를 통해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때문에 신령한 몸이 아니고서는 '사람'이란 요건에 들어맞지를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도 애초 창조된 사람의 형상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한 번 태어났다가는 죽는 존재이므로 도저히 원래의 "사람"이라 할 수는 없고 그 대신에 "죽은 자"("산 자"가 아닌)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강조하지만, 현재의 인간을 우리는 "죽은 자"라는 수식어를 꼭 붙여 사용하는 것이(주님 친히 본을 보이시어 말씀하신 것처럼ㅡ마 8:22), 이 "천사의 복음" 시대인 21세기 우리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땅히 견지할 온당한 자세라 할 것입니다.

21세기 전도법이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왜냐면 이렇게 강조하면 듣는 이마다 황당하다 싶어, "당신 미쳤어? 왜 멀쩡한 사람을 두고 죽었다고 해?" 하고 그 이유를 묻개 되고 자연히 전도의 대화는 시작될 테니까. 우리는 또 진실 그대로를 피력함이니까 꿇릴 이유도 없습니다. 이 중요 핵심 진실을 혼자만 알고 전달하지를 않는다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다"(고전 9:16) 한 바울 사도의 말 그대로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21새기 복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영생하도록 만드셨다 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고/人間苦에 대한 완벽한 설명의 답변이 되니까 바로 "천사의 복음"(계 14:6)이요 이제까지의 바벨론 신학의 어처구니 없는 "영적 죽음"이란 궤변을 단번에 격파하는 철퇴가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 어버이 자정의 하나님이신데 이렇게 이유 없이 육체적 고통 중에 인생을 방치해 두실 리가 있나요? 일론 머스크를 위시해 많은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 아닌가요? 입을 닫아 둘, 도리어 이 질문 앞에 쩔쩔 맬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는 새로 등장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부터 전파되었던 것이나 사탄이 초능력의 세상 지배권(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넘겨 받은"ㅡ눅 4:6,7)으로 재빨리 손댐으로써 감추어졌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했던 바울 사도 생전에 그 지경이 났으니 하물며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말해 무엇하리!

그러고도 2천년 세월이 지났으니! 이것이 세상 실상입니다. 세상을 제멋대로 주물러놓은 것입니다. 성경에 무식한 사람들은 "하나님 통치하는 세계인데 감히 피조물 사탄이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에 손대다니" 하고 철부지 소리만 하겠지만, 손댄 것이 아니지요. 에덴에서처럼 거짓말을 해놓고 꼬드긴(여자를 꼬드긴 것처럼) 것이고 세상은 여자처럼 넘어간 것입니다.

약해서가 아니고 악해서입니다. 약한 것은 악한 것으로서 성경은 규정합니다. 허물과 불찰은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정확한 진단이십니다. 인간을 약한 자로 만드신 적이 없으시니까. 언제나 자아중심에 휘말려 지내는 것이 그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련해서는 게으름도 자아중심이요 무식무지도 자아중심이 그 뿌리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소리를 꺼낸 적이 없는데 새삼스레 '영생하게 되어 있었던 아담의 신령한 몸, 운운' 하면 이상하게 들리지 않겠느냐?" 하고 이 내용으로 복음을 말하기를 꺼린다면, 분명히 단언컨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게 되리라"(마 10:33)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입니다. 이 내용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신지 아닌지 그것만 각자 자기 심중에 판단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확실하면 지체없이 목숨을 걸고라도 그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막 8:38) 하신 말씀과 같은 결과로 되어질 수밖에 없을 터이니까. 이 "천사의 복음"이 진리라는 증거는 이와 관련된 그 증표에 있으니 다름아닌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계 12:14)가 그것입니다. 이 도식/圖式 따라 3운법칙, 3위1체 등이 밝혀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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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최고 으뜸의 낙을 삼아 "항상 기뻐함"(살전 5:16)이 나의 힘/운동력(느헤미야 8:10)

하나님을 최고 으뜸의 낙을 삼아 "항상 기뻐함"(살전 5:16)이 나의 힘/운동력(느헤미야 8:10). "아버지 품속"(요 1:18)의 의미.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신다"(요 8:29).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 상대성의 동시성입니다. 하나된 둘은 함께 동시에 움직임이 그 하나됨의 특징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은혜인 줄로만 착각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거저 은혜로 선물로서 믿으면 되는 구원으로만 생각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주의에 흘러 우리 구원을 우리 자신 스스로가 망칠 뻔한 것입니다.


물의 성질 그리고 그 생명은 흐름에 있어 흘러 보내지 않으면 고여 썩게 마련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은 모름지기 흘러가는 데가 있어 그리로 방향을 정하듯이 그래서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듯 
나 쪽으로가 아니라 항상 나 밖의 상대방 쪽을 택하여 일향/一向 일진/一進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도 항상 상대방중심입니다. 이를 생명의 법칙이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3위1체 법칙에서의 "3위"적 작용 즉 "하나"됨(사랑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이제까지 그저 막연히 사랑은 사랑일 뿐이라고만 인식해 왔지만, 이와 같이 엄밀히 법칙임이 명확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어느 것 하나 빈 틈이 없고 아리송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원리원칙대로 하시니까 우리도 100%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 앞에서 만인 균등입니다. 여기 진정한 자유가 깃듭니다.

물론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요일 4:19)입니다. 주종 관계이니까. 본을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어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심이니"(요 5:19) 하심과 같습니다.

노동을 해도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상대(남)를 위함입니다. 모두가 다 그러하니까, "우리"를 위함입니다. 공산주의(인류의 오랜 염원/숙원으로 인식되어)가 이상은 거창하게 보였지만 실패한 것이 이같은 공동체 의식 결여에서 온 것입니다. 3위1체에서의 핵심되는 부분으로서의 "하나"(요 10:30)됨에 대한 무식무지 때문입니다. "한 몸"의 원리에서 보듯이 갑은 을의 것, 을은 또 갑의 것이 되는 이치를 간과함입니다.

이것이 짝을 이룬 둘의 "제3위"로서의 관계 형성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갑 안에 을이 있으면 을 안에 갑이 또 있어 갑의 것은 을의 소유이고 을의 소유는 갑의 것입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설명을 해 오신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14:10)이라 하셨고, 또한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17:10)이라 하심이 모두 이 대원리를 말씀하심입니다.

나만 구원 받으면 끝난다는 자아중심에서 이제는 탈피해야 합니다. 애당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 창조주 아래에서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머리로 모셔, 만민이 그 몸의 지체로서 평등하게 소중한 한 부분씩 이루어 있음을 말함이니까.

여기서 만인 구원설을 피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이요 그 뜻을 따르지 못함으로 현재의 비극이 빚어졌은즉 본시 형태로 돌아가자는 호소인 것입니다. 자아중심을 버리고 너나 없이 상대방중심인 생명의 법칙에 순응하자는 아주 단순한, 누구나 이해하기에 어려울 것이 없는 구체적 방법론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오셔서 확립해 주신 영원 불변의 것으로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 하신 그대로입니다.




2025년 12월 10일 수요일

우리는 "죽은 자", "죽은 자", "죽은 자"들

 


영혼은 신령한 몸에 있어야 당연한 정상이 아닌가


 

세상을 죽은 자들의 세계로 보지 않는 한 구원의 여망은 없다



한 서기관이(마 8:19) "선생님, 어디로 가시든 제가 따르겠습니다" 하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먼저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눅 9:57-62) 하므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어떤 이가 "제가 주님을 좇(따르)겠습니다마는 먼저 제 가족을 작별케 허락해 주십시오" 하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저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ㅡ세상 모든 인간을 "죽은 자들"이라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을 창조하실 리 없습니다. "영적 죽음"이라는 어슬픈 따위 의미로는 단 한 마디도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면 결론은, 아담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롬 5:12) 것인즉, 현재의 이 동물적 육체가 죽음이고 그래서 모든 인생을 "죽은 자"라 하신 것입니다.

인간을 친히 지으셨던 창조주께서 하신 설명이십니다. 인간을 처음부터 죽지 아니하는 몸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이런 동물적 육체가 아니라 아담이 신령한 몸이었다는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령한 몸을 잃고 전연 생소한 동물적 육체이다보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여우나 새는 원래부터 동물로 살도록 창조되어 그렇게 안정되어 있지만, 인간은 신령한 육체였다가 돌연변이로 동물성 육체가 되니 어색하고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설명은 확실하게 나온 것입니다. 이런 죽어 썩어 없어져버리는 동물적 육체로 "산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말고 현재 죽은 자이니 무조건 "살고부터" 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으로서의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입니다. 다른 것은 일절 여유 부릴 건더기 하나도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다섯 마디뿐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모두의 지금 현주소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그렇고 이제 비로소 눈을 뜨게 된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이 그렇습니다. 이외 한눈을 팔면 하나님의 진노 밖에 없어요. 왜 그러냐,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원래 뜻이 완전히 망가져 내려 하나님 인상을 철저히 구겨놓은 것이 인간 자신인데 이틀 안타까워하고  그 복구에 전념하느라 눈코뜰 새 없어야 하는 북새통임에도 이 박살이 나 산산히 흩어진 사금파리(사기그릇의 깨어진 작은 조각)를 쓸어 담아 놓고, "에헤야디야, 살 맛 나네" 키득거리며 강강술래 도는 꼴사나운 작태이니까! 목놓아 울어도 시원찮은 판에!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시 126:6). 지금은 울 때입니다. 울며 복음의 씨를 뿌릴 때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첫째기도와 둘째는 복음 전파, 그리고 동병상련의 구제(함께 나눔) 이 셋 밖에 없습니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당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 혼자 배 부르면 그만이라는 안일에 젖은 자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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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영적 전쟁의 속성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생각의 바탕)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다"(잠 4.23). "생명의 근원"이 마음의 생각이니 우리는 이 문구를 금지옥엽/ 金枝玉葉 처럼 속에 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