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9일 토요일

21세기 "천사의 복음"의 핵심은 "3위1체"에 있어


글을 올리기 전에, 전에 한 번 얘기를 했지만, 필자의 한자 사용은 습관이 되어서가 아니고 한자의 유사 발음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한글 전용의 우리나라 학생이 일본, 중국 등의 학생보다 문장 독해력(이해도)이 상당히 뒤쳐진다는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에서 일단 손실입니다. 글 쓰는 사람 처지에서도 보통으로 느끼는 당혹감이 아닙니다. 그래서 문장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부득불 쓰고 또 그렇게 쓰다보니 어떤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고 싶을 때 내친 김에 또 쓰기도 합니다. 양해해 주시기를.

오늘날 전도는 성경도 허나님도 모르는 이들을 상대함과 더불어, 믿는다면서도 자기 몸이 성령의 성전이 되어 있지 않아 뜬 구름만 잡듯 하는 이름먼의 "기독교인"들 대상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의 바벨론 신학과 달리 모든 점에서 면모를 쇄신한 "천사의 복음"들 전해야 하기 때입니다. 이 21세기 천사의 복음은 강력한 "21세기 표적과 기사"가 그 배경임을 알리면 말씀을 듣는 자에게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만유의 기본 원리로서의 3위1체 바로 그 도식을 천사가 오늘날을 직접 예고/豫告하며 다니엘에게 2,500년 전 알렸던 것이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이기에, 이는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역사적 중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 역시 21세기 지향/志向 예언서답게 이 기이한 <문자화/文字된 도식>을 성령의 감동으로 역시 함께 전달하고 있습니다(계 1214).

"이는 힘으로 되지 않으며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성령)으로 된다"(스가랴 4:6) 하신 첫머리 말씀대로 성령께서 이 대목의 주제/主題이십니다. 지금까지 "3위1체"라는 말은 많았으나 정작 그 뜻이 어떻게 되는지 몰랐으니, "바벨론 신학"에 철저히 가려졌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셋이 되실 리는 만무하다고 해서 그냥 <3면(세 모습을 지니신)의 한 분 하나님> 정도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어렵기만 하다"는 사탄의 부추김에 장단만 맞추는 꼴이 되는 슬픈 현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 그대로의 뜻일 뿐입니다. 장차 닥쳐야 실감할 수 있는 예언적 성격의 말씀을 제외하고는.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낳으셨다"고 성경에 명시된 그대로 하나님은 모자(부모 자식) 관계로 존재하십니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요 14:28) 하신 대로입니다. 단, 둘로서 계시지 않고 문자 그대로 "하나"(10:30)로서 계시기 때문에 이 이치를 만유 창조와 운영의 기본 원리로 삼으신 관계로, 마귀는 이 핵심 진리를 여러 거짓말로 감추려 했던 것입니다.

상보성 원리에서 닐스 보어(1885-1962)가 갈파함으로써 상반/相反은 상보/(CONTRARIA SUNT COMPLEMENTA)라는 유명 문구에서 드러나듯 인과율/因果律이 입증되어(파생자와 피/파생자의 관계) 이 특이한 3위1체의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까지 약방의 감초처럼 마귀가 써먹어 왔던 무신론, 회의주의 등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게 되는 까닭입니다. 최고 원인으로서의 창조주가 입증되시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인과율 붕괴 가능성"을 말하는 이들은 예컨대 양자역학에서 매우 미시적 영역에서는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사성 원자의 붕괴는 <예측 불가능한> 확률적 현상으로 나타나 인과율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보인다고들 합니다. 또 특수상대성 이론에서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은 인과율을 위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특정 사건에서 <인과관계의 뒤바뀜>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두 경우 다 "상반'이 되어 있는 둘이 "상보'가 됨 더 정확히 간단히 말해 짝을 이룬 둘이 <둘>로서가 아닌 <하나>(요 10:30)로서 존재함 즉 "3위1체"의 근본 이치를 외면함에서 오는 혼돈일 뿐입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다룸도 아니고 "특정 상황에서의 다른 원리가 적용됨"도 아닌 것입니다. 

21세기 "천사의 복음"이라는 천사들의 획기적 거사/와 용단/勇斷에 의해(하늘 전쟁에서의 승리로 악령들을 제압하여 더 이상 거짓말로 인간 세상을 농락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ㅡ계 12:7-9) 모든 막혔던 물꼬가 트이게 된 오늘입니다. (진리가 드러났다뿐이지 사탄의 거짓말이 이제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님).

사탄이 이렇게 세상을 장악하게 된 것은, 아담 스스로 불러들인 화근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따르기보다 사탄의 거짓말에 더 복종해 그를 경배한 꼴이 되어, 연약해 빠진 동물성 육체가 됨으로써 막강한 신령한 몸을 박탈 당하자 벌어진 (종전까지의) 위계질서의 비극적 전복/顚覆 내지 도치/倒置 결과인 것입니다.

즉 아담 아래 있던 영물들이 일부 하극상을 함으로써 아담을 시해/弑害한(아담이 사탄의 거짓말대로 따른 결과 죽은 자 곧 동물적 육체로 돌변하여 종전의 신령한 몸을 상실했으므로) 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사탄 및 그 아래 악령들의 인간 세상 지배는 <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에서 요지부동이었는데, "마지막 때"를 당해 "마지막 아담"의 등장을 계기로 비로소 천사 군단이 행동할 여유가 생긴 까닭에, 그나마도 힘 겨루기를 통해 이겨야만 가능한 까다로움을 천사들은 극복한 것이니 이것이 21세기 "천사의 복음"(계 14:6)의 시동/始動입니다.

이런 사실 즉 사탄의 이 세상 지배를 모르니까 바벨론 신학의 정체를 알 리가 없고, "하나님 창조하신 세상에서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 말씀에 거짓말 같은 것으로 손대랴" 하며 사탄이 대놓고 세뇌시키는 대로 허무하게 맹종했던 것이 오늘날과 같은 파탄을 낳은 것입니다. 이제는 시급히 깨어날 때입니다.

사탄이 나꿔챈 통치권은 하나님의 이 세상 지배가 아닌 세상 모든 피조물의 수장/首長/으로 세우신 아담의 인간 세상 지배권("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ㅡ창 1:26)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사탄의 왕국이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현세의 삶)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요일 2:15).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요 12:25)이라고 엄중 경고하신 이유입니다. 소위 "기복 신앙" 즉 하나님 축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은 멸망의 확실한 지름길 외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 주 예수님께,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당신에게 줄 것이니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인즉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는 고로 당신이 내게 절하면(나의 자아중심을 따르면) 다 당신 것이 될 것"(눅 4:5-7)이라 했던 근거이기도 합니다. "나의 이 뜻을 거스르는 그 누구든 이 세상에서 결단코 볕 볼 날이 없을 뿐더러 그 정반대인 고통 고난뿐임을 각오해 두라"는 당당한 위협("마지막 아담"에게 소속되어 이는 그 누구를 향해서든 할 수 있는)인 것입니다.

"하나님 축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산다"니 이것이 바로 "미친 마음"(전도서 9:3)인 것입니다. 구약(유치원생 수준의 예비교육)과 신약(성인으로서의 실생활)도 구분 못하는 무지 속에 갇혀 있음은 성경을 읽지 않은 탓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축복, 운운" 한다고 해서 "세상에서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헛소리'를 하게 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共用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행 4:32) 초대교회의 본보기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도 관심도 없다는 증거입니다.

"도둑질했던("도둑질하는"은 오역ㅡ개역한글)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했는데 가난 구제는 국가도 못당한다는 말도 있듯이 베풀다보면 나 자신 (이 세상에서) 호의호식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는"(히 13:3) 것이 마땅한 세상인즉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그렇게 나의 안위만 생각할 마음이 날 수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믿는 자의 공동체인 교회 내에서의 부자와 거지 행색의 여타 사람들을 빗대서 말씀하심입니다.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하셨으니까. 부자의 죄는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다"는 오직 그것입니다. 죄명은 이 세상에서 "위로를 이미 받아버렸다"(눅 6:24ㅡ"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는 것. 부유한 교회당을 번듯하게 세워 올리고 최고급 자가용을 자랑스럽게 굴리고 다니는 소위 "교역자"들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뒤쫓고 있으니 한시바삐 깨어나세요!

미국의 오랄 로버츠라는 한 이름 날리던 소위 "신유 부흥사"는 생전에 곧잘 하던 소리가, "나는 하나님의 축복 받은 증거로 일부러 자가용을 여러 대 구입하여 번갈아 타고 다닌다"였습니다. 당시는 미국만 해도 자가용은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냈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물성 육체로서의 만 가지 고초(인간고)에서 해방되는 것이 천국 곧 "신령한 몸"(고전 15:44)이자 "영광의 몸"(빌 3:21)으로의 복귀/復歸/입니다. 이것이 구원 받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않고 자아중심으로 자기 생각대로 했기 때문에 아담이 영생을 잃고 현재와 같은 동물성 육체가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구원 받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ㅡ마 7:21)에 있음을 확증적으로 단정하게 됩니다.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이 아니니 믿음으로서의 "은혜", "선물"은 우리가 아담 범죄로 모두 죽은 자가 되어버렸은즉 새 창조를 받아 산 자부터 되고보는 것이 급선무라 그렇습니다. 새 피조물로 거듭 난 다음의 단계가 필수이자 필연이니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 즉 순종 다시 말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은 무조건 "믿음" 일변도로만 끝낼 뿐인 사탄의 속임수인 것입니다.

아무리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 거듭 나고 새 피조물이 되었더라도 상대방중심/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아중심이면 그 나물에 그 밥, 그것이 또 그것이기에,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아예 임하시지를 않습니다. "성령으로 날"(요 3:5,6) 수가 없으니 한 마디로 불가능입니다. 이 자기 기만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받았음을 "확신한다"지만 허공에 떠 사라지는 메아리 같은 허무로 끝나고 있으니, 다시 자기를 살펴 여의치 못하면 새로 확실히 시작하시기를! 

2025년 11월 26일 수요일

스룹바벨 성전 건축의 21세기 예언

"내 백성아, 거기서(바벨론에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14:6).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성령)으로 되는 것이니"(스가랴 4:6).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너는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일 뿐이다. 그가 머릿돌(성전 건축에서 가장 아랫부분에 놓는 주춧돌로 건물을 받치는 가장 중요한 기초석)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으라' 할 것이다" 하셨고"(:7).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殿(성전)의 지대/
地臺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칠 것이다 하셨으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 것이다 하셨다"(:9).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건축에서 벽이나 구조물이 수직으로 똑바로 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10).

"내가 그에게 묻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입니까"(스가랴 4:11).
"대답하기를 '이는 기름 바르심(성경에서 기름을 바르는 주된 이유는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이나 성별된 장소를 구별하고 거룩하게 하기 위함)을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인, 소유주) 앞에 모셔 섰는 자이다'"(:1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줄 것이니 저들이 굵은 베옷(성경에 슬픔, 애도, 회개를 상징하는 거칠고 불편한 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할 것이다"(계 11:3).

위에 나열한 성경 구절을 종합하면, 이 21세기 "바벨론 탈출"(계 18:4) 및 이와 상대되는 "천사의 복음"(14:6)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바벨론 탈출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온갖 거짓맓>에서 벗어나 애초 초대교회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다시 복귀함을 말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이란, 메시야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 친히 가르치셨고 그 후 부활 승천하신 뒤 성령으로 다시 오심으로써(요14:16-18,23) 모든 진리(16:13) 가운데로 인도하신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으로 가르치심>의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12 사도들과는 일절 접촉이 없이(배운 것이 없이) 아라비아로 가서(갈 1:17) 거기서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동일하여, <성경을 통해(성경 외 달리 그 무슨 다른 방법으로든 아니하시고)> 충분히 모든 진리를 섭렵할 수 있게 하심이니 성령께서 친히 인도하시어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외면하고 다른 소위 "직접 계시" 따위에 빠져드는 순간 마귀의 사이비 이단에 빨려 들어가게 되고 지옥의 냄새가 진동하게 됩니다.

바벨론 신학에서 가장 독소/毒素가 되는 것은 <겉치레의 "구원 확신"> 즉 구원 관련한 일정 공식 같은 것을 만들어 남발하고 세뇌시켜 무더기로 자기 기만에 도취하도록 만듦에 있습니다. 무조건 교회당에 와서 "믿기만" 하면 장땡이라는 싸구려식 "영생 구원"입니다. 하나님 아들들로서의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순종을 "행함으로 얻는 구원"이란 기괴한 이유를 들어 배제시키고 "로마서 7장"을 믿은 후의 바울 자신의 개인 체험이라고 믿게 하는 등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 없이 무턱대고 "나는 주님의 피 공로를 믿으니까 틀림없이 구원이다" 하게 만들었고 오늘날 적그리스도의 때에 와서는 난데없이 "방언" 소동까지도 벌이며 "나는 성령 받았노라"는 자기 도취에 빠지게 만드는 사탄의 악랄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천사의 복음을 "스룹바벨의 성전 건축"으로 예고/豫告한 이유입니다. 이제 비로소 성령께서 계시게 되는 성령의 성전이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산"이라 함은 온 세상을 지배해 온 바벨론 신학을 말하고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 운운"은 그동안 이 거짓됨에 가려졌던 하나님의 복음 진리가 "천사의 복음"으로 오늘날 광명을 다시 발하게 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감람나무, 두 증인 등 "둘"을 새삼스럽게 강조하는데 성경 전권을 통해 보기 드문 것으로 "마지막 때" 예언서인 스가랴와 계시록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아 3운법칙 등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가리킴으로써, 오늘날 "천사의 복음"으로 나타나신 말씀의 시대적 배경을 특별히 강조하심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오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2025년 11월 25일 화요일

21세기 성경적 경고 (2)

"세상 삶을 철저히 부정/否定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로 오해할 것이 아니라 이제 알고보면 전혀 무의미한 동물성 육체에 의한 상상하기조차도 끔찍스러운 현재의 소위 "삶"에 매임으로써 영원한 영광의 찬란한 본격적 삶을 대신 놓쳐버린다면 그보다 더 통탄스러운 일이 또 있겠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경고인 것이다.


둘 다 누리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무리요 억지인 것이다. 때문에 헛된 것을 위하여 시간을 들이고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악한 것>으로밖에는 더 이상 취급되지 않음을 알아야. 사람들이 헛된 생각과 목표에 매몰되어 갈팡질팡하는 비극적 구렁창에서 그들을 구출해내는 일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 심히 바쁜 경황에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마음이 나누어져 성경의 경고대로 분산되다니! 시간을 낭비하다니! 절대로 용납될 일이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영원한 생명의 법칙에서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이요 시간과 정력 일체인데 마치 내것처럼 내 마음대로 하다니! 구원 받은 사람마다 성령의 선물을 받아 모신 순간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ㅡ요 20:21) 터에 더 할 말이 있으랴.

영원히 이전처럼 나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는 영원 세상이다. 자아중심의 세상은 이 한 때만으로써 영원히 끝나고 그 후로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불 못에서 고통의 비명을 질러대고 아니면 캄캄한 암흑 천지에서(시뻘건 불꽃만 한 곳에 이글거릴 뿐 그 주변은 전부가 칙칙한 암흑 천지이니까)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토해내며 슬피 울고 고통 중에 이를 갈아부치는 멸망 중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자아중심이다.

이런 자아중심의 현재 세상에서는 살고자 하는 자마다 나 자신도 자아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임을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자아중심은 멸망뿐이다. 이세상은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하는 것을 바울 사도는 "아내/남편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남편에게서 놓였느냐, 남편/아내를 구하지 말라, 아내/남편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물건을) 매매하는 자들은 매입해들인 물건이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는 말로써 표현했을 뿐이다.

종으로 있을 때 믿음에 들어왔다면 그 후 종에서 벗어나 자유할 수 있어도 그냥 종으로 지내라 한 것도 당시 노예가 들끓는 사회에서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활용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자유인으로서가 아닌 같은 종으로서, 더 친근하게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로지 사람들을 구원해내는 일에 물심 양면으로 쏟아 부어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고 구원의 복음 전달 그리고 구제 등 선행에 힘씀이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써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는"(고전 10:33) 것이 만사/萬事 그 표준 척도인 것이다. 이생에서나 내생에서나 항구불변의 상대방중심이다.

우리가 망각하기 쉬운 21세기 성경적 경고 (1)

여기 오늘날 우리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될 성경의 경고가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결혼하지 않은》나와 같기를 원한다. 그러나《강요함은 아니니》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어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전 7:7,8).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7:20).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주님 섬김에 이용하라)"(:21).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 "처녀《우리말 번역이 잘못되었으니, "처녀"가 아니라 남녀 불문 동정/貞(virginity) 상태를 의미》에 대하여는 내가 주님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님의 자비하심을 받아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는 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을 것이니> 나는 너희를 아끼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물건을)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다. 너희가 염려(심적 분요/갈등) 없기를 원한다(주님을 섬기는 일에).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노함이《"분요(심적 갈등)함이"의 잘못된 표기》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려 함이다. 누가 자기의 동정《"처녀 딸"이 아님》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여길 때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할 일이다. 이는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결혼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자기 동정을 지키기로》 마음에 작정해도 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자기 동정을 지키지 않음도 잘하거니와 자기 동정을 지킴은》더 잘하는 것이다"(ㅡ:38).

세상에! 자기 처녀 딸의 혼사/婚事를 부모가 결정 간섭하다니! "하나님 믿는 자들은 모두 이렇게 미개야만인의 생각도 하는 것들인가" 하지 않겠는가! 성경 번역자들이 이런 양식/良識 하나도 갖추지 못했으니!

성경에 "종으로 있을 때 믿음에 들어온 경우라면 향후 그 종노릇을 벗어나 자유인이 될 기회가 오더라도 그냥 종노릇을 계속하라는 뜻이니 자유인이 아닌 종의 신분이라는 부자유함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특수 상황을 고려함이 하나님 섬기는 자로서 충분히 고려해 마땅하다는 논리다. 이 세상 삶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 섬김이 구원 받은 자의 제1차, 2차, 3차 목적이니까!

필자도 이 성경 대목을 읽으면서 혼자 지낸다는 바울 사도의 논리에 동조하고 그래서 88년간의 "독처"로서 동정을 지키고 있다. 생활상 불편은 그렇다 치고 어쨌거나 오늘까지 왔는데 또 한 가지는, "바울 사도의 충심 어린 권고를 나도 교회 앞에서 한다면 바울처럼 자신도 그러해야 즉 솔선 수범을 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당장 적그리스도가 문 앞에 이르고 환난 날이 당시 코 앞에나 닥친 것처럼 얘기하니 혹자 이를 바울의 착각이라 탓할지 모르나, 바울 등 사도들의 서신이 성경으로 인정된 만큼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이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러한 경우 예언적 요소를 반드시 지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21세기 오늘날도 이 바울의 편지를 읽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일진대 우리에게는 딱 맞아 떨어지는 <예언>의 경고가 아닌가. 

먼저 <기도자>가 되지 않고는 <설교자>도 영적 놈팡이(직업 없이 빈들거리며 노는 남자)에 불과

 

(여기 "기도자"는 본격적으로 기도에 힘쓰는 자를 의미)




2025년 11월 24일 월요일

하나님 그리시는 그림으로서의 21세기 표적과 기사

 전에도 설명했지만 3운법칙, 3위1체 법칙(짝의 법칙) 등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그림 설명"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로써 천사가 다니엘에게 알려 준 3위1체 법칙 도식/圖式 자체가 그러하니까. 왜 "그림"이냐 하면 초등학생이나 그런 수준의 일반인에게 만유의 기본이 되는 엄청난 사실을 알림에는 단순한 그림 밖에는 없으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은 남녀노소 유식무식을 막론하고 만인 상대이니까! 인간 생애가 56, 57개 마디(절/로 나누어지는 모양새의 3운법칙 생애 도표도 훌륭히 그런 맥락입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천사의 말 자체가 회화/繪畫적인 기교/技巧인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21세기 오늘날 "천사의 복음"(계 14:6)을 상징하고 이와 직결됩니다. 이 검증 작업의 핵심은 초등생의 산술(셈하기) 수준이면 누구든 얼마든 역사적 인물들의 생애를 3운법칙의 3가지 형태 분류를 따라 분석하여 3운법칙의 진위/眞僞 여부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각종 진리와 사실은 검증 방법이 다른데 21세기 짝의 법칙 등은 이러한 독특한 방법이라는 그 차이뿐입니다.

항상 강조하는 대로 만인 구원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친히 나타내시는 솜씨이실 수밖에 없으니 이 자체가 실로 기적으로서 가히 경천동지/驚天動地의 경지라 할 것입니다. 너무나 생생한 "표적과 기사"(요 4:48ㅡ"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다")이기 때문입니다. 특이하게도, 희한하게도 인류사 최초로 <그림으로 나타내시는> 표적과 기사>.

21세기 "마지막 때" 경이/驚異로서, <그림>으로서의 "표적과 기사". 그 대단원의 막이 이와 같이 화려하게 내려집니다. 온 세계 구석구석이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은혜의 최종적인 복음의 광채입니다. 우리 모두 주체적으로 참여합시다! 하나님의 분부이십니다. 




2025년 11월 23일 일요일

계시

하나님은 우리가 시각 청각 등 5감으로 인지 인식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피조물이 아닌, 만유에 충만하신 창조주이시기에 "하나님은 영"(요 4:24)이신 때문입니다. 같은 창조물이라도 영물/靈物들만은 그 <초능력>으로 충분히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령한 몸으로 창조된 아담 역시 그러하였고, 그에게서 나는 모든 인류 역시 아담과 똑같으므로 영적 존재로서 그러한데, 단지 몸만은 아담 범죄로 동물성 육체로 전락한 죽은 자가 돼버려 범죄 전 아담의 초능력을 항구적으로 상싫한 결과 하나님마저 인식 못하게 되었다는 사연.


그래서 필요하게 된 것이,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요 4:48)이라 친히 말씀하신 대로의 각종 초자연적 현상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인쇄술도 발달하고 영상 관련 기술도 괄목할 만합니다. 그래서 기적을 행하면 세계 방방곡곡에 삽시간에 전파됩니다. 적그리스도 "악한 자"가 이런 수단을 동원해서 하나님으로 자처하여 온 세상을 속이고 일거에 장악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오늘날 "마지막 때" 시급한 범세계 "바벨론 탈출"(계 18:4)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표적과 기사"는 무엇이냐. 기적이란 것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나타냄이니 바꾸어 말해 그 기적과 더불어 나타내어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진실이고 거짓이 아니라는 확인의 표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기 시작할 때 "주님께서 저들(사도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시어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던"(행 14:3) 것입니다.

오늘 21세기 말씀 전파는 "바벨론에서 나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분부에 따른 것이므로 더욱 중요한 국면을 맞습니다. 거의 2천년간(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고 탄식한 대로 초대교회가 시작함과 거의 동시에 바벨론 신학을 신속히 마귀가 퍼뜨린 까닭에) 동안 세상을 장악해 왔던 사탄의 온갖 거짓말을 들추어내는 미증유의 대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운법칙을 비롯하여 그 관련된 모든 것을 "21세기 하나님 친히 증거하심의 표적과 기사"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지적항 대로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나타냄이라, 그 기적과 더불어 나타내신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진실이고 거짓이 아니라고 확인해 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바 절대적 필연성이라 할 것입니다.

단지 차이는, 종래의 표적 기사는 모세의 지팡이든 모세 자신이든 이를 나타내어 주게 되어 있는 매개체가 필요한데 비해, 이 21세기 경이/驚異는 전혀 그런 것과 무관하다는 것이 그 특징이라, 누구든지 이를 담아 날라 주고 퍼뜨려 주면 끝나는 초대강력의 폭발력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별히 3운법칙은 하나님께서 이를 정하신 이유와 시기(때)를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는 놀라운 측면이 있어 압권이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고로 바꾸어 말하면 이를 홍보하는 각자가 이 일련의 사실을 직접 알아낸 발견자로서의 위치라는 점을 확고히 단언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 그리고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는 일개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개인적인 연구 결과도 아니고 지적 능력과도 전연 무관합니다. 하나님 친히 계시해 주시니까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뿐이니 어느 누구든 그 계시의 대상자이지 어느 한 개인에게 특정적으로 계시해 주실 리가 만무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라 전제하고 마치 자신이 처음 발견자인 것처럼 인상을 주는 것이 되어도 전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에서 누구나 평등하고 동일하니까! 한 아버지가 여러 아들을 두고 있어 똑같게 상속시켜 주는데 여기에 그 어떠한 하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아들을 불러 모으시고 알려 주시는 것이 모든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제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습니다"(눅 10:22).

2025년 11월 22일 토요일

21세기 천사의 복음

 


 







AI의 관점 ㅎㅎㅎ



 

아담 범죄로 천길만길 죽음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으니

하나님은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고 나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함이 우리가 구원 얻는 조건이기에 하는 얘기가 아니고,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셨기에 특별히 요구하심도 아니고 우리를 억지로 자기에게 붙들어 매시고자 함도 아니고 아담을 창조하시던 때부터 하나님보다 더 가까우신 관계가 없기 때문이니 주님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에게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ㅡ요 14:6). 생명의 희락, 평안 등 모든 것이 친히 되시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 각자에게 "품속"(1:18)이 되시기에 그러합니다. 아기에게 엄마의 품속처럼 더 이상적인 보금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그러하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그러하십니다. 우리 각 사람을 충분히 상대하시고도 남음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만유 자체이시고 만유 안에 충만하시고 만유를 관통해 계시고 성부 하나님이신 경우 만유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현재의 <비정상>에서 본디의 <정상>으로 회귀함"이라 하는 것입니다. 나그네 신세를 끝내고 본고향으로 "어서 가자, 어서 가자"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라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 발걸음, 종종걸음을 쳐야 하나님 나라에 가 닿는 것이지 즉 신령한 영광의 몸으로 회복되어 그 초자연계 영계에 영원무궁토록 살게 되는 것이지, "이 세상 좋다, 좋구나! 헤헤야!" 하고 퍼질러 앉아 노닥거리는 자에게 천국이 갖다바쳐지는 것이 아닙니다(히 11:14). 부디 정신 차려 악마 사탄의 낚시질에 걸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2025년 11월 21일 금요일

정상에서 비정상으로 추락한 것을 다시 정상으로 복귀시키는 것이 "구원"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히 12: 14).

최종 결과가 주님을 뵙지 못함인데, "구원 확신" 백 날 부르짖은들 무슨 소용인가요?허공에 사라질 뿐인 메아리가 아닌가요?
성경은 누가 읽어도 능히 이해할 평범하고 단순한 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일부러라도 쉬운 말을 사용합니다(구약의 예언서나 신약의 계시록 외에는)ㅡ왜, 남녀노유 만인 구원이 목표이니까! 이는 너무나 평범한 상식에 속합니다.

성자 하나님 친히,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마 11:25,26) 하셨기 때문. "어린 아이" 상대로 말씀하시면서 반어/反語 등과 같은 어려운 말을 구사하실 리 만무하고 또는 "영적 죽음"이라는 따위 궤변을 성경에서 농/할 리도 없습니다.

용서하지를 않는데,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만 드는데, "모든 사람과의 화평"도 있을 수 없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자아중심이 아닌 "자기 부인" 즉 삶 자체가 자기 위주가 아닌 하나님만 섬김, 하나님만 위함을 뜻함이니 곧 "우리 중 누구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니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 임자)가 되려 하심"(롬 14 :7-9)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이를 위해" 즉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한 죽음이 됨으로써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됨"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아닙니다!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 됨으로써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됨" 자체가 구원이기에 그렇습니다. 자아중심의 이기적 욕심으로 영생 하나만 생각하고 "되었다! 영생이다! 만세!" 하는 것이 구원 받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구원 받았다"는 사람의 거의 전부가 이 엄청난 차이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시급히 "바벨론에서 탈출하세요"(계 18:4)! 우리의 지금 주제가 "영생",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되어 있음은 처음 창조될 때 죽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육체로 생겨나서가 아님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임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영원한 영혼을 조성하시고는, 영원하지 못해 이내 죽어 없어져버리고 말 육체를 붙여 주실 리 있나요? 거룩하신 하나님을 도대체 어떻게 인식하기에 그런 발상이 가능한가요! 그런 하나님을 상상하다니요!

마귀의 바벨론 신학이 그런 하나님을 그려내었고 악마의 세상 지배권 통치력으로써 이를 강제 주입시켜 온 결과입니다. 21세기 오늘에까지 이른 아담 범죄의 비참한 결말입니다. 마귀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어 복종한 꼴이 되어 스스로 사탄의 종 노릇을 하니 하나님의 직접 통치 아래에서 벗어나 사탄의 지배권 아래로 스스로 기어 들어간 까닭입니다.

만고에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인데도 바벨론 신학은 이 끔찍한 비극을 감추어 와 이통에 이 지상 통치/統治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 착각하고 마귀에게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으니! 정확히 말하면 아담의 세상 통치권이 악마에게 넘어간 것을 모르고 하나님 창조하신 세상이니 하나님의 세상이라고만 무작정 믿어 온 것입니다. 아담의 통치권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에 하나님과 결부시킴은 당연합니다.

영원한 속성의 영혼을 아담에게 주입하심과 상부하게 영원한 속성의 신령한 몸으로 아담을 변환(애초에는 당시 모든 동물의 최고 정점/클라이맥스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동물성 육체 그대로이었지만)시키신 것이 아담 창조의 마지막 단계였던 것인데,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그 신령한 육체를 "잃었고" "빼앗긴"(눅 9:25) 것입니다.

이 비극의 원인은 "아담 범죄"입니다. 죄가 무엇이냐? 성경에 분명히 가름했습니다. "불법"(요일 3:4) 즉 범법/犯法이라고. 다시 말해 생명(삶)의 영원한 법칙을 어김입니다. 막연히 살인, 간음, 도둑질, 악한 말이나 생각 등등이 아닙니다. 21세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똑똑히 학습해야 합니다. 마귀의 바벨론 신학은 그냥 얼버무립니다. 주먹구구식으로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뜬 구름 잡듯 말합니다. 그런 것이 거짓말의 속성입니다.

3위1체 하나님의 "3위1체"의 뜻조차 이 거짓말에 가려져 왔던 것입니다. 오직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 18:3)이라 하신 말씀만이 유효했어요. 그러고서 장장 (거의) 2천년 세월을 흘려 보내다가 이 "마지막 때" 바벨론 탈출(계 18:4)의 하나님 분부에 때 맞춰 그것도 21세기 "표적과 기사"("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다"ㅡ요 4:48)로서의 3운법칙이 양자역학 등과 더불어 나타나서야 밝혀진 것.

이룰 주님이 언급하신 바대로 "표적과 기사"라 함은, "그러나 그들이 저를 믿지 아니하며 제 말을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할 것입니다"(출 4:1) 하던 때와 동일한 시대적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에덴이 초자연계 즉 신령한 세계이다. 그 에덴에 몸을 담았던 아담 역시 신령한 죽지 않는 영생의 몸이었다"고 외치면, 아담 범죄 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사탄이 장악해 온 세상에서 그 누가 감히 믿으려고 하겠나요.

영생 구원의 문제 원인이 아담 범죄 즉 생명의 법칙대로 하지 않음에 있고, 이 법칙은 머리(창조주 하나님)와 몸(모든 피조물)으로서의 한 몸 이룸의 영원한 도리 즉 머리는 몸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그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음에 있음인즉, 따라서 영생 구원은 이 "하나"(요 10:30)됨을 복구시킴에 있는 것입니다. 3위1체에서의 이 "3위"의 위치가 바로 그 핵심입니다.

짝을 이루어 있는 둘(제1위와 제2위로서의 '갑'과 '을')이 3위('병')로서의 하나가 되는 요건은, 갑의 것은 을의 것이 되고 을의 소유는 갑의 소유가 됨("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 것은 제 것"ㅡ요 17:10)에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갑의 것은 을이 그 임자 즉 소유주이고 을의 것은 갑이 임자/소유주인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우리가 "주님"이라고 할 때의 그 "주(인)"의 뜻입니다.

지위가 높은 상대에게 "소인은 당신의 종이니 분부만 내리시면 거행하겠습니다"라는 뜻의 의미가 성경에서는 창조주의 사랑과 관련된 것이므로 엄마의 "품속"에 있는 아기에게 엄마가 언제나 종 노릇함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기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까.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아기입니다. 영원히 그렇습니다.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순종입니다.

아기가 그렇습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엄마를 본성으로 사랑하여 신뢰하니까.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되라"(마 18:3)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성부 하나님의 "품속"(요 1:18)에 계신다 했고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14:28)이라 하심도 그런 뜻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심으로써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사야 9:6)이시고 우리는 그 "자녀(childrenㅡ히 2:13)"이지만(첫 사람 아담에게 육신적으로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성령으로"(요 3:5) 다시 날 때 이 경우의 성령께서는 성자만 아니신 성부와 "하나"로 계심인지라 성부 하나님 친히 그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심"(약 1:18)입니다. 하나님의 "양자/養子"(롬 8:15) 곧 하나님의 아들들(요일 3:1/롬 8:14,19/갈 3:26)이 되었으므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니"(히 2:11)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심"(롬 8:29/히 1:6)입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종 노릇함과 같이 우리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하시므로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눅 22:27) 하신 것이며 이렇게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한 몸 이룸을 허물어뜨림이 자아중심(이기주의)의 범죄인 것입니다. 이 범죄로써 영생을 박탈 담했은즉 사람의 교리 즉 바벨론 신학이 아닌 성경적 구원은(반복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자기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 위해 죽는 자도 없어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어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되는 것"으로 마땅히 표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 임자)가 되려 하심"(롬 14 :7-9)에 있다고 우리 구원은 명확히 설명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정확한 정의/定義입니다. 범죄 즉 생명의 법칙을 어김으호 영생을 벅탈 당했으니 생명의 법칙으로 댜시 돌아감이 구원 영생임운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생명(영원 삶)의 법칙은 바꾸어 말하면 상호간의 섬김의 법칙인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진해서 기쁨으로 종 노릇하여 상대를 주인으로 받듦입니다. 나의 것이 다 내 상대의 것/소유이니까. 그가 나의 모든 것의 임자, 소유주, 주인이니까. 또 나의 상대의 모든 소유는 내가 그 임자요 주인이요 소유자이니까. 한 마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나는 1억 인구 모든 개개인을 주인으로 섬기고 동시에 그 1억 인구의 모든 소유를의 실질적 임자가 되어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단 이것은 하나님 친히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어 계실 때 가능해집니다.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상호간의 약속("언약")으로 한 몸으로 구성될 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예수 메시야 우리 주님을 머리로 모시어 그 몸된 교회를 이룬 곳이면 그 수가 "두 세 사람"(마 18:20)이라도 교회로서 모일 때 그러합니다. 주님 친히 그 2,3인의 머리가 되어 계시기에 그러합니다. 초대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던"(행 4:32)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법칙으로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나타나지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삶)"(마 7:21)이 영생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그런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21)고 명백히 하셨으니까. "<이를 위하여(이를 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라 하신 그대로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주님의 소유,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께서는 나의 것, 나의 소유가 되시는 것(그래서 그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됨으로써 내 죄가 용서 받았으니까)이 우리의 구원 받음입니다. 이 엄정한 생명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제아무리 "주님 나 위해 죽어 주셨다"고 곱백번 외친들 믿은들 그것이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괜히 구원 받았다 하여 자기만 속이는 꼴입니다. 평생 이렇게 자기를 "구원 받은 몸"이라 속이다가 마침내 죽고나서야 "어이쿠! 속았구나!" 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것.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온다고(롬 10:1 7) 하니 "내가 믿으니까 구원 받았다"고 하는 이기적 욕심 하나에만 매달리고 하나님 말씀 자체에 대한 애착이 없어 성경 말씀을 사랑하여 가까이함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 사랑도 그 말씀 사랑도 아예 없다는 종거입니다. 구원을 어슬프게 가르쳐 왔던 것이 바벨론 신학입니다. 사랑은 자율/自律로서, 항상 능동적이고 적극적임을 명심해야. 억지로도 아니고 누가 일일이 시켜서도 아닙니다. 내 스스로 기뻐하고 즐기기 때문에 하는 자연스러운 발로인 것입니다.

엄마의 아기 사랑도, 아기의 엄마 사랑도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니고 본성으로 우러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있다면 있는 것이고 없다면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 상대성의 동시성으로 작동하기에 그렇습니다. 만유는 "3위1체"로 움직입니다. 3위1체는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신 것입니다. 


2025년 11월 20일 목요일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https://youtu.be/l50DRaznqzo?si=pZz4wFLry8J98QTo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6일만에 창조를 마치시고 7일째 날에 쉬셨으므로 명하여 제7일을 안식일로 지키라고 하신 것이니까 그 7일은 우리가 아는 대로의 7일이라" 억지로 우길지 모르나, 이미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창조 작업의 날 수(창세기에 기록된 대로의)는 우리가 아는 일자/日字를 따라 말씀하심이 아닌 것이니,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사실과 어긋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시간> 계산이 피조물인 우리의 "시간" 이해와 똑같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임은 상식적으로 능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꼭 그 날짜에 <맞추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함>에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런 점을 충분히 감안하시고서 그렇게 분부하신것입니다. "내가 그 때에 쉬었으니 너희도 따라서 쉬어야만 된다"는 말씀이 아니시고 엿세는 너희 사사로운 일에 매달려 수고했으니까 7일째에는 일절 중단하고 하나님께 시간 바쳐 예배하는 날로서 삼으라 하심입니다.

안식일을 그와 같이 지킴이라든지 수입의 1/10("십일조")을 내어 하나님 섬기는 일에 사용되게 한 것이나 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기"(눅 20:25)를 배우는 유치원생으로서의 초보 교육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신약시대에 와서 나의 것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것은 나의 것 즉 주님 친히 말씀하신 대로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제 것"(요 17:10)이라 하신 대로의 생명의 법칙을 배우기 위한 입문/入門 과정인 것입니다.

이 생명(삶)의 법칙은 주님 친히 나 위하여 자신의 모두를 바쳐 죽으심으로써 본을 보이신 크나큰 생명의 진리를 습득하여 확인하게 됨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는 첫사람 아담이 청조되던 날부터 창조주 하나님과의 언약/言約 관계로 항구여일한 것으로서 정착된 것이나 아담의 불충, 불복종, 배신의 범죄 행위로 산산조각 나고 새로 다시 시작하는 오늘날까지의 만만치 않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정/旅程인 것입니다. 

2025년 11월 19일 수요일

성찬 예식 고찰 (2)

무신론자들이나 불신자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처럼 성경 내용이 인간이 꾸며낸 것 즉 거짓말이라 가정해봅시다. 성만찬식이라는 종교 행사에 예컨대 불경스러운 자세로 참여했다 할 때 이런 사람들이 정확히 가려내어져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아지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고  어느 누가 말할 수 있겠나요. 물론 속이기 위해 그런 내용을 일부러 만들어 퍼뜨릴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속여야 한다는 필요성까지도 사실은 아마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냥 그런 예식을 정하고 때마다 시간이 되면 의식을 집전해도 충분하다고 다 공통으로 느끼고 만족스러워할 것이니까. 그래서 말의 요점은,  바울 사도가 지적한 이 대목이 그렇게 의미가 깊다는 것입니다. 주님 친히 당신 자신을 오늘날 후우리 21세기인들에게도 그 <살아 계심>과 <변함 없이 역사하심>을 어떤 특정의 대대적 "표적과 기사"(요 4:48) 이상으로 훌륭하고 넉넉하게 나타내시어 입증하심이 되는 까닭입니다.

"성령의 가르치심"(고전 2:13)과 "성령의 인도하심"과 "알려 주심"(요 16:13)이 이렇듯 소중한 것이므로 우리는 부단히 성경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마 11:27)는 기록된 말씀(고전 4:6ㅡ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을 통해서입니다. 21세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같이 문제가 있어 보이는 당시 고린도 교회도 바울 사도가 직접 목회하는 <살아 있는 교회>였기에 그런 현상이 당연히 나타났지만, 오늘날까지의 바벨론 신학의 바벨론 교회는, 남달리 핍박 받아 연단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버젓한 외관을 자랑하고 소위 번성하는 교회일수록 대부분 생명 없는 <죽은> 집단일 수가 있어 주님 친히 보살피시는 그런 "은혜"(사랑의 "징계"ㅡ고전 11:32)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징계의 은혜를 마땅히 사모해야 할 일임에도 도리어 껄끄러움으로 마지못해 하는 양으로 성찬식을 대하는 것이 한국교회 작태입니다. 국내 주요 교단이라고 하는 장로교를 보아도 1년 2~4회 정도(소위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에만)로만 그쳐 같은 교단의 미국교회(예컨대 매달 첫째주 등에 성찬식 집전)만도 못합니다. 초대교회  첫 시작 때에는 모일 적마다("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ㅡ행 2:46) 성찬식을 베푼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직접 모시고 뵈오며 시행되는 교회 모임에서 우리 주님의 나 위한 죽어 주심을 기리며 그 크신 은혜를 기념하는 행사야말로 모든 집회에서의 예배 중심이어야 마땅하거늘 이토록 무성의로 일관해 왔다는 것은 심히 유감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누구든지 주님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전 11:27) 그리고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29)이라고 한 대로의 막강한 비중을 지니는 성찬식인데, 추호라도 이 막중한 의미를 가리는 일이 혹여라도 있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2025년 11월 17일 월요일

성찬 예식 고찰 (1)

"누구든지 주님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것이니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으니"(고전11:27-30).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11:31,32).

성찬식 관련한 바울 사도의 언급에서 유달리 관심을 끄는 대목이 이상 인용한 바와 같이, "주님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어...너희 중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입니다. 심지어 죽는 자도 있다는 지적이니 소홀히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심판과 결부시켜 멸망이라 하지는 않았고 단지 "주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라 했습니다.

오늘날 "바벨론 탈출"이라는 중대 국면을 맞는 우리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마땅히 유의해야 할 일입니. 바울 사도는 성령 충만한 사도로서 그의 영적 안목은 정확하였으며 따라서 진실 그대로입니다. "너희 중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은" 것을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와 결부시켜 결론을 내려 진단한 것입니다.

주님 친히 이 죄를 묵과(간과)하시지 않고 손보신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여 바울이 전달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아무나 이렇게 단정하여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나타나심>(보이시지 않음에도)을 직접 목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적지 않게 <은혜>가 됩니다. 마치 주님을 우리 5감을 통하여 확인함과 같이ㅡ.

우리와 함께 계시어 우리의 교회 집회에 동석/同席하시는 주님의 바로 그 명백하신 증거. 그 역사/役事하심의 사실이 구체적으로 증명됨입니다. 이는 매우 귀중한 사실입니다. 더욱 더 의미 있는 것은 이것이 <우회적으로> 알려짐에 있어 그 파급 효과가 극대화됨 그 자체에 있습니다.

즉 "성찬예식에 주님 친히 함께 하심으로써, 자기를 스스로 살피지 않고 무엄하게 '주님의 축복의 잔을 나누어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고 떡을 떼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고전 10:16)한 자를 징계하셨다"는 직접적인 말보다, 이와 같이 간접적으로 바울 사도의 성령 충만함으로써 꿰뚫어 보는 사실 파악에 접하는 은혜라 강력하게 인상에 남고 우리의 뇌리에 와 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히 13:8)하십니다. 그 때 당시와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과 함께 어디서나 그리고 어느 시각에서나 동행同行 동거/同居하심의 훌륭한 증표로서 위의 대목을 명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같은 아름다운 기억이 되게 합시다.

살아 계시어 우리와 함께 활동하시는 사람이신 주님. 그러나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으로 우리 모든 각자와 한 날 한 시 한 장소에서처럼 나와만 계시어 나만 상대하시듯 그렇게 1대1로 계시고 그와 같이 역사하심입니다. 이는 몇 백 번 강조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낼 것"(요 16:7)이라 하신 것입니다. "보내신다" 하심은 지금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골 3:1) 때문입니다("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 소리치니"ㅡ행 7:55,56).

허나 "하나님은 영"(요 4:24)이신지라 만유에 충만하시므로("그리스도께서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심"ㅡ골 3:11) 성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되신 "우리"("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居處를 그와 함께 할 것"ㅡ요 14:23)로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 네 하나님(네가 믿는)이 어디 계시느냐?" 묻는다면 나는 당당히 대답합니다. "지극히 높은 하늘의 그룹들 위(왕하 19:12) 옥좌/玉座(보좌/寶座)에 앉아 계시고 동시에 바로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이사야 57:15/요 14:23). 우리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우리와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심을 알지만, 웬걸 뜻하지 않게 이 성찬식이라는 주님 정해 주신 예식으로 말미암아, 이 <함께 하심>의 구체적 현실적 증거·증명이라 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대하여 놀라움과 찬미와 찬탄을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3운법칙 관련 최근 발견과 같습니다.

3운법칙은 50여년 전에 그 존재를 알아 왔으나 금년에 들어서야 그 생명(핵심)이 되는 사실 즉 인간 생애를 철통처럼 옭아 매어 두실 수밖에 없는 수단으로서의 3운법칙을 언제부터 왜 무엇 때문에 정하셨는지를 명명백백하게 드러내시어 하나님이 친히 나타내신 손길이심을 증거·증명하심과 똑같은 놀라움인 것입니다.

그 <언제>는 아벨이 가인에게 살해 당한 후 라멕(창 4:23)이 자기의 죽음을 방어하기 위해 부득불 한 소년을 살해한 뒤부터였고, <왜>는 그와 같이 천년 가까웠던 당시 수명도 지켜내지 못하고 불시에 죽어 나가는 무질서를 막고자 하신 조처이셨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동물적 육체를 처음부터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 범죄로 초래된 죽음과 인간고/人間苦임이 만천하에 입증되었고, "영적 죽음"이란 바벨론 신학의 거짓됨이 오늘날 여지없이 까발려진 것입니다.

2025년 11월 16일 일요일

우주의 나이 (2)

우리가 아는 낮과 밤의 개념은 창세기 "6일" 창조에서의 "낮과 밤"과는 전연 별개입니다. <창조에서의 날짜>로 제4일째가 되는 날 현재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일자가 정해지는 지구의 자전·공전이 정상으로 가동되었다는 것(창 1:14)이니까. 우리가 아는 대로의 이런 밤과 낮이 정해진 것도(그 때까지의 "밤과 낮"은 <창조에서 세어 가는 날짜> 기준) 태양과 달이 비로소 그 때 빛을 발했다는 의미로서, 해와 달이라는 말 대신에 "두 큰 광명"이라고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별들을 만드셨다"(:16)도 우리말 성경 번역자의 오해에서 나온 것으로, 영역에는 "만드셨다"는 말이 없고 그냥 "별들"이라고만 적고 있는 바, 이는 "두 광명"이라는 말과 직결되어 "별빛도 그 때 비쳐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는 지구의 자전·공전이 없었다는 의미. 그 전의 세계는 파멸 상태였으니까.

<창조의 날 수>에서의 "하루"가 우리가 아는 태양력으로 도대체 몇 년을 의미함인지 우리가 현재로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1만년인지 아니면 1억년 단위인지 또는 다른 무엇인지. 그 3일 째가 되는 날 마지막에 식물이 생성되었는데 아직 태양광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시기였으니까 태양광이 아닌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생겨난 그 빛이, 식물의 광합성 작용을 가능케 했다는 것만 압니다.

염두에 둘 것은, 이 시점은 "6일" 창조 이전 이미 스랍과 그룹 창조의 세계가 "물로써 망한"(벧후 3:6) 직후였다는 것. 이런 사실들에 우리가 굳이 매달릴 이유는 없습니다. 신령한 몸이 아닌 지금으로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창조의 내력>이라는 사실로만 충분히 만족하니까. 

2025년 11월 15일 토요일

우주의 나이


우주의 나이가 가장 최근의 계산으로 약137.98±0.37억 년이라 하니 노자/老子의 도생일/道生一, 일생이/一生二, 이생삼/二生三 그리고 그 후속편 즉 삼생만물/三生萬物에 겨우 해당되는 때입니다. 다시 설명하지만 도/道는 창조를 시작하시기 전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일/一은 무엇이냐, 창조를 시작하시면서부터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이렇게 <창조 전의 하나님>과 <창조 후의 하나님>으로 분리해서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풀이한 것은 노자가 처음입니다.


"一生二"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낳으심으로써 비로소 창조를 시작하셨다는 그 순서를 가리킴입니다. 즉 그렇게 모자간/母子間이 되심으로써 비로소 짝을 형성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짝을 이루시되 그냥 둘로 계시지 않고, 원래 하나로서 홀로 계셨으니까 그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시려는 복고/復古, 오늘날의 동물로 빗대어 쉽게 생각하자면 귀소/歸巢와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여기가 3위1체의 시발점/始發點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실체이신 성부 하나님의 형체, 형상이시니까 성자께서 창조를 시작하시니(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하신 것으로 표현되심) 바로 137억 년 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으로 전제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137억 년 전부터 만드시기 시작한 것이 이 광대한 우주이고 그 후에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로의 스랍과 그룹들 창조에 착수하셨으며, 또한 마치셨습니다. 당시 "6일" 창조의 예와 동일하게 자연계와 영계를 대칭적으로 함께 만드셨는데, 영계 생물 중 그룹 하나가 악심을 품고 방자해지므로 그 후유증으로 당시 세계는 파괴되는데, 물론 자연계만 그러했고 영계는 그대로 남았으니 우리에게 친숙한 대로의 "에덴'입니다.

그렇게 파멸에 이른 역력한 흔적이 창세기 첫머리에 나오는 대로의 기록입니다. 즉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성령)은 수면/水面에 운행하셨다"(창 1:2)입니다. 물 위에 움직이셨다 함은 "6일" 창조의 서막을 의미합니다. 물로 망한 세상 대신 불로 망할 세상을 다시 만드심입니다. 영적 존재는 자유의지를 따라 활동하므로 선악간에 판별 짓는 시험 기간이 필수이고 따라서 "세상이 망한다"는 것은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6일" 창조 이전에 이미 물은 존재했고 땅은 그 물 속에 풀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까 그대로 되어 육지가 나타나게 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하늘과 땅)는 우리가 <현재 아는 대로의 천지>를 말합니다.

137억년 전부터 우주가 생겨났다면 우리가 아는 우주는 자연물질계인 고로 그러면 그 때 불가시적인 영계도 만드셨느냐 묻는다면, 영계와 자연계의 대칭성은 생물이 존재할 때에 한해서만 언급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제외됩니다. 당시의 영계 관련해서는 성령(3위1체)으로 계시는 하나님 이상으로는 그 무엇도 상정/想定할 수 없는 그리고 필요치도 않은 때였으니까.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벧후 3:5)을 설명하면, 하나님 말씀 한 마디에 얼렁뚝딱 무슨 부자방망이처럼 그 무엇이 갑자기 생겨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 말씀 성취를 목표하여 한 방향으로 작동된다는 뜻입니다. 금방 되느냐 아니면 오래 걸리느냐 하는 것은 여기서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주 창설에 무슨 137억년이나 소요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과심사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현시점에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입니다. 

2025년 11월 14일 금요일

오늘날 220만 가나안 성도들을 주님이 성찬예식을 통해 책망하시다

"누구든지 주님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것이니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11:27-30).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고전 11:31,32).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11:26). 

성찬식을 거행함으로써 주님을 기념하고 그 죽으심을 다시 세상에 오시는 날까지 세상에 알려 전달하는 임무에 충성하라는 분부이신 것입니다. 이 거룩하신 명령을 어기고 무슨 구원 받은 자의 행동이 나온단 말인가요.

교회를 당장 시작하세요. 하나님께서는 21세기 교회의 본을 북한교회를 통해 오늘날 보여 주고 계십니다. 북한교회의 본을 따르면 됩니다. 북한교회처럼 척박한 환경도 아닌데 왜 가만히 앉아만 있는가요. 그것은 믿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리는 것입니다. 유투브 "북한 할아버지"를 얼마든지 참고할 수 있습니다. 79세 목자/牧者의 69명 교회 이야기입니다. 이 북한교회는 온 세계 교회 활동의 모본이 지금 
되어 있습니다.

https://youtu.be/Pqyn6_Livsk?si=0LB5BssCdHjfNhXJ

2024년 기준 개신교인 1/3(약 31%)이 "가나안" 성도(교회 출석 않는 신자). 약 226만 명으로 추정(2023년 1월 조사). 이는 2012년 10.5%에서 2017년 29.3%를 거치는 지속적 증가 추세. 특히 19세~29세 청년층의 가나안 성도 비율이 45 %(AI).

세상은 <사는> 곳이 아니라 천국 삶을 위해 <일하는> 직업장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는 크다"(마 11:11).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특별히> 준비해 두신 나라가 아니라 처음부터 창조하신 원래의 인간("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ㅡ창 1:26)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험한 꼴로 되어버린 것임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이 꼴사나운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 사랑은 곧장 멸망으로 통하는 것이니까.

멸망하는 이유는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시킴이 되니(요일 2:15)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극도로 가증스러운 것이 이 동물적 육체이기에. 왜냐면 이런 동물적 육체로 인간을 만드신 적이 없으니까. 아담의 범죄로 애당초의 신령한 몸, 영광의 몸을 빼앗겨 잃어버림으로 된 결말이라 하나님 보시기에  그지없이 흉한 몰골이라 그런 것입니다.

마치 정성들여 만들어놓은 창작 예술품을 무참히 망가뜨려 놓은 바로 그런 현재의 참상이라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한 것이니 이에 각별히 신경 쓸 일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베풀어지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도적 배신 행위가 되는 무서운 결말을 낳는 까닭입니다.

더군다나 아담의 이 끔찍한 범죄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파충류 뱀(자연 물질계)의 영계 영물로서의 일개 피조물인 용의 거짓말을 더 믿고 따른 결과가 되어 이 용을 마치 하나님처럼 추종한 의미란 점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용(dragon) 마귀의 거짓말에 무릎 꿇어 엎드린 꼴이 되어 새상 통치권을 통째로 사탄에게 넘겨 준 결말로서의 아담 처사이므로 그렇습니다. 이같이 범죄자 사탄의 나라가 되어버린 현재의 이 세상이다보니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추호라도 일어나서는 안될 일입니다. 섶(불에 잘 타는 섶나무)울 지고 불로 뛰어드는 재앙을 자초함입니다.

이와 같은 세상의 모든 것과 천국(애당초 인간의 몸을 신령한 속성이 되게 하시어 영원 불멸의 영광의 몸으로 입히신)의 차이를 극명하게 주님은 밝혀 주신 것이 "여자가 낳은 자 중 최고로 큰 이가 세례 요한이지만(왜냐면 메시야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세상에 태어난 선구자이기에)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도 미치지 못한다"고 명백히 차별을 두신 것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격차입니다. 현재의 이 동물적 육체가 영광의 신령한 몸에 비해 그러한 것입니다. 정신 바짝 차립시다. 거듭 강조하지만 세상 사랑은 "매일 분노하시는"(시 7:11)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켜 드리는 소행 외 아무 것도 아님을 명심하여 우리의 의식을 지켜 나갑시다.

오직 하나님을 섬겨 위하는 삶으로 일관하여 충성합시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위하고 세상의 영적 각성을 위한 제사장적 기도 및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아리어 전달하는 일 그리고 선한 직업을 가져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구제의 일("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
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ㅡ엡 4:28)에 힘쓸 일입니다. 세상 낙에 대해서는 마치 금식하는 것과 같은  자세를 취함이 하나님 앞에 마땅한 일입니다.

세상은 <사는> 곳이 아니라 천국 삶을 위해 <일하는> 곳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구원 확신"에서 탈출해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다"(살전 5:9,10).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은 다시 말해 그릇되게 믿는 것은(믿음이 그릇되다는 것은 말로는 믿는다 하나 실제는 믿지 않고 "믿는 것"처럼 자신을 속인다는 뜻) 우리의 "구원" 관련입니다. "구원"이라면 죽느냐 사느냐의 바로 우리의 생사 문제입니다. 이보더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이렇게 크나큰 문제임에도 이를 그르치다니! 놀라 눈을 번쩍 뜰 일입니다. 자다가도 소스라치게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가 하고.

구원은 <죽음>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문제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삶의 원리와 법칙에서 잘못되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범죄했기 때문에 죽음이 와 생명을 잃어버려 구원의 필요성이 생겼으니까! 성경에 죄는 "불법"(요일 3:4) 곧 범법 즉 생명의 법칙대로 아니한 결과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칙이 무엇인가요? 간단히 말하면 "사랑"입니다. 풀어서 말할 것이면 3위1체 법칙에서 "하나"(요 10:30)됨입니다. 만유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을 따라 "짝(제1위)"으로서의 둘로써 "하나(제3위)"됨에 있습니다. 이 3위가 필연이요 그리고 조화/調和입니다. "짝"이라 함은 상반/相反 즉 성질이 정반대임을 뜻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파생한(파생시킨) 자와 파생된(파생 당한) 자와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자/母子 관계 다시 말해 인과/因果입니다. 이것이 질서요 법(칙)입니다. 만유(무릇 존재하는 것)는 이에서 한 치도 벗어남이 없습니다. 이 "하나됨"이 상보성 원리에서의 상보/補이니 CONTRARIA SUNT COMPLEME NTA.

"상보" 곧 "하나"됨에서는 그 <하나>됨의 여건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성경에 남녀(아내/남편) "한 몸"됨을 설명하여 "남자의 몸은 여자가 주장하고(그 주인이 되고) 여자의 몸은 남자의 소유가 된다 즉 엇바꿈(서로 마주 바꿈)이라 한 것입니다. 한 몸이 아닌 "한 영"(고전 6:17)에서도 똑같은 이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삶의 엇바꿈입니다. 갑과 을 둘일 때 갑의 삶은 을이 살아 주고(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사는 것.

각자 자기 자신의 삶을 살면 자기만의 1뿐으로 그치지만 그래서 나 아닌 남의 것을 탐내고 빼앗고 훔치고 그래서 싸우고 죽이고 결국 공동 파멸로 끝나게 마련이지만, 자아중심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상대방중심에서는 나 아닌 남이 1억이라면 그 1억 모두가 나를 위하므로 1의 1억배로 내가 위해지니 탐내고 빼앗고 훔치고 싸우고 죽임으로써 결국 공동 파멸에 이르게 되는 대신 완전히 그 반대가 됩니다. 죽음이 아닌 그 반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생명(삶)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릇 존재하는 이마다가 나를 비롯해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이웃을 위하니 성경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유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마 16:24)는 명령은 이 때문에 내리신 것입니다. 이상향적 삶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말함입니다. 머리와 몸의 기계적 삶도 이 이치입니다. 머리가 몸을 위하고 몸이 머리를 위함으로써만 하나로서의 삶이 영위되는 한 개체로서의 생명이 유지되니 생명의 법칙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시지 않고 피조물을 위하십니다. 창조의 첫 출발로 독생자를 낳으심으로 짝을 이루심이 그 시작입니다. 노자가 "一生萬物"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피조물된 우리도 하나님을 위하며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는 차원에서(하나님 친히 나를 위하심 같이 내 이웃도 똑같이 위하시니까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기쁘시게 해 드림이 나의 삶이므로) 이웃을 위하니 어느 모로나 나 자신은 절대로 위해질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당면한 고통도 이 이치를 따름입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 죄인이 되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 모습이니까 한 몸으로서 나 홀로 예외일 수 없는 것.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이니"(고전 12:26).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사함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심도 순수히 이 하나, 한 몸의 원리로 하심입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마찬가지.

우리 구원이 <죽음>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라는 것은 죽었으니까 그저 살아나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살지 못해 아담이 죽었으니 구원됨은 반드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엄연한 조건부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르게 하나님 앞에서 의인답게 사는 것은 "한 몸"처럼 "한 영"으로의 삶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주님과와 합하여 한 영으로"(고전 6:17) 살기 위함입니다. 이 삶은 구원 받은 즉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이같은 삶으로 열매가 이루어져 맺혀지지 않을 경우 그 구원은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는 엄중 경고인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를 일이다"(마 16:24) 하신 그대로입니다. 나의 구원받은 삶은 주님 위해 사는 상대방 중심의 "새 사람"(엡 2:15/4:24/골 3:10)의 "새 생명"(롬 6:4)이고 더 이상 자아중심의 죽음이 아니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다"의 뜻입니다.

때문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고후 13:5)라 한 것입니다. 고로 나의 현재 삶이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요 4:34)라고 말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 받았다는 사실부터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엄정 엄숙한 현실 앞에 마주 서야 하는 것입니다.

2025년 11월 11일 화요일

스가랴서의 "두 감람나무"와 계시록의 "두 증인"이 가리키는 오늘날의 "3위1체"

"우리가 육체 가운데서 움직이나 육체를 따라 싸우지 아니하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武器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원수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強力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깨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니"(고후 10:3-5).


정신 무장, 이념 무장, 사상 무장인 것입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 관련한 철통 같은 지식과 그 말씀으로 완전 무장해 튼튼한 닻(anchor)을 드리움으로 인해 천하가 휩쓸려 풍비박산되어 난장판이 벌어지는 그 어떤 광풍/태풍에도 요동치지 않는 은혜의 확고부동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곧 오늘날 3운법칙 등으로 나타내어 주신 하나님 증명과 증거와 더불어 여러 은혜의 성경 지식입니다.

이것은 이제 처음 드러내심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시하신 바이나 사탄의 바벨론 신학 등 <거짓말>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감추어졌던 셈인데 이제는 최종적인 "하늘의 전쟁"(계 12:7-17)을 통하여 완연히 드러나진 것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이) 부리시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하나님의) 상속자들(아들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히 1:14)이라 성경이 설명한 대로, 원래 아담의 휘하로서 사탄 등 악령들은 하극상으로 배신 반역하였지만 나머지는 끝까지 충성하는 근왕군/勤王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물론 첫 사람 아담이 지금은 아담이 아닙니다. 범죄로 죽은 자가 되어 끝난 것입니다. 창조주 친히 이 아담(범죄한)의 공석/空席을 메우시고 "마지막 아담"이 되신 이상 무너졌던 모든 진용과 체제가 완전 복구된 마당인 터에 이제는 영광의 재림하심과 세상 통치만 앞두고 있는 시점에 이르렀으므로 우리 모든 성도들의 분발만이 남았습니다. 기도와 전도에 전심전력을 다할 때입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줄 것이니 저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할 것이다.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계 11:3,4). "두 선지자"(:10). "그 등대/燈臺 곁에 두 감람나무"(스가랴 4:1-14). "금 기름을 흘려 내는 두 금관 옆의 감람나무 두 가지"(:12).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14).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고 스가랴 선지자가 물었을 때 천사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성령)으로 되는 것>이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될 것이다!> 그가 머릿돌(성전 건축에서)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으라> 할 것이다 ...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殿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칠 것이다> 하셨으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 것이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건축 현장에서 벽이나 기둥을 세울 때 똑바로 수직으로 쌓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4-10).



여기서 스룹바벨은 이 "마지막 때" 하나님의 성전("성령의 전"ㅡ고전 6:19) 재건/再建의 대대적 신앙 부흥 운동을 말함(상징)이라 확신합니다. 정확히 말해, 오늘날의 "바벨론 탈출"(계 18:4)의 역사적 순간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잘 나오지 않는 즉 이 대목에서만 강조되고 있는 <둘>이라는 표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두 증인", "두 선지자", "기름 발라 주심을 입은 두사람"이라는 특이한 표현이 유독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똑같은 의미로서의 둘만을 강조하니까 이는 "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때" 출현이니까 오늘날 21세게 "표적과 기사"인 "3위1체" 관련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이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의미심장한 것으로서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실로 기묘한 어구가 나타나는데 이 "마지막 때" 예언인 다니엘서 7:25, 12:7 그리고 같은 내용의 예언서 요한 계시록 12:14에 역시 인용되어 있는 바로서, 이는 다름아닌 문자화/文字한 "3위1체" 도식/圖式인 것입니다. 바로 아래와 같습니다.



3운법칙의 구조식도 이 도식을 그대로 닮은 것 즉 복사판인 것입니다.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림에서는 이런 그림보다 더 나은 설명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를 위해 이런 놀라운 것을 예언으로써 미리 마련해 두셨다는 것 자체가 21세기 "표적과 기사/奇事"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할 것이다"(요 4:48) 하셨고, "두 사도가...주님을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님께서 저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시어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셨다"(행전 14:3)고 했으며, 바울 사도가 "나의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행 12:12) 함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은 스가랴서에 이미 예언된 대로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계 11:4)임을 명백히 한 이상 특정 개인을 지칭한 것이 아닙니다. 고로 오늘날 우리는 이 "3위1체"와 직결되는 알체의 사실을 확신을 갖고 중단 없는 기도 중에(살전 5:17ㅡ"쉬지 말고 기도하라") 널리 알려 이 마지막 때의 성령 역사/役事에 총력을 기울일 일입니다. 

2025년 11월 9일 일요일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

헨델의 메시야

(For behold darkness)

https://youtu.be/TWMn2LcAi3M?si=qOMhZEhvK1B1y4Tz


"예수님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것이다"(롬 4:25).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5:9).

앞서의 글에서도 누차 강조했지만 우리의 구원은 단순히 <나 위한 주님의 죽으심>때문만이 아닙니다. 고로 바벨론 신학의 상투어처럼 주님의 "나 대신하신 죽음"이 나의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위에 소개한 두 구절만 보아도,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해" "살아나신 것"이라 했으며, 그 흘리신 피 곧 그 죽으심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즉 죽으신 후의 살아 계심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한 것입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우리의 생명(영생)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몸은 머리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하는 바로 그 구조/체제입니다. 우리 인간의 신체도 그렇게 얽어져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 몸만 그럴 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또한 그 피조물로서 "머리와 몸"(고전 11:3)의 관계로써 존재하도록 정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머리/몸으로서의 짝의 "하나"(요 10:30) 관계를 "생명(삶)의 법칙"이라 헙니다.

이 법칙에서 짝을 이룬 그 어느 쪽도 자기가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으로 철칙을 삼습니다. 생명(삶)의 영원한 불문율이자 질서입니다. 모든 악과 범죄는 이를 어김에서 비롯됩니다(요일 3:4). 이렇게 진실을 알고 나면 모든 것은 너무나 간명합니다. 그 이치대로 준수해 나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길을 두고 뫼(산)로 가랴".

나 위하신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과거에 지은 나의 옛 죄 청산(히 9:15)과 더불어 앞으로 죄 짓게 할 "죄의 몸 멸절"(롬 6:6)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는 주님 친히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하나되심으로써만 구체화, 현실화되는 까닭에 <나 위하신 죽음>만 아니라 <나 위하신 부활>도 필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나와 이렇게 "하나", "한 영"이시기 위해서는 "3위1체"의 필연성을 따라 나와 짝을 이루셔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첫사람 아담"과 <한 몸>을 이루어 <같은 한 육체>의 사람이 됨과 같은 이치로,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과 각자 제각기 <같은 한 성령>으로 <한 영>을 이루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이니 그러므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요 3:6)이라고 구분하신 것입니다.
고로 주님과의 "한 영"이 됨은 그 죽으심과 부활이 나의 것이 됨과 함께 "성령으로 나는" 의미까지 지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만 또 그치지 않고 우리 각자 주님과의 3위1체 짝을 이룬 "하나"(요 10:30)로서 영원한 생명의 법칙 준수에 의한 영생의 바탕을 이루어 누림으로까지 이르게 됩니다.

바꾸어 말해 주님과 "합함"으로 인한 주님과의 "한 영"됨이 나를 신령한 몸이 되게 하는 즉 영생 구원으로 인도되는 기본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과 무관한 단지 나 위해 죽으신 사실만으로써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의 연속이므로 로마서 7장의 장탄식/長歎息 즉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가 더 이상 발 붙일 틈이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과거의 일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으로서 "성령으로 사는"(갈 5:25) 지금이니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로마서 7장이 구원 받은 후의 바울의 체험이라"는 바벨론 신학의 쇠사슬을 단호하게 끊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넉넉히 이김(승리/극복/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고전 15:57) 것입니다.

오직 말씀하신 대로 <믿어> 순종하고 <믿은 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 사탄의 불필요한 거짓말에 놀아나 버둥대는가ㅡ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엘리야의 불말/화마/馬처럼 내달릴 때입니다. 주님께서 완벽하게 이루어 놓으신 역사/役事라도 내가 믿지 않는 한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은 속된"(롬 14:14) 것으로 나타나는 조화를 부리는 법이니까.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으면 충분히 역사될 일도 역사/役事되지 않는 법입니다. 믿는 자에게 "로마서 7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런 것이 실재한다고 믿으면 희한하게 그렇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죄의 몸"이 "멸해졌지만", 의심하는 자에게는 여전히 작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들을 알며 저들은 나를 따른다. 내가 저들에게 영생을 주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저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니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요 10:27-29).

"누가 나를 단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이시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이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사탄이 지배하는 이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ㅡ골 1:24) 함과 같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김>이다. 내가 확신하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공중의 악령)들이나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을"(롬 8:34-39) 것이다.


2025년 11월 8일 토요일

파수꾼이여! 외쳐라! 외칠 때가 되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롬 5:12).


성경은 명백히 한 사람 때문에 죄가 시작되었고 이 한 사람이 전체 인류의 조상이었던 까닭에 다시 말해 동물적 육체가 되어버린 아담 부부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몸"(6:6)이었기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 한 것.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죽음이 후대에 물려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명시하여 강조한 것이다.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민수기 14:18/예레미야 32:18) 하셨으나, 또한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에스겔 18:20)이라 하신 것은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감"(18:20)을 말씀하심이다. 즉 자식이 의를 행하는 경우 부모의 죄악을 담당치 않으나 그 자신도 의를 행하지 않을 때는 윗대로 인한 재앙을 면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이는 구약시대의 기준이고 모든 진실이 드러난 신약시대에 와서는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몸"의 실상을 아는지라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우리 위하신 주님의 고난 당하심과 부활하심을 <믿을> 때에만 그래서 주님과 "하나"됨을 인해서만 "죄의 몸"은 멸절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써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하나"됨, 다시 말해 3위1체에서의 제3위의 위치가 언제나 핵심이고 중심이다. 이 "하나"가 없이는 만유가 지탱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는 청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요 10:30)되심에서부터 일사불란하게 갖추어지는 만고불역/不易의 질서다. 우리의 영생 구원도 "주님과 합하여 이루어지는 한 영됨에 있는 것"(고전 6:17)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극적으로 설명하는 바,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본다"(7:23)는 탄식은 "죄의 몸이 멸하기" 전의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죽으심과 그 부활하심이 주님 친히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심으로써 나와 "합하여 한 영"이 됨에 이르러서는 주님의 죽으심 자체가 바로 내 죽음이 되어 있는 터라 "죄의 몸"이 "멸해져버린" 상태이다. 연결 고리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끊어져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마귀의 거짓말인 바벨론 신학은, 난데없이 바울의 믿은 후의 개인 체험이라 둘러댔으니 거짓말도 어느 정도 이치에 닿게 해야지, 생짜로 우겨대는 궤변을 토하니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는 쪽의 허물이 더 크다. 로마서 7장을 그리스도인의 실제 체험이라 믿어 오늘날 모든 교파가 예외 없이 이런 혼미와 혼돈 속에 갇혀 있다.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ㅡ마 7:13,14)고 경고하신 그대로다. 로마서 7장을 <해석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이 구절에 자신을 비추어 보시기를.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 말씀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다. 사탄의 거짓말에 불필요하게 휩쓸리다보니 거짓말은 처음부터 <되지도 않는 말>의 조합인지라, 그런 것을 붙들고 씨름하니까 끝장이 날 수가 없는 것. 그래서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처처에 널려 있는 것이 "미혹케 하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딤전 4:1)인데 이 엄청난 올무와 함정, 덫임에도 그 존재마저 부정하고 사탄의 세상임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방심 중에 태평스럽기만 하니 어찌 무사하리요!

악마의 거짓과 속임수에 대책 없이 무더기로 내리박히는 꼴만 연출할 뿐이다.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 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예레미야 13:17) 함과 같이, 바울 사도는 한참 신나게 복음으로 달려갔어야 할 초대교회 당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했었다.

하물며 2천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이랴! 그 "눈물" 그 "밤낮 쉬지 않음"을 슬프다! 오늘날 그 누구에게서, 그 어디에서 구경할꼬! 깨어 있는 자여! 무릎 꿇고 하나님에서 "곡읍/哭泣"(예레미야 9:1)하라! 그리고 나서라! 외쳐라!

2025년 11월 6일 목요일

원상 회복 (3)ㅡ에녹/엘리야/멜기세덱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면 즉 움직이신다면 반드시 어떤 일관성을 지닌 원리원칙의 바탕을 따라 진행하심입니다. 그 바탕이 바로 '3위1체'입니다. 이 '3위1체'는 다름아닌 <하나님 계시는 모습>이심을 성경이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만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화감동으로 씌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기록된)인 것입니다.


<하나님 계시는 모습>이시라 함은 다름아니라 성부와 성자로 "하나"(요 10:30)되어 계신다 함이니 파생/派生자와 피/파생자 즉 짝의 관계이십니다. 그러나 둘로서가 아닌 "하나"(요 10:30)로 계시고 움직이신다는 사실이 그 핵심입니다. 바로 이 모습을 가리키시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이라 하신 것이니, 즉 "3위/位"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짝"이라는 개념은 동아시아의 동양철학에서는 음양론으로서 보편화되었으나 "3위1체"까지에는 미치지 못했는데 유독 노자/老子만은 독보적 위치에 있었으니, 그의 도덕경 42장의 25언/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단 한 번 "음양"이란 말이 나오는 바 그 중 "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이 그야말로 잂품/逸品이고 백미/白眉입니다.

이를 해석하면,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셨는데, 독생자를 낳으심으로 시작하셨으며, 이같이 짝을 이루시어 '3위1체'가 되시니, 이 '3위1체'야말로 만유의 기본 대원리이다"로 낙착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강력히 뒷받침해 주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즉 이 "도/道"의 정체("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지금까지 중국 학자들마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필자가 이 노자를 "멜기세덱"(히 7:3)의 변신/身이라 확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멜기세덱이 "성경상 가장 신비한 인물"로 인정되는 것은,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 하고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것을 못먹는 어린 아이" 곧 "장성한 자가 아니라"(:11,14) 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 후로 오늘날까지 이 수수께끼를 푸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은, 거의 2천년간 아담의 죽음이 "영적"이라고 악마 사탄이 바벨론 신학으로 거짓말만 주입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21세기 바벨론 탈출에 즈음해서관련된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신령한 몸으로 복구 변환된(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아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도 역사의 인물로 생존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담으로서는, 아담의 이름으로서는 아닙니다.

엘리야/에녹과 다른 것은, 아담은 죽었지만 부활함으로써(멜기세덱 등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다시 살아 활동할 수 있다는 그 차이입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으로 또는 노자로서의 발자취를 남겼던 것입니다. 엘리야/에녹/멜기세덱이 신령한 몸으로 그렇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애초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써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기반한 것입니다.

아담이 처음의 이런 동물적 육체로 남아 끝내 죽었다면, 즉 에덴에 들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런 영적 몸이 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 "정상 회복"이란 주제로 강력 강조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안목으로는, 인생의 영생 구원이 목적이 아닌 <애초 창조하신 인간의 원래 모습의 회복>이 더 큰 중대사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범죄로 망가진 최초 형상("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답게 영생 불멸인)을 원래대로 되돌리심에 핵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 부차적 결과가 우리로서는 "영생/구원"입니다.

그런데 범죄로 일단 죽음의 걸말을 본 아담인데 죄 지음의 형벌 차원에서라도 어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딤전 2:14("아담을 사탄이 꾄 것이 아니라 여자를 꾀었음")에서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즉 아담은 여자와 한 몸이었다는 의미에서 운명적으로 여자의 죄에 가담한 셈이나(이는 "마지막 아담"께서 그 몸된 교회의 죄에 동참하심을 상징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것은 사실이므로 부부가 똑같이 동물적 육체로 전락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의 성격은, "왜 유독 에녹과 엘리야만이 신령한 몸이 되었느냐"에 대한 답이 됩니다. 다시 말해 둘 다 <아담의 영원성> 즉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됨을 강조하여 나타냄에 있었던 것입니다. 에녹은 아담 죽은(인간으로서의 최초 죽음) 직후 세상을 하직함으로써(두 번째 세상을 뜸) "첫 사람 아담"을 직접 가리킴이 되고, 반면 엘리야는 "마지막 아담"(:45)을 가리킴이었던 것으로, 주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시기 직전 세상에 출현했던 것입니다.

단 전자는 실제 실물로서의 에녹이었던 반면 후자의 경우 그 실제(형체)인 엘리야를 대신한 형식(형체) 곧 단지 <상징적> 의미로서의 세례 요한이었다는 점에만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 배당(배열)도 뜻 깊은 데가 있으니, 에녹과 직결된 아담은 이미 폐물로서 사라지는 존재이고, 세례요한(엘리야)과 직결된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은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 탄생하는 모든 인류의 머리로서 시작하심이기 때문에 바로 이 점을 강력한 메시지로 세상에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경륜/섭리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물성 육체로 죽는 아담의 그 죽음의 처참함은 결코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원래 모습이 아니었음을 에녹의 신령한 몸(육체적 죽음을 보지 않는, 죽음이 아예 존재하지를 않는)으로써 그 현격한 차이를 가시적으로 보이시어 강조하신 반면, 세례요한의 "엘리야"적 성격은 단지 <이름만의> 존재 가치로 끝나(엘리야처럼 능력 과시도 일절 없음과 맞물려) 우리 주님의 초자연적 능력(기적)과 신령한 몸으로서의 부활로만 부각되도록 넉넉하게 훌륭하게 대조된 것.

엘리야는 엘리야일 뿐이지 세례요한이 엘리야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어 없어지는 아담은 원래의 위풍당당한 영광의(범죄하기 전의) 아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대조, 대비되는 두 사건으로 하나님께서는 더 할 수 없는 선명/鮮明성으로써 이 엄청난 역사 무대를 조명하고 계시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21세기 오늘날 우리입니다. 찬탄을 금치 못합니다. 이와 같이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심에 대해 무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됩니다.

마귀는 이를 두고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환생한 것이라 하여 윤회의 확실한 증거라고 엉뚱하게 둘러대나 그런 "전생"(轉生/前生)은 네피림에게만 해당되며 아담 후손으로서의 인생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이런 네피림을 멸절시키시지 않는 것은 아담의 범죄가 사탄의 말(거짓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고 따른 결과라는 의미로 통하므로 아담이 세상 통치권을 사탄에게 "넘겨준"(눅 4:6) 꼴이 되어 빚어진 비극적 결말로서 형벌 차원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혹자는 사탄이 주님 앞에서 허세를 부린 거짓말이라고 하겠으나, 사람이 되셨지만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이심은 영원 불변이심을 간과하는 무식의 소치라면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일개 피조물이 거짓을 농하다니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사탄적 지배와 관련해 또 다시 사탄의 거짓말에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아담은 모든 인간의 머리로서 인간 세계를 주름잡는 지배자이나 그 권한을 원수에게 넘겨 준 결과가 된 것이기에(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에서의 의미도 있어) 바벨론 신학과 같은 2천년 간의 속임수도 사탄의 새상 통치권 아래 행해지는 터라, 천사들도 섣불리 손대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 18:3)이라 하신 말씀만이 유효했던 암울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탈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분부 아래 마침내 천사 군단이 모처럼 실력 행사에 들어가 사탄의 세력을 꺾은(계 12:7-9) 것을 계기로, 오늘날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3위1체", 아담/에덴의 초자연계 속성 등을 비롯해 대낮처럼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결코 모든 것을 허투로 듣지 말 것입니다. 

2025년 11월 5일 수요일

원상 회복 (2)

우리 구원이 <원상 복구>이기 때문에 "회개"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거룩하고 의로운 인간으로 죄가 없었으니까.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롬 5:12) 것이므로.


아담 범죄로 인간(아담)이 더 이상 "신령한 몸", 영광의 몸"(고전 15:44/빌 3:21)이 아니고 현재와 같은 "육/肉의 몸", "낮은 몸" 다시 말해 동물적 육체가 되어버렸음을 항상 의식합시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은 <살고자 함>이 아니고 <보내심 받아 주님의 일하기(요 20 21) 위함이니까(4:34ㅡ"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로 모든 것이 이제 원상 복구되었으니, 아담 범죄를 거울 삼아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과 '언약'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않을 것을 우리 각자 마음 깊이 다짐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다시 말해 생명의 법칙 을 따르는 행보의 365일 24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됨의 은혜의 영광을 입었으니 "내 몸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19)인 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늘 의식함이 요긴합니다. 세상 사람은 아담 범죄로 정상 상태에서 전락하여 비정상의 험한 꼴에 위치함을 전혀 알지 못하니까, 동물적 욕구(성욕/性慾)에 사로잡혀 또 악령들의 부추김을 받아 음란/淫亂을 극하고 있는 세태이나, 모든 진실을 아는 우리는 휩쓸리지 않아야.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 위하여 흘리신 피 값으로 사신, 나 위해 죽으심으로써 이제 영원히 전적으로 주님의 소유물이 되었으니 그런즉 나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편단심만이 있을 뿐입니다(:20). 그 대신 <주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라 그 영광을 누리게 될 "좋은 날"을 앞두고 바라는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로지 나만> 위하심이니,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사람마다 각자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이 말은, 과장된 표현도 아니고 상징성을 띈 것도 아니고, 진실 그대로의 영광스러운 사실을 말함인 것입니다. 이 나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심이니까!

바로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우리 위해 죽음을 친히 맛보지 아니하시면"의 뜻)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다"(요 16:7) 하신 바로 그 "유익"됨인 것입니다.

이제는 영원히 사람되시어 사람으로서의 그 몸으로 1대1 나와 상관하시되, 그러나 그 영은 우리처럼 사람의 영이 아니라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 곧 성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로 계시는 성령이신 때문에, 모든 구원 받은 자 개개인에게 충준히 그러하신 것입니다. 사람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미가 이러하심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이같은 "하나"되심은, 두 분 모두가 동시에 나타나시는 법이 없고 성자로 나타나시면 성자이시고, 성부로 나타나시면 성부이신 것이니, 이는 주님이 빌립에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인 것입니다.

양자역학에서의 2중 슬릿 실험(파동성이 나타나면 입자성이 나타나지 않고 입자성이 나타나면 파동성이 나타나지 않는)에서 증명되는 "3위1체" 바로 그 현상인 것입니다. 이 <3위1체>야말로 오늘날 이 "마지막 때" 필요불가결의 <바벨론 탈출>이라는 일대 격변기에서 이에 대비해 교회 곧 그 "백성"(계 18:4)의 대처 방안을 이같이 구체적으로 마련해 주신 <은혜>로서의 전무후무의 경이/驚異입니다.

태초 창조의 만유 운행의 기본 원리를 최종적으로 세상에 밝히시는 핵폭탄급 "표적과 기사"(요 4:48)로써 21세기 "바벨론 탈출"의 중대성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세계인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교회는 이를 주목하여 마땅합니다. 3위1체의 오묘함과 비밀스러움이 인류사 최초로 드러나는 순간이기에 그러합니다.

이 특이한 <'3위1체'적 표현법>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14:16) 및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하신 말씀에서 완연히 드러납니다.

즉 성령을 보내시는 주격/主格이 성부이심과 동시에 또한 성자이신 것입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10:30)이심을 입증함입니다. 이는 3위1체에서의 제3위를 이루심입니다. 이 "3위"가 짝의 법칙에서 핵심인 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이 아름답다는 것은 이 "하나"로서의 대칭미/對稱때문인 것입니다. 만유는 짝으로 되어 있고ㅡ"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이사야 34:16), 그리고 짝을 이룬 둘은 <반드시> "하나"(요 10:30)인 것이니 이것은 우주의 '철칙'입니다.

이 "하나"로서의 구성 요건이 "한 몸"(창 2:24)됨의 '머리'와 '몸' 구조에서 잘 드러나는 바 즉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 쌍방 모두 자기를 위하지 않음이 그 특징입니다. 남녀 한 몸됨에서 아내와 남편의 육체의 맞바꿈식 소유권 행사라 할까, 남편의 몸은 아내가 주장·주관하고 아내의 몸은 남편이 그렇게 함으로써 잘 나타납니다(고전 7:4).

갑과 울 "한 영"됨에서는 갑 자신이 을의 것이 되고 을은 갑의 소유가 되는 바 이것이 생명(삶)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 이는 "언약/言約"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복잡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이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 위하는 조화로 인식 이해하면 됩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위함으로써 절대 복종하고 창조주께서는 오직 그 창조물을 위한 일념으로 명령(계명)하시는 구조/체제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공동체 의식이 여기서 비롯됩니다.

이 영원한 삶의 원리를 따라 창조주 친히 사람이 되셨고, 우리 모든 인간의 죽음과 부활을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루셨고,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심으로써 나와 "하나"가 되시니 이것이 영원무궁한 삶의 기본 틀(방법)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자아중심(자기 위주, 본위)은 철저히 배제되는 것입니다.

"죄는 불법/범법"(요일 3:4)이라 한 대로 바로 이 생명의 법칙을 어김을 말합니다. "아담이 언약을 어겼다" (호세아 6:7)함이 바로 이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이 약속을 모든 영적 피조물은 지키게 되어 있는데 즉 자아중심을 일절 대척하게 되어 있는데도 사탄(창세기에 나오는 그 "옛 뱀"ㅡ계 12:9/20:2)은 오만해져 아담을 시기하여 영원히 죄 짓는 자로 타락했고, 아담 부부는 어리석음으로 동일한 비극을 자초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처럼 죄를 그저 막연하게만 말하지 말고("도둑질"이니, "살인"이니 따위로) 요한 사도처럼 명확하게(모든 실상을 알았으니) 인식하고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21세기 개화기/化開期다운 전도를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세상은 암흑기였습니다. 인지 개발이 뒤늦어서가 아니라 인류의 원수 사탄의 속임수와 거짓말이 세상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죽음"이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궤변이 2천년 가까이 세상을 철권 지배해 온 사실이 그 좋은 예입니다. 지금은 <바벨론 탈출>이라는 시대적 절박성에서, 인간을 호위하는 천사 군단이 강압적으로 악마의 세력을 분쇄한 다음(계 12:7-9) 숨통을 열어놓은 결과로 만유의 기본 구도인 3위1체가 알려진 것이니 복음 전파에서 실로 획기적인 것입니다.

그 동안은 사탄의 인간 지배가 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이었기에 섣불리 손댈 수가 없었으나 이제는 "바벨론 탈출"이라는 대전제가 걸려 있어 그 명목 아래 하나님 은혜로 간신히 돌파구가 열리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3위1체", 알고 보면 21세기 일대 "사건"이라 불러도 됩니다. 노자/老子까지 다니엘 예언까지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       (계속)

21세기 "천사의 복음"의 핵심은 "3위1체"에 있어

글을 올리기 전에, 전에 한 번 얘기를 했지만, 필자의 한자 사용은 습관이 되어서가 아니고 한자의 유사 발음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한글 전용의 우리나라 학생이 일본, 중국 등의 학생보다 문장 독해력(이해도)이 상당히 뒤쳐진다는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