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인가"(요 6:30) 하고, 믿을 수 있는 특별한 "표적과 기사"(4:48)를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요구한 것처럼 지금까지 사탄의 거짓말인 바벨론 신학을 아무 의심 없이 태평스럽게 믿어 오다가 "그 모두 거짓말이다" 하고 "천사가 가진 복음"이 등장하니 모두 황당함을 느낌은 당연합니다.
천사의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징 즉 "표적과 기사"는 천사가 정확히 이 21세기 "마지막 때"를 겨냥하여 다니엘에게 미리 고지/告知해 준 3위1체의 도식/圖式을 문자화/文字化한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로써 명확히 드러났고 같은 성격(21세기 예언)의 요한 계시록의 "한 때, 두 때, 반 때"(계 12:14)로 재차 강조되어 확인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에 대한 이유를 말하면, 이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신비한 문구가 이 21세기 오늘 이전까지는 무엇을 상징함인지 무엇을 가리킴인지 아무도 제대로 알고 설명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 예언이라는 것은 그 속성상 예언이 성취된 다음에야 비로소 소상히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시점입니다. 3운법칙과 동시에 3위1체가 알려지면서입니다.
아인슈타인도 오늘날의 여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둘>의 <하나>됨 즉 "3위1체의 제3위"에 친숙하지 못했던 관계로, 비교적 이 점을 각종 실험으로 대략적으로나마 간파하고 있었던 보어의 결론에 쉽게 동조하지 못하였기에 필자는 "틀렸다" 한 것이고, 그러나 보어도 "몰랐다"고 한 것은 짝의 법칙의 최초 발견자로서의 위업은 달성해 그 공은 가상하지만 이로써 창조주의 실존을 영적으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했기에 이를 지적함인 것입니다.
고로 "아인슈타인은 몰랐고 보어는 몰랐네"를 <천사의 3위1체 복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표제/表題어처럼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판단하기에(역시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보어가 자신을 상징하는 가문/家門 휘장에 태극도/太極圖(주역의 태극 문양)와 라틴어로 "상반/相反(짝 곧 대칭을 이룸)"은 "상보/相補" 즉 "대립적인 것은 상호 보완적"이라는 라틴어 문구(아래 그림)를 직접 도안해서 새겨 넣었다는 사실은, 어느 과학적 서술의 수식/數式에도 뒤지지 않는 위대성과 당당함을 영원성/永遠性으로 구비한 기념비적 금자탑/金字塔으로 후대/後代, 만대/萬代에 세워 준 쾌거/快擧라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만한 불후/不朽의 역사적 가치로 보기에 아낌 없는 상찬/賞讚을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리시면서까지 오늘날 "마지막 때"의 우리들에게 "3위1체"라는 만유의 최고 기본 원리를 가르치신다고 했지만(그렇게 하심으로써 "바벨론 신학"[계 18:4]의 거짓됨을 훼파하시고 "천사의 복음"[14:6]을 드러내심), 오늘날 닐스 보어의 특이한 가문 휘장도 그런 일환(영원한 진리를 <도안>이라는 "그림"으로 설명하는)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교황'이라 불리기도 했던 보어만이 주역을 공부한 것은 아니고, 알버트 아인슈타인, 칼 융,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치, 존슨 얀, 헤르만 헤세, 요한 괴테, 옥타비오 파스 등 각 분야의 서양 지식인들도 관심을 가졌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동양인인 우리도 철학관이나 점집 등을 연상시키는 기호에 불과해 보이고 한없이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주역"이란 것이, 쉽게 이해될 리 만무합니다.
우리처럼 단순히 음양론(더욱 정확히 말하면 노자의 도덕경 42장 25언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삼생만물],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로서 대표되는)에만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보어는 이같은 상징을 통해 자신의 필생의 업적으로 중요시했었던 양자역학의 상보성 원리가 음양론 즉 노자의 "三生萬物/삼생만물"과 유관함을 확실하게 증명한 것입니다.
81장에 걸치는 노자 도덕경의 핵심 사상으로 언급되는 것이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이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는 삶"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노자'라는 인물을 '멜기세덱'적 관점에서 고찰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정하신(창조하신) 대로만 따르고 거기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 생명(영생)>이라는 유일한 결론에 금방 이를 수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비극도 그렇고, 우리 주님 예수(히브리어로 "구원자"의 뜻) 메시야로 말미암는 21세기 현재까지의 "새 창조"도 이에서 벗어남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말씀, 그 뜻대로만 따르면 일체의 잡다한 인생 문제가 일거에 해소된다는 사자후/獅子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3위1체' 시대 이 21세기의 "전도서"(Ecclesiastes)라고 노아 도덕경을 명명해도 무방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일체의 인위적 작용(유위/有爲) 즉 범죄·자아중심을 떨쳐 버리고(무위/無爲), "자연/自然"(상대방중심·하나님중심) 곧 창조주 하나님과 그 말씀 곧 계명 지키기("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이다"ㅡ요 14:23)로 되돌아가 그 "뜻대로만 하면"(마 7:21) 그야말로 만사 형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게 되면, "자연무위"란 말은 어폐가 있을 수밖에 없는 공허한 메아리만 되기 때문. 왜냐, 생긴 그대로 가만 두고 그냥 지낸다 해봅시다. "문명의 발달"은 기약할 수조차 없게 되지 않나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머리를 굴려 "유위"에 "유위"를 거듭했기에 오늘날의 과학시대를 마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로 노자의 "무위자연"을 하나님의 창조와 결부시켜 일체의 인위적인 헛됨과 연결시키지 않고는 말 자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용(사탄·마귀)은 부질없이 아담을 했던가요? 하나님이 "6일" 창조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로 아담을 세우신 것은 용/龍을 비롯한 모든 창조물을 위하심 곧 그들에게 덕을 끼치기 위함 곧 하나님의 사랑의 <최선>이셨던 것입니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주신 것을 왜 <최악>처럼 여겨 듣지를 않고 그 반대로 행하는 "有爲"를 범하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 정하신 대로 시키시는 대로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롬 8:28)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쓸 데 없는 짓을 해요? 모든 죄악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자아중심의 더럽고 구차한 "욕심"("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인 것입니다.
무신론도 그렇고, 불교나 이슬람교 등 세상 종교도, 인간의 각종 범죄 행위도(창조주 하나님의 붊문율인 양심을 어겨 가면서도 저지르니까) 모두 <인위적인> 것,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마치 각자 자기가 하나님인 양 우겨대는 "유위/有爲"가 빚어내는 해독이요 자초하는 비극입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계인들이여,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3운법칙 등으로써 완벽하게 자기를 증거하셨다!"가 21세기 "천사의 복음"의 서두/序頭입니다. "천사의 복음"을 알리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 땅, 바다,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였다"(계 14:7)고 함과 같습니다.
왜냐 하면 악령이든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이든 3운법칙이나 3위1체와 같은 "표적과 기사"는 일절 나타낼 재간이 없기에 그러합니다. 홀로 창조주께서만이 나타내실 수 있는 유일무이의 "표적과 기사"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대로 "큰 이적을 행하여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할망정"(계 13:13) 이 21세기 표적과 기사와 같은 내용은 유일무이한지라 되풀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애를 낱낱이 "3위1체"를 따라 세 갈래로만 구분하여 빈 듬 없이 갈라낼 수 있나요. 그리고 그렇게 철통같이 나타나도록 정하신 <그 때>와 <그 이유>가 성경상으로 입증되어 드러나도록 할 수 있나요. 그 어느 천재일지라도 또는 아무리 초능력을 동원하더라도 그렇게는 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3운범칙의 기본 틀 즉 3위1체의 도식/圖式이 이미 2,500년 전 다니엘 선지자(예언자)에게 천사로 말미암아 "한 때, 두 때, 반 때"로 예고된 것이었고, 다른 예언서 요한의 계시록으로도 재차 확인된 것입니다. 이 2천5백년 전의 시점/時點 역시 도덕경의 노자가 등장했던 바로 그 무렵입니다. 이와 같이 역시 21세기에 등장하게 되어 있는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과 3운법칙은 모든 것이 정확히 맞물려 있어 그 중량감을 더해 줍니다. 이런 것을 그 누가 모방하겠나요.
앞으로 적그리스도가 나타낼 아무리 기상천외의 초자연계적 기적이라도(성경은 사탄이 "거짓 기적"도 섞어 속인다고 했으니까ㅡ살후 2:9) 이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적의 유형이 다르고 질적으로도 차이가 있어서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이 행하는 것은 초자연계 신령한 몸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초능력 수준에 불과합니다. 현재의 인간이 워낙 <초라한 동물성 육체>이기 에 이런 초능력에 한 때나마 기절초풍 넋을 잃고 허둥댈 뿐입니다.
"무위자연"을 다시 강조합니다. 왜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고 잘난 것처럼 마치 하나님도 없어 스스로가 하나님인 것처럼 자기 판단으로 일을 저지름으로써 자멸/自滅의 길을 택하느냐 말입니다. 괜한 엉뚱한 교만이 들어 그런 것입니다. 속말로, 죽으려고 "환장해서" 그런 것인갸요.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하셨으면 그 "원수 사랑"이 내게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해요? 그래서 성경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잠 4:23)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요일 5:3)고 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도 거짓말하신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원수 사랑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고,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도 강조하셨듯이 모든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모든 용서하심도 일체 무효가 됩니다("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ㅡ마 6:12). 이 주님의 가르치신 기도를 <매일> 올리는 이유입니다. 용서 않고 원수 갚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이 기도에서 확인되듯 내 죄는 용서가 안되고 나의 구원도 유야무야 허공에 흩어져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한 까닭입니다.
아담 범죄로 "죄의 몸"이 되어 있는 인생들입니다. 가인이 첫 살인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벌하시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의 원하는 것까지 들어 주시고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신"(창 4:15) 것입니다. 과부 사정 과부가 알고 홀애비는 홀애비가 안다 하듯 똑같이 "죄의 몸"(롬 6:6)으로 태어난 터에 나와 똑같이 새 창조로 새 사람 되기까지 기다려 줄 마음도 없는가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이러하신대 우리가 무엇인데 심판하고 벌 주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단 말인가요.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신다"(롬 12:19). 원수 갚겠다 는 생각은 자아중심이요 자아중심으로써 영광의 몸으로 되돌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 18:33) 하시는 선고와 함께 영생 구원에서 영원 낙오자가 됩니다. 바벨론 신학은 이런 모든 하나님의 엄정한 뜻을 묵살해버린 것이니, 소위 "행함으로 얻는 구원" 등의 핑계를 달아 주어 아담처럼 죄에 빠지게 하여 영생 구원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막아 온 것입니다. "은혜의 믿음으로 구원 받았노라",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자기 기만의 핑계로 헛되이 천국 소망을 가지며 무수한 사람이 멸망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약하다" 타령에 빠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세상 살라"는 말이 없어요. 외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는 말씀뿐입니다. 이유는 명백하니 이 "죽은 자"("죽은 자들로 저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ㅡ마 8:22)의 세상에서는 죽음뿐이지 생명이 있음으로써 사는 데가 아닌 것입니다.
<애초 신령한 몸으로 살다가 범죄 탓에 "죽은 자"로 전락해 이런 인간고에 휘말리는 동물적 육체가 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천사의 복음"과, "바벨론 신학"("처음부터 이런 걸레같은 허접스러운 육체로 창조된 인간이니까 하나님의 예정하심 따라 믿음으로 구원 받아 어쨌든 재주껏 구불텅거리며 살다가 영생에 들어가면 그만이다")과의 현저한 차이를 분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 생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고 했으면 벌써부터 알아채고 대비했어야 할 일입니다. 대비커녕 무식무지의 난장판이었음이 2천년 기독교회사로 드러난 바벨론 신학인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소스라쳐 깨어날 때입니다. 동물성 육체의 한없는 고달픔에다 왜 사탄의 거짓말의 멍에까지 짊어지고 야단입니까.
이런 엉뚱한 거짓말의 합리화를 위해 "바벨론"은 에덴도 자연계 동산이라, 로마서 7장은 구원된 바울의 개인 채험이라, 한 번 일단 구원 받아 놓으면 영원 불변으로 보장되는 것이라는 따위 논리에도 어긋나는 갖가지 거짓말을 덕지덕지 겹겹으로 덧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어쭙잖게 세상 <학문>("신학")으로 둔갑시켜 그럴듯하게 꾸며 놓은 마귀 일당의 요란한 난장판의 가설무대인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이는 주님의 말씀에 반신반의하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천사의 복음" 역시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2천년 전통의 바벨론 신학의 역사가 스가랴 예언처럼 "태산/泰山"으로 군림해 있기에 그러합니다.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ㅡ오늘날 "천사의 복음"에서는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인하여"로써 대체됩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아직 주님 다시 오시기 전이므로)의 <일>이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천사의 여러 기적(홍해가 갈라지는 등)은 악령들도 할 수 있을 뿐더러 거짓된 속임수까지 가세되므로 더욱 엄청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21세기 표적과 기사만큼은 사탄이 모방할 수 없음을 앞에서 강조했습니다. 단순한 신령한 몸으로서의 초능력과는 완전 별도의 영역이기에. 이러한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힘입어 "천사의 복음"에 착념합시다.
다시금 정리하면, 초대교회 그것도 사도 바울 당시였건만 사람들은 "신속히" 진리의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따름을 바울 자신도 "이상하게 여겨"(갈 1:6) 기괴하기 짝이 없다고 판단했는데, 하물며 2천년 세월을 훌쩍 넘긴 오늘이겠나요. 사탄이 지배 통치하는 세상임을 증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악령들의 지배와 선동이 아니고는 그렇게 "신속히" 바울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까지 바울의 가르침에서 떠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게 됨을 계기로 모든 진실 진리가 바로 드러나게 되려면 그동안 지구인들을 속여 지배해 왔던 세력을 강제로 꺾어야 하겠기에 이 "마지막 때" 영/靈들간의 대판 싸움이 불가피함을 "마지막 때"를 총정리하는 예언서 요한 계시록에 이미 예고되었던 것입니다(계 12:7-9). 미가엘 천사 군단과 사탄 일당의 대접전입니다.
그 결과로 빛을 보게 된 것이 의당히 "천사의 복음"일 수밖에 없고, 이 천사의 복음으로 인하여 사탄의 그간 자행되어 왔던 갖가지 거짓말이 드러나져 성경의 잘못 이해되어 오던 여러 부분이 바로잡아지게 됨은 필연입니다. 일례로, 지금까지 천사와 그룹/스랍 등을 혼동하여 동일시해 온 것인대 엄연한 별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스랍/그룹은 하나님이 친히 부리시는 영들(하나님이 "그룹을 타고 날으심"ㅡ삼하 22:11/시 18:10)입니다.
반면 천사들로 말하면은 "구원 얻을 (하나님의) 상속자("후사/後嗣)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히 1:14)이라 헸으니 아담에게 도우미(helper) 역할을 하도록 에덴 동산에서 창조되었던 영물들인 것입니다("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ㅡ창 2:15-19). 이미 "5일"째 되는 날 모든 동물의 창조를 마치셨는데 또 창조를 하신다는 것은 어불성설. 따라서 그런 동물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역시 더욱 언어도단.
계시록에 "4생물", "24장로"란 말이 나옵니다(계 5:8/19:4). 또한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어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11) 했으니 미가엘 등 천사들은 생물과 장로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네 생물이 날개가 여섯이라(이사야 6:2/계 4:8) 했고 24장로가 4생물과 동급으로 이 부분의 계시록에 서술되어 있은즉 "장로"는 그룹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그룹(cherub) 하나가 있어(겔 28:14-16) 이 총중에서는 제외됨으로써 지금은 무저갱에 들어가 아바돈 또는 아볼루온(계 9:11)이라는 이름으로 격리된 상태에 놓인 자인데, 24장로가 그룹들이라면 그럼 타락 이전에는 25그룹(장로)이었던가, 25(홀수)와 24(짝수, "4생물"과 맞대응되는 것같은)의 숫자가 좀 어색해 보이는 듯하나 현재로는 더 자세한 무엇을 알고자 함은 불필요한 것. 성경이 설명하지 않는 것은 그냥 간과함이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