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2일 목요일

"씨름하는" 기도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창피스럽기 그지없는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린 비극의 주인공 인생들을 장악하여 멸망 길로 끌어들이기에 광분하는 사탄 왕국(악령들의 징글징글한 씨앗들인 "네피림"이라는 별개 인종들이 설쳐대는)인 <백해무익>의 현세상임을 우리 마음에 아로새기어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씨름을 하십시다.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아담 즉 "마지막 아담") 재림 세상이 되어야 비로소 살 만한 인간 세상, 세상다운 세상으로 회복됩니다. 하나님 은혜로 새로 지으심 받아 다시 나서 새 피조물된 우리는 이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 항상 의식하는 중에서야 마땅히 대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위 "과학 문명"이 발달하여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세뇌되어 왔으나 천만의 말씀! 신령한 몸의 초자연계적 작동(삶)에 비하면 아이들 소꿉 놀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림없는 <눈 속임>에 불과합니다. 실상대로 말하면 이 모든 것은 "악한 자" 적그리스도 출현을 위한(손쉬운 적그리스도 세계 통합을 꾀하는) 악령들의 짓거리의 일단일 뿐입니다.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런 비극적 동물성 육체는 여전히 그대로인데에 이보다 더한 "진보 발전"이 있은들 그게 무슨 대단한 것인가요.

하나님의 애초 창조의 초자연계적 "영광의 몸"(고전 15.44/빌 3.21)에 비하면 전적으로 무의미, 무가치 그 자체입니다. 초자연계 속성의 모든 아름다움과 그 경탄스러움은 아담 부부만이 체험한 것이라 우리야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니까 상상조차 못합니다. 이런 비참한 실태를 우리는 마음에 깊이 아로새김으로써 <천국에서의 탈락>을 한사코 면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5) 하셨으니까. 세상에 연연하여 미련을 접지 못하는 사람마다 "어린 아이 같은 받듦"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으니까!

어린 아이는 다소곳이 그 원하는 하나에만 골똘히 집중하는 순수한 특성이 있습니다. 천국에서의 영생도 원하고, 세상에서 밑지지 않게 남 부럽지 않게 사는 것도 원하는 <양다리 결치기>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 "천국"입니다.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마음이 갈라져 요동치는 것)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  7.33-35).

이렇게 요동치는 마음으로는 얍복강 가에서의 야곱의 "기도 씨름"이 불가능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말하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말하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습니다...그 사람이 망하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다...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창 32.24-30)는 뜻이었습니다.

기도는 "씨름"이요 따라서 "이기는 자"가 축복을 받아 기도 응답이 되는 것이니 실로 "결심하고 기도에 임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림>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천사의 복음" 전파에서 이를 위하여 기도로써 씨름하시는 기도의 동역자 여러분이야말로, 이 <21세기 하나님 역사>에서의 주역들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 세상은 나부터 화급히 구원 받았으면 다른 많은 이들도 화급히 구원 받아야 마땅하니까 달리 딴 것에 마음 둘 틈이 없는 것이 정상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눅 9.62) 하심은 그런 자세의 사람들은 자아중심이므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전제 조건은 "회개"("<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ㅡ막 1.15,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ㅡ행 3.19,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ㅡ행 26.20)이기에 자아중심을 버리는 것이니 그러한 회개의 결단은 주님과 하나됨으로써 자아중심의 "죄의 몸"(롬 6.6)이 "멸해지는"(:6) 것이 현실화함인데도 여전히 이전처럼 자아중심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질 때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할 것이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림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들에게 나음은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응하였다"(벧후 2.20-22)가 될 뿐입니다. 

이 <죽음>의 세상에서는 주님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의 <죽음>의 대상이 되는(골 1.24) 것 이상의 최고 영예는 없어

 



이 죽음의 동물성 육체는 미력이나마 주님의 고난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뜻에서는 최대의 가치


성경에 "한 때, 두 때, 반 때"로 상징된 "천사의 복음"(계 14.6)을 통해 전파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믿어 참으로 성령을 받아 모신 각자 "성령의 성전"(고전 6.19)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종전과 같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자칭 "구원 받은 자"라는 자기 기만이 아닌), 위의 계시록 12.14에 적시한 대로 하나님 은혜로 "양육 받아"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4.24/골 3.10)되어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갈 5.25) 상대방증심의 일관된 자세일진대 모두가 "성인들(saints)"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은, "또 <저들을 위하여 제가 저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요 17.19) 하신 것처럼, "<상대방을 위하여> <내 스스로 노력하는> <내 의지력>과 관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게 "사랑"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 가능한 일이 "거룩하게 됨"이니 어려운 일도 힘든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 5.3) 함과 같습니다. 

사탄의 속임수로 인해 비정상이고 병적인 자아중심에 너무나 매몰되어 있기에 "거룩함"을 마치 어마어마하게 불가능한 무엇인 양 여기는 당치도 않은 선입견에 우리는 더 이상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무턱대고 "살았으니 이왕이면 잘 살아야 한다"는 맹목적인 세상("삶"에 대한) 사랑이 그 원인이라, "돈을 사랑하는" 탐욕에 멋모르고 빠져 허우적거리기 때문에 그런 것뿐입니다. 새파란 청춘이라도 오늘 내일 어찌 될지 그 누구도 모르는 실로 덧없는 이 육체로서의 기막힌 처지에, <살고자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는 것이 실로 "미친 마음"(전도서 9.3)이 아니면 무엇인가요! 

이런 마음을 "미쳤다"고 인식하면서도, 이방 여인들에게 빨려들어 세상 사랑에 허덕이고 빠져 나오지 못해 감히 하나님 앞에 못할 짓을 자행한 솔로몬왕 그 자신! 다윗은 그럴 경우 통회 자복을 했다지만 솔로몬 자신은 그런 기록조차도 찾아 볼 수 없으니! "나"라고 해서 그보다 나을 것 없습니다. "별 수 없이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란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과거 "죄의 몸"(롬 6.6)이 "멸해진"(:6)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애초 거룩하게 의롭게 창조되었던 아담이요 용/이건만, 그렇게 처참한 꼴이 된 것을, 바로 그 사실 앞에서, 우리는 경악하고,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고 있는"(빌 2.12) 이런 현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과 나을 것 없다는 뜻입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과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바쳐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결국)'은 영생이라"(롬 6.22).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어 주셨으니"(롬 6.22).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고전 6.1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한다"(살전 3.1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살전 4.3).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은 것이다"(히 10.10).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상속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너희는 말씀하신 자를 거역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라. 땅에서 경고한 이를 거역한 저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그러므로...은혜...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것이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다"(히 12.14-29). 

거룩함의 본질을 이상 말씀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천사가 가진 복음"을 통해 처음부터의 복음(사탄의 거짓말인 "바벨론 신학"이 아닌) 듣고 믿는 "하나님의 백성"(계 18.4)들은 이 글 모두에서 밝혀진 대로 곧 닥칠 적그리스도 아래에서 영광의 순교를 할 것이 예정되어져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환란의 날이 오기 전 하나님 백성을 단련/정련 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십니다.

고로 "천사의 복음"으로 "양육 받음으로써"(계 12.14) 연단된 우리는 마지막 복음 전파의 이 황금 시기에 가일측 기도/전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 때가 지나면 곧장 주님 재림의 영광의 날이 오므로 더 이상 "일할(하나님 앞에서 온 천하보다 소중한 영혼을 건져내는)" 기회가 오지 않으니까 실로 막중한 무게의 이 시간들인 것입니다. 








2026년 1월 20일 화요일

하나님의 택하심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서 비롯되는 것

 


"(나사렛 예수)...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주신 바 되었거늘 너희가...못 박아 죽였으나"(행 2.22,23).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니"(벧전 1.2).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택하심")/"예정"은 "미리 아심"을 근거로 하심입니다. 즉 구원 받을 사람이 복음을 듣는 경우 자기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게 될 것을 <미리 아시기>에, 아무쪼록 그 "믿은"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아무런 불가항력적 방해나 장애를 부당하게 받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조처해 주시는 것이 미리 "택하심", "예정"이신 것입니다(행 3.20/4.28/엡 1.5,9/3.11). 이는 어버이로서의 창조주되신 위치에서 너무나 당연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내가 택하심을 받지 못했다면 또는 혹 네피림 중 하나라고 한다면 아무리 믿으려고 또는 믿음 지키려고 용을 써보아야 헛수고가 아닌가" 하는 망상에 젖어 있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 잡념은 악령들이나 집어 넣어 주는 것이니까. 내가 내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여 순종하는 한 그것이 바로 내가 택하심 받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와 같이 그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을 샅샅이 꿰뚫어 보시고 미리 아시는 분이므로 인간 생애를 관장하는 3운법칙도 인간 창조 당시부터 얼마든지 정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담을 신령한 몸으로 만드셨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범죄하여 애초의 동물적 육체로 회귀해버릴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라멕의 살인 행위를 보시고 나서야> 인간 생애를 이같이 주관하는 조처를 취하심이 아닌 것입니다.

먼 훗날 이 세상 "마지막 때" 21세기에 이르러, "천사의 복음"이 선포될 필요성을 미리 아시고 그에 상응하는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위해서 미리 준비해 두셨던 일련의 작업이셨던 것이니, 즉 3운법칙을 정하시게 된 이유 그 배경적 상황을 이같이 <일부러> 보이시는 그 명백하신 자취와 흔적을 나타내심으로써 이 세대에 각자 직접 하나님을 확증하도록 해 주심이었던 것입니다. 이 깊은 의미를 마땅히 제대로 음미하고  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천사가 가진 복음"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임을 전지구 인류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한 가시적 증표이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동선/動線(움직이심)과 동기/動機(그 움직이심 또는 역사/役事하심의 목적) 그 자체를 목도/目睹케 하심입니다. 이를 명명백백히 입증하여 확인시켜 즈심이니, 이보다 더 정확한 족집게 하나님 <실존>과 그 모든 <말씀의 진실성> 확증이 또 있으리요! 이러한 면에서 가히 인류사 최대의 "표적과 기사"(요 4.48)라 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하신 대로, 이 모든 "표적과 기사"가 주님께서 친히 (이제는 성령으로) 행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마지막 때 마치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과 같이 새롭게 하나님을 확인하게 해 주셨으니, 때문에 계시록에 이 사실을 가리켜, 새삼스럽게 전지구적 규모와 범위로 하나님 소개를 이제 비로소 하는 듯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한 것입니다. 2천년 가까운 사탄 일당의 "바벨론 신학"의 "영적 죽음", "대신 죽음", "로마서 7장", "행함과 믿음에서의 '말씀 혼잡'" 등 첩첩이 쌓인 엄청난 온갖 거짓말을 깨뜨리고 뒤늦게 진실과 진리를 정상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보통의 작업이 아니기에, 이같은 미증유의, 일찍이 없던 "표적과 기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2026년 1월 17일 토요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21세기 "표적과 기사"

 


세상은 아담 범죄의 결과로 "거짓말의 아비"("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자아중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함이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자아중심]>으로 말함이니 이는 그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다"ㅡ요 8.44) 사탄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음을 항상 의식하는 것이  진리(거짓이 아닌)를 아는 우리들의 <세상 거짓과 속임수>에 대처하는 크나큰 자산(밑천)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니엘의 21세기 예언("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빠르게 왕래하며 지식이 더할 것"ㅡ단 12.4)대로 교통 통신 등 분야의 급속 발달(이 모두 주님의 재림에 대처/대비하는 사탄의 초능력의 일환)로 인해 사탄의 거짓말/속임수가 어지러울 정도의 소위 "정보 홍수"를 이루어 범람하고 있는 이 때 그 계략에 속절없이 말려드는 낭패를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 일당들은 거짓말만 나불거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수작을 통해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소모시키는 것도 그 전략 중 하나이기 때문. 따라서 21세기 "천사가 가진 복음"의 충성된 전파자인 우리들로서는 성경상으로 충분히 밝혀진 천사의 "표적과 기사"(요 4.48) 즉 3운법칙 관련의 방패(shield)만을 들고 있어도 우리 소임을 다하는 오늘날 전투 현장에서 일보도 밀릴 이유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과 그 말씀이신 성경의 <진실성> 관련해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력입니다.

고로 흔들림 없는 요지부동의 자세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to give ourselves continually to)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악령들은 중점적으로 기도를 방해합니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기도의 실질적인 위협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파에서 교회 사상 괄목할 만한 업적을 기록한 역대 인물들은 예외 없이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배경이었고 기도의 산실/産室(birthplace)로부터였습니다.

"너는 범사(매사)에 그를 인정("쉬지 말고 기도함으로써"ㅡ살전 5.17)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 "In all thy ways acknowledge him, and he shall direct thy paths."(KJV)


본격적인 기도자는 "하나님을 돕는 자"

기도에 본격적으로 힘쓰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스스로는 "구원 받았다" 또는 <대형교회 교역자>라 하여도, <싸울 줄>도 모르고 <일할 줄>도 모르고 그냥 무용지물. 세상에서 무용지물이라 천국에도 무용지물일 터이니 그냥 천국 입국 사절. 그냥 '놀고 먹는' 사람이 많은 것이 오늘날 "교회"의 일반적 특징이니 그대여, 너무 늦기 전에 각성하시라. "여호와의 사자(使者)의 말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강한 자, 이스라엘의 원수)를 치지 아니함이라" 하였다"(사사기 5.23). 영적 전쟁이 한창 치열한이 시대에 기도로써 "하나님을 돕는" 것이다. 성령으로 오늘도 우리 인간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신음 중에) 간구하시는" 성자 하나님을 도와 드림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다. 그가 출가한 후 7년간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더니 마침 이 때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니"(눅 2.36-38).

이처럼 지극 정성으로 하나님 섬긴(기도로써) 하나님의 여종이라(19세에 결혼했어도 당시 나이 100세를 넘겨),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세상에 오시는 구주님을 영접해 맞는 지구상 단 두 명의 영접사 중 하나로 뽑아 주셨으니 그 영예/영광이야 하늘을 찌르듯 드높다. 과연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기도하는 심령을 얼마나 소중히 보시는지 그 좋은 본보기라 할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이런 설명을 덧붙일 리 없다. 이를 통해 오늘날도
<성령의 메시지>를 우리는 듣게 된다. 그대여, 이 교훈의 소중함을 부디 마음 속에 새겨 두시라. 




2026년 1월 16일 금요일

기도 않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무식의 극치


3운법칙이 아담 범죄 직후 즉 세상("세상"이라 함은 인간이 아담 범죄로 부득불 동물적 육체로 움직여 구차히 명맥을 이어가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지구상의 무대'를 가리킴)이 갓진행되기 비롯하던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데에 이 대목에서의 6하원칙 적용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다름아닌 그 "누가(HO"의 정체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아주 강력하게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동물성 육체의 본능 곧 "죄의 몸"(롬 6.6)에 지배되어 짐승처럼 설쳐대는 판인지라 이 "인간 짐승들"을 3운법칙이라는 운명의 우리(cage) 안에 가두어 두심이니, 인간의 이 야수성을 제재하는 역할만 아니라 이로부터서의 보호 구실도 겸하여, 시도 때도 짬도 없이 죽음을 당하는 만행(가인의 아벨 살해와 같은)의 비극이 없도록 조처하심입니다. <죽을 때>가 되어야 죽도록 "죽음의 때"를 정해 주심입니다. 실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살풍경의 인생 무대입니다. 이런 짐승 같은 날파리 목숨이지만 그마저 '삶'이 아닌 '죽음'의 비탄스러운 연출 공간이 이 세상. 


이같이 <세상에서 나그네>된 우리의 실상을 알려 주고 경고하기를 성경은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일구월심 자기의 근본인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마음뿐 달리 다른 마음은 눈곱 만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고향"이라 함은 애초 인간을 창조하셨던 그 <신령한 몸>. 이 세상은 주님이 실상을 밝히신 대로 "죽은 자"(마 8.22)들의 집합소. 뿐 아니라 악한 영물 용/의 지배 아래 있어(아담이 하나님의 말씀 대신 악마의 거짓말을 더 추종함을 인해 자초한 것) "이 세상 신/"(고후 4.4)의 왕국. 따라서 세상 삶에 연연하여 "남 밑지지 않게" 살려고 "개밥의 도토리 신세" 면하겠다고 끙끙대는 이마다 "천국"(신령한 몸으로의 환원/복귀ㅡ눅 9.27) 영구 탈락입니다. 결과론적으로 죽음과 사탄의 세상에 속하려고만 애썼으니 그 원대로 사탄과 함께 불못으로 들어가는 것뿐. 


그러하나, 이 엄청난 비극의 현장인 세상 실상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구제책인 "은혜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도리를 만인간에게 화급하게 알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알려 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면, 왜 주님께서 세상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히 5.7)을 올리셨던가요? 왜 지금 성령으로 계시면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롬 8.26)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인가요? 마치 우리 구원이 아직 <미완성>인 것처럼? 


그렇습니다.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머리이신 주님께서 그리하셨으니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있는 우리 각자도 머리되신 주님과 동일 보조를 취하지 않고는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는 엄중 경고임을 반드시 <뼈저리게>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초대교회 당시 말씀 전파의 업무를 전담하던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행 6.4) 한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기도를 아 세웠슴니다. 왜 그렇게 기도가 필수이냐, 우리가 아는 대로 사탄이 이 세상 신으로서 세상을 직접 지배함이 그 이유입니다. 치열한 전쟁 상황인 것입니다. 그 현격한 예시가 오늘날 드러난 "바벨론 신학"의 엄청난(거의 2천년간에 걸친) 횡포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감히 일개 피조물인 악령이 훼방을 놓다니?"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벌어들인 화근이요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범죄자 사탄의 거짓말을 더 따른 당연 결과가 "죽은 자"됨 곧 '동물성 육체로의 전락"과 '사탄의 인생 지배'인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인간 세상이 존속하는 한 사탄의 인간 지배는 존속하는 것이요, "바벨론 신학"과 같은 거짓말은 그 기세를 떨칠 수밖에 없는 세상 구조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현재 구원의 은혜는 다름아닌 <하나님(성자) 친히 '죽은 아담'을 대신해 아담 역할을 하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역사이시므로 그래서 사람되셨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원수 사탄과의 전쟁"(창 3.15) 중이신 것입니다. 아담 스스로가 자기 범죄로써 사탄의 명맥을 이어 주고 기승을 부리도록 만들어 준 꼴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의 양상은 원수에게 먼저 발꿈치를 물리고 그 뒤에 그 머리를 발로 으깨어버림으로 끝남이기에 지금까지 그 물린 고통 중에 있는 전황이요 마침내 주님 다시 오심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어 머리를 밟아버리게 되므로 사탄(그 패거리 악령들과 함께)은 무저갱에 천년간 유폐되고 네피림 무리들은 불못으로 모조리 들어가 영구 청산되는 그런 전투인데 아직 재림파시지 않은 것입니다.


왜 "천년"이냐 하면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세상을 통치할 기간이 천년이었기 때문에 그 기간을 "마지막 아담"께서 비로소 채우심입니다. 아담이 범죄 않고 살았다면 그 천년간 세상을 다스리며 악인과 의인 및 악령과 거룩한 천사를 "마지막 심판"으로 가려내어 악한 자들을 불못에 던져 넣어 세계를 완전 정리해 변치 않는 영원한 왕국이 비로소 전개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범죄로 수행하지 못했던 바로 이 일을 새 아담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 이행하심이 메시야 예수("구원자"란 뜻의 히브리어) 우리 주님의  "천년 왕국"입니다. 사탄 일당이 무저갱에 있다가 이 천년 말에 방면되어 난동을 피우게 되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지 않아 세상을 통치했더라도 천사 가운데 용과 같은 악령들이 생겨 기회를 엿보다가 천년이 끝날 즈음에 필연적으로 반란을 노리게 마련이므로 이와 대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사탄 일당(숱한 악령의 씨들인 네피림 포함)의 지배 아래 놓인 세상이라 그리고 이것이 아담 범죄의 불가항력적 결말인지라, 이들 악의 세력이 <사생결단하고 인생 구원을 막고 방해>하므로 하나님 친히 그 크신 사랑의 구원을 이루셨다고 전부가 아니니 절대 <안일한 생각은 금물>입니다. 여기서 기도의 필요성이 절대적입니다.


발꿈치 물린 상황의 치열한 싸움의 발로가 이 "기도"로써 표출됨이니 이것이 지금 거론되는 기도의 중요성인 것입니다. 기도가 없다는 것은 전투를 포기하고 적에게 바로 투항하는 것이니까. 기도 없이 말씀 전파만 강행하는 것은 심각한 백해무익의 자기 기만임을 알아야 하는 것. 


이 경우 사탄 일당의 세력을 아예 싹쓰리 제거하시면 되지 않는가 한다면 그렇다면 아담의 범죄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가 되기에 원리원칙대로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의미와 그 중차대함을 마음 깊이 아로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의 마술에 걸려 대부분 아이들처럼 굴었던 <철부지 코흘리개>였던 것입니다. 



2026년 1월 15일 목요일

육하원칙에 의한 21세기 "표적과 기사"(요 4.48)



거룩하신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가 명확히 육하원칙(六何原則)에 의해서 발표된 것은 유사이래 최초이자 마지막(주님 재림 전으로는)입니다. '육하원칙'은 기사나 보고서 등 신뢰성 있는 글쓰기에서 필수적으로 다루는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어떻게(How), 왜(Why)의 6가지 핵심 요소를 말하는 바, 글의 기본적인 뼈대를 잡아주는 중요한 원칙(영어의 "5W1H[Who, What, Where, When, Why & How]")입니다. 이 6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글을 구성하면 정보 전달이 명확해져 글의 완성도가 높아지므로 교육과 실무에 널리 활용됩니다. 

여기 "6하원칙 하나님 표적과 기사"는 다름아닌 "21세기 표적과 기사" 중 하나인 3운법칙을 말합니다.

• 누가(Who): 행위의 주체.....1. 하나님
• 언제(When): 사건 발생 시점.....2. 인류가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으나 아담 범죄 결과로 "육의 몸"(고전 15.44) 즉 "죽은 자"로 돌연변이하면서부터 그 초자연적 특성의 기운이 한동안 잔존했던 현상으로서 그 결과 노아 당시까지도 천년 가까운 수명이었을 때
• 어디서(Where): 사건 발생 장소.....3. 시기심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던(창 4.6) 현장 및 "소년"이 라멕에게 달려들어 해치려 하자 라멕이 자기 방어로 엉겁결에 소년을 쳐 죽인(4.23) 두 살인 현장
• 무엇을(What): 사건 내용 즉 대상.....4.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 생애를 말함이니 다시 말해 일정 연령에 달하면(18,9세가 넘으면ㅡ프랑스의 쟌다르크 소녀가 현재 그 대표적 예)
• 어떻게(How): 사건 진행의 방식.....5. 만유의 기본 원리인 3위1체의 법칙에 기반한 3운법칙으로 LP(활동기, 전성기), DP(비활동기, 침체기), JP(유청소년기ㅡOT, SN형에만 적용되고 FS형은 3위1체 도식/圖式 다시 말해 성경에 "한 때, 두 때, 반 때"로써 미리 예언되어 있었던 형식에 맞추어져 제외) 따라 철저히 통제 관리됨으로써(그렇게 되도록 모든 인간의 운명을 처음부터 미리 정하심)
• 왜(Why): 사건의 이유 즉 원인.....6. 가인과 라멕의 경우처럼 어느 누구든 사람 목숨을 함부로 끊어 놓지 못하게 철저한 보호막 울타리를 쳐놓으신, 마치 이 모든 것을 카메라 렌즈로 "아담 영상(ADAM pix)"의 DPA(Devils' Practical Appearances), NSO(Nephilim Soul Orbs)가 촬영된 것처럼(사진처럼 완벽한 증거는 없어) "촬영된"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의 가시적/可視的 <실물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보다 격조 높은 "표적과 기사"는 없기에 이 "마지막 때" 유사이래 최초의 "21세기 표적과 기사"라 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실존> 및 그 <역사/役事하심>의 200% 확증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거듭 거듭 강조하신 것이 "구하면 이루어 주신다"는 역속이십니다. 물론 자아중심의 이기적 기도가 아닌(자아중심으로써는 이 하나님의 우주에 살 영적 존재가 없어ㅡ약 4.3) 오직 상대방중심의 "새 생명"의 "새 사람"인 경우에만. 왜냐 하면 악령들도 초능력으로 "기도 응답"인 양 얼마든지 속일 수 있으므로 오늘날 "응답" 자체에다 어떤 비중이든 두지 말아야 합니다(마 24.24). 내가 주님 은혜로 새 피조물이 되었는지 여부는 성령 친히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증거하시니까(롬 8.16).










2026년 1월 14일 수요일

로마서 8장 26,27절의 <성령의 기도>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심이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기도할 바를"ㅡ개정개역)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다"(롬 8.26).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NIV-1984) "Likewise the Spirit also helpeth our infirmities: for we know not what we should pray for as we ought: but the Spirit <itself> maketh intercession for us with groanings which cannot be uttered."(KJV)

"마음을 감찰하시는("살피시는"ㅡ개정개역)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심이니 이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다"(:27).

"And he who searches our hearts knows the mind of the Spirit, because the Spirit intercedes for the saints in accordance with God's will."(NIV-1984) "And he that searcheth the hearts knoweth what is the mind of the Spirit, because he maketh intercession for the saints according to the will of God."(KJV)

[아래 "새번역"은 권장할 만한 것이 못됨을 두 가지 점으로 지적한다. "위하여"를 왜 굳이 "대신하여"라 하나? "대신하여 죽으심"이라는 오역의 여파인 것 같다. 우리말 어감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시니까 우리들 자신은 형제들이나 다른 사람 위한 기도에 그다지 관심 두지 않아도 된다"는 큰 일 날 소리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왜 "사람의 마음"이라 하나? 이 대목에서 가리키는 것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신 바, '성부"께서는 사람의 마음은 물론 "성자'의 마음도 아신다는 의미이다.]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위 영역에서 NIV는 "친히 간구하신다"에서 "Himself"라 했고 KJV는 "Itself"라 했다. 흠정역은 원어에 충실하다는 정평이 있다. 필자는 성경을 반드시 열심히 읽어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원어 공부 생각은 일절 없었던 것은, 그렇게 되면 거의 사람마다 무조건 원어를 접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불필요한 인식 조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 하나님 친히 살피시는 성경 번역 사업이라 확신했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감리 감독하시니까 단지 영역(KJV)만 참고해도 충분하다 생각한 것이다.

KJV가 성령 관련해 인칭대명사(Himself)를 쓰지 않고(이런 경우에서만)
 "it"로 받은 것은 원문에 그렇게 되어 있음이라 보는 것이다. 그럼 원문 집필자인 바울 사도는 왜 그렇게 표현했느냐 하면,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고전 2.11)이라 했듯이, 사람과 그 영혼을 분리해서 설명한다고 가정했을 경우 둘 다 인칭대명사로 설명할 수 없어 부득불 "영" 관련해서는 "it"로써 구별할 수밖에 없음을 감안했던 무의식적 판단으로 그리 되었으리라 보아도 무방하다는 결론.

하나님께서도 그런 정도야 크게 흠 잡을 이유가 없다고 보셨을 수 있고. 필자의 과문 탓인지는 모르나 성령 관련해 이런 식으로 성령을 지칭한 예는 이 하나뿐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성령"은(여러 차례 설명했듯이) 하나님 성부 및 성자께서 "하나"(요 10.30)로 계심이다. 그러나 성자께서 성부의 형상 곧 <형체>이신즉 <실체>이신 성부보다 항상 전면/前面에 <나타나심>(말 그대로 "형상"ㅡ고후 4.4/골 1.1이시니까)을 감안할 때 이 대목에서도 "성령"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다. 곧 메시야 예수 주님께서 그와 같이 우리 각자를 위해 간구하심이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심"이니, 여기 탄식은 영역에서 "groans"이다. '고통, 불행 등으로 인해 내는 "신음(소리)"을 뜻하며 깊고 긴 소리로 아픈 소리뿐 아니라 극심한 심적 불편을 표현함'이다. 부흥 전도자 찰즈 피니 목사와 마치 그 그림자처럼 함께 하며 기도자로서 7년간 일관되게 동역했던 대니얼 내쉬(Daniel Nash) 목사 역시 그와 같은 기도의 표본이었다. 주님께서 
육체로 땅에 계실 때도 "심한 통곡과 눈물(strong crying and tears)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던"(히 5.7) 그대로다. 기도가 이 정도되면 자연스럽게 금식 기도로 진전하기도 하는 것이다. 

2026년 1월 13일 화요일

"그래도 이같이 내가 이루어 주기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에스겔 36.36-37.
모든 일은 
기도로써 시작됩니다.
지금까지는 오늘날
전파되어야 마땅한
말씀의 윤곽이
정해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며,
제는 이 말씀이
성령의 능력으로
전파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러,
가장 먼저
기도에 전념할
시간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합심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저희 심령을
감화 감동시켜 주시기를,
저희 심령을
감화 감동시켜 주시기를
간구하옵니다."


성경의 서릿발 경고

성령울 선물로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가 구원되는데 주님 친히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시어 내 안에 오심으로 나와 "한 영"이 되시는 까닭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 회개의 세례를 받음으로 먼저 죄부터 용서가 되는 것은, 죄가 그대로 있는 더러운 자리에 성령께서 임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 죄 용서 받는 것은, 믈론 회개했으니까 즉 향후 절대로 죄짓지 않으리라(하나님 말씀에 절대 복종하리라) 하나님 앞에서 다짐했으니까 이를 근거로 용서하심이니, 실제로는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 되는 모든 일이나, 우리의 회개를 믿어 주시고 수용해 주시어 앞당기시는 조처이십니다. 

여기서 명백히 나타나는 것은, 이후부터는 하나님 뜻대로 하겠다는 우리의 결의(회개)의 중요성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행하겠다> 즉 "행함, 행위"의 순종인 것입니다. 멸망의 바벨론 신학 즉 사탄의 거짓말은, <죄인이지만 즉 죄 짓는, 죄 지을 수밖에 없는 그대로> 주님께 나아오지만 그래도 구원 받으니까 그래서 "은혜"라는 너무나 황당하기 짝이 없는 궤변에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 즉 불순종힘으로 "죽은 자"가 되었으니, 이제 "산 자"가 되려면 불순종이 없어야 즉 죄 짓지 않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주님과 "한 영"이 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우리의 구원도 당연히 "짝의 원리"를 따름이니 즉 "하나"됨에서는 반드시 상대방중심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자아중심일 수가 없습니다. 남녀 "한 몸"됨에서 남자 몸이 여자 것이 되어 여자만 위하고 여자 몸 역시 똑같이 그러한 이치와 같습니다. 즉 주님과 내가 "하나"되는 원리를 따라 나를 구원하심이니,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내 것이 되도록 나를 위하심이었고, 나 또한 주님이 그 피값으로 사신 것이 되어 주님의 것이 되니까 절대 순종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머리는 몸 위하고 몸은 머리 위함으로 '한 몸', "하나" 됨입니다. 성경에 그래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남자에게서 여자가 났으니까)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성자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셨으니까)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성부)이시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이시니까 몸이 머리의 지시대로 따라 행동하는 것 자체가 생명입니다. 머리를 떠나서는 몸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행함, 행위"인 것입니다. 믿음으로써 "죽은 자"가 이제는 "산 자"가 되었으니 너무나 당연하게 산 자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행함으로 구원되지 못한다" 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 "죽은 자"의 처지가 된 실상은 모른 채 따라서 구약시대에 그렇게 강조했던 희생제물의 <형체>적 의미의 그 <실체>이신 메시야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 자"됨이 급선무인데도 이를 무시하고 무식하게도 무턱대고 <계명 지키는 순종의 행위>를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가 무슨 행동을 한단 말인가요.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나요. 

원래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우리 피조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하심이지 하나님 자신을 위하심이 아니니 이것이 3위1체로서의 생명의 법칙인 것입니다. 만사가, 만물이 이 원리에서 한 순간이라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면 서 지 못하고 무너지는 판이니까. 악마 사탄의 자아중심이
그리고 아담의 범죄가 어떤 폐악과 비극을 끼쳤는지 역사가 증언합니다. 동물성 육체가 자아중심인 것은 기계적이라 자유의지의 자기 선택에 따라 움직이는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자아중심)에는 예컨대 사탄처럼 고의적으로 짓는 것이 있어 이는 용서가 안됩니다. 반면 아담의 범죄로 "죽은 자" 즉 동물성 육체가 됨으로써 인간은 "죄의 몸"(롬 6.6)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불가항력적 측면이 있는데 
이는 메시야 우리 주님 친히 성령으로 우리 각자에게 임하심으로써 "하나"(요 10.30)됨의 이치를 따른 전적인 상대방중심의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함"(갈 5.25) 인지라 완전 극복됩니다. "주님께서는 영이시니 주님의 영(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는"(고후 3.17)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유의지에 따른 <사랑>과 직결되기에, 사랑이 식어지면 자아중심으로 흐를 수밖에 없어 성경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서릿발 경고를 발하는 것입니다.

"천사의 복음"과 "천사의 표적과 기사" (2)

"천사가 가진 복음으로 오늘날  백일하에 드러나는 사탄의 사악한 거짓말은  여러 가지로 간추릴 수 있지만 우선 네 가지로 정리하게 되는데, "아담의 <영적> 죽음"(아담이 산령한 몸으로 창조된 사실을 부인),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함께 죽으심"인데도), "로마서 7장을 바울 사도의 <거듭 난 이후>의 개인 체험"(롬 6.6의 "죄의 몸"의 비극을 극적으로 설명함에 불과한데도)이라고 하는 것, "우리의 구원 받음에서 믿음과 행함을 2분법으로 갈라내어 행위를 철저히 배제시킨(행함은 믿음의 당연 결과로서의 순종[행위]임에도) 억지 주장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은혜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말짱 헛것이 되어버립니다. 사탄은 이 점을 노려 이같은 거짓말을 주입시켜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사랑하여 성경을 부지런히 찾는 사람 즉 성령의 계시하심을 확신하는 이들은 이런 거짓에 쉽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못할하고 소위 "신학"에 매달릴 경우 이같은 악한 자의 감언이설에 넘어가게 마련이며 따라서 백날 믿어도 소용 없고 백 번 "믿습니다" 외쳐도 허공의 메아리일 뿐 영생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의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천사의 표적과 기사"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 3위1체이니 곧 "짝의 법칙"인 것입니다. "짝"이라는 말 자체가 3위1체 곧 "'상반'이 '상보'"(CONTRARIA SUNT COMPLEMENTA)임을 가리킴이라 "짝을 이룬 둘은 반드시 '둘'이 아닌 '하나' 즉 주님 친히 말씀하신 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 하신 그 "하나"가 언제나 주축을 이루는 것이 특징임을 우리는 기억할 일입니다. "남녀가 짝울 이룬다"는 말도 "한 몸"됨을 전제함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만물을 지배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자연법칙도, 인간 생애를 주장/주관하시는 3운법칙도 서로 별개가 아니라 똑같이 이 3위1체를 기본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한 하나님, "하나"이신 하나님의 부정할 수 없는 <뚜렷한 발자취>이심을 100% 단정하기에 충분하니 전도에 적극 활용합시다. 자연법칙에서는 '미시세계' 양자역학이 그러하고, 3운법칙과 짝의 법칙의 상호 검증은 같은 맥락으로 분명히 '거시세계'에서 그러합니다. 

이러한 3위1체를 최초로 과학적 견지에서 간파해낸 닐스보어였던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자기 평생의 업적 평가라 할 수 있는 <자기 가문 휘장에다가 위의 문구와 태극 문양을 대서특졀하듯 새겨 넣었다는 것>이야말로(아래 그림) 그가 얼마나 이에 대해 확신에 차 있었음을 웅변해 주는 것이기에 필자 개인의 소견으로는 현대 물리학적 측면에서나 인류사적 가치에서나 아인슈타인보다 더 혁혁한 공적을 쌓아 올린 인물이라 판단하는 것입니다. 




2026년 1월 9일 금요일

NSO (중복 게재)

 https://trinia5.blogspot.com/search?q=NSO

https://trinia5.blogspot.com/search?q=NSO

천사의 복음의 막강 무비의 권위

과학("자연과학"이란 말 그대로 초자연계 관련해서는 전연 무지몽매한)이 이루지 못한 대업적을 일구어 낸 것이 오늘날 "아담 영상/影像·映像(ADAM pix)"입니다. 왜냐면 과학이 감히 손도 대지 못한 <초자연계의 실존>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 단박입증해내었으니까. 촬영자의 의도적 작품이 아니고 전혀 뜻하지 않은 순간에 <찍혀져 나온> 것이므로 이는 반드시 하나님의 손길로 되어진 일이라 단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재림의 때인 오늘날 21세기 "천사가 가진 복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니 즉 천사의 "표적가 기사"의 일환입니다. 새삼스럽게 "천사의 복음"이니까 그 권위를 천사들 스스로 입증하는 차원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하나님의 아들들, 상속자)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히 1.14)이라 했습니다.

지금까지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어 왔다면 사도들의 초대교회 이후 장장 2천년이나 흘러 간 세월인데, 주님 재림에 즈음하여 난데없이, "천사가 큰 소리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 땅, 바다,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계 14.6,7)고, 마치 처음으로 하나님을 알리듯이 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구원을 알고 직접 구원된 사람들이 그 받은 바 은혜를 알리는 것이 제격이고 당연 도리이지 천사가 직접 끼어든다는 것은 비상 사태에 처한 경우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과연, <비상 사태>인 것입니다. 21세기를 지목하는 예언인 계시록에 느닷없이 "하늘에 전쟁이 있었다"(12.7-9)고 한 것이 그 증거. 즉 천사 미가엘군/軍이 사탄 일당을 꺾고 승리한 여세를 몰아 "천사의 복음"(계 14.6)이라는 새 장/을 마침내 열게 된 사연인 것입니다.

이런 내용도 다니엘 예언 "마지막 때"("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신속히 왕래하며 지식이 더할 것이다"ㅡ단 12.4)와 겹칩니다. "봉함/封緘한다"는 것은 예고한 그 시기가 당도해서야 그 예언 성취의 시점을 정확히 알게 됨을 말합니다. 바로 오늘 21세기. 교통·통신 분야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고, 첨단 지식은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의 거짓 속임수 "다른 복음"("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ㅡ갈 1.6)에 거의 2천년간이나 사로잡혀 있었던 것을 말함이니, 이는 우리 모두에게 충격적인 것으로 지금에야 알게 됨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할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이니까 으레 사도들이 처음 전파했던 말씀 그대로인 줄로만 알았지 달리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이 세상 신/神"(고후 4.4) 사탄이 옛 에덴에서처럼 황당무의 거짓말로 "꾀어"(계 12.9) "영적 죽음", "대신 죽으심" 따위로 거의 2천년 간이나 세뇌시켜 왔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요! 바율 서도 당시부터 이미 자행되어 온 "다른 복음"과 같은 이런 "말씀 혼잡"(고후 2.17/4.2)을 우리는 "바벨론 신학"이라 구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정작 요긴한 성경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내가 전한 복음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습니다"ㅡ갈 1.15/눅 10.22)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인간의 학문(신학/神學)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유의하지 않은데 대한 당연한 대가/代價가 "바벨
론 신학"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의 말씀과 같이, 또 "이 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어 말씀하시기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옳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눅 10.21) 하심과 같이, 학문으로 접근하는 자에게는 과연 "숨기셨음"이 이로써 입증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마지막 때가 이르자 천사들이 직접 나서서 그와 같은 사탄의 방해 책동을 일전/一戰을 불사하면서까지 분쇄 제재했겠나요.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고 성령의 계시가 아닌 학문으로만 일관하려 했던 고집, 인간들의 오늘날까지의 모든 오만함과 헛수고에 대한 결말은 이러한 사탄의 거침 없는 책동이었던 것입니다.

"영적 죽음" 따위 허무맹랑한 소리만 하게 만들었고 "삼위일체" 하나도 시원하게 그 의미를 풀지 못한 채 오늘 이 시간까지 사탄의 거짓말에만 질질 끌려 다니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21세기 "천사가 가진 복음 전파"의 때에 와서야 모든 진실이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천사의 복음"과 천사의 "21세게 표적과 기사"를 오늘날 처음으로 말한다고 해서 어떤 특이한("천사"와 관련된) 기이한 무엇을 접하거나 한 적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나 두드러진 상황은 있었습니다. 악령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증언도 직접 목도했기에, 주님의 뜻이라 믿어 세상 앞에 공개하는 것입니다.

천사(사람으로 변장한)를 대면한 사람들은 역사상 간혹 있었어도 마귀를 통째 실물로 구경한 사례는 유사이래 처음이므로 이를 세상에 공표하는 것은 실로 유의미하다 생각합니다. 악령들이 천사들과의 결전/決戰에서 완패한 후(계 12.7-9) 완전히 힘을 잃어 <천사의 의도대로 따를 수밖에 없이 되어> 스맡폰 카메라에도 찍혀졌다는 것이 개인적 판단입니다.

영물의 생생한 그 육질/肉質"(천사든 악령이든 공통이니 사람도 악인이든 의인이든 똑같은 것처럼)까지 세상 앞에 여지 없이 드러나는 등 "사상 초유/史上初有의 초자연계 무대의 진기명기/珍奇名技"의 연출이기에 "아담영상/影像(ADAM pix)"도 가능해진 것이고 또 그만큼 그 의의가 대단한 것입니다. 

아래 링크 참조:
https://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trinia&from=postList&categoryNo=74

누가 과연 "이 세상 신"들의 거동을 세상에 <실물>로 구경시키는 등의 일을 할 수 있겠나요. 천사들이 개입되지 않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임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의 막중한 가치를 느끼게 됩니다. 영적/초자연계 실존의 <실물> 증거임을 재차 강조합니다. 모두에서도 밝혔듯 세상 앞에 드러내는 초자연계 자체의 확증/確證 또는 물증/物證 바로 그것입니다.

3위1체가 말하는 "짝"으로서의 상반/相反성 즉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하나님 창조임이 100% 입증되었으니 자연계 물질에만 머무는 현재까지의 과학의 한계까지 뛰어 넘고 그 수준을 훨씬 능가해버리는 실로 경악할 최대 사건이라 할 것입니다. 백 마디 천 마디 설명이나 이론보다 스맡폰 카메라의 비디오가 모든 것을 말하고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듯이 이보다 더한 "정확무오"는 있을 수 없습니다.

NSO(Nephilim Soul Orb, 네피림 망령/妄靈 구체/球體, 귀신의 원형/原形)가 카메라 렌즈에는 나타나도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영적인 것 즉 초자연계 속성임을 100% 입증합니다. 네피림(악령과 인간의 튀기[hyb-
rid]ㅡ창 6.4)이 아닌 아담의 씨로서의 사람의 혼백은 그렇게 떠돌아 다니지 않습니다(마 12.43).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의 주님 말씀대로 마지막 심판 전 일정한 형벌의 장소나 하나님 위로의 안식처에 당분간 수용되니까.

촬영자 본인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천사의 복음" 전달이라는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터에 하나님 앞에서 일말의 거짓이나 속임수가 개입될 여지가 없음을 만천하에 공언/公言합니다. 이 모든 증언과 증거는 오직 믿느냐 안믿느냐, 그 하나로써만 좌우될 것뿐입니다. To belive, or not to believe, that is the only question.
 
무어니무어니 해도 "아담 영상"과 같은 성격의 모든 내용 중에서 단연 압권인 것은, 첫째 1908년 6월의 시베리아 퉁구스카 대충돌 사건 및 당시 용의 지상 추락 광경을 진술하는 그 곳 주민들의 목격담, 그리고 또 하나는 2001년 8월 미국 NASA 우주선 디스카버리호 카메라에 우연히 찍힌 용(거대한 뱀으로 나타난)의 실물 사진입니다. 전무후무한 것으로서 이 이상 가는 것이 없습니다.

이상으로써 성경의 진실성은 충분히 입증된 것이며 이 이상의 실물 증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담 영상"은 단지 그 세밀한 부분을 증명해 주는 것뿐입니다.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상반/相反성(짝을 이룸)은 3위1체 법칙으로 이미 입증되어 있는 것으로서 "아담 영상"의 역할은 단지 그 후속적인 추인/追認에 불과합니다.

이로써 (1)<창조주 하나님>과 그 말씀으로서의 (2)<성경의 진실성>은 거의 2천년 묵은 바벨론 신학의 거짓과 속임수를 궤멸시키는 "천사의 복음" 등장으로써 그 '절대'적 과학성/性이 유감 없이 발휘되었습니다. 넉넉한 자세로 복음 전파에 전념할 일입니다. 세상이야 이를 제대로 인정하든 않든 우리가 괘념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만 확고부동의 믿음으로써 우리 임무 수행에 철저하면 나머지는 성령께서 다 하시게 되어 있습니다(고후 6.1).



2026년 1월 8일 목요일

우리의 영적 전쟁의 속성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생각의 바탕)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다"(잠 4.23). "생명의 근원"이 마음의 생각이니 우리는 이 문구를 금지옥엽/金枝玉葉처럼 속에 아로새겨야 합니다. 여러 번 설명했지만 우리 자신을 철저히 이로써 세뇌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반복합니다. "<마음의 생각>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매일 매사 인도해 주시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하고 남을 위하는 제사장 기도로), 항상 기뻐하고(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나는 영원히 혼자가 아니기에 너무나 행복감에 겨워)" 이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다" 및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8.29/20.21) 하신 말씀으로 충분히 설명됩니다.

"모든 일에(궂으나 좋으나 간에 일체 불문하고), 하나님께 감사함(덮어놓고 감사함이 아니라 365일 24시간 매순간 나를 사랑하시어 눈동자처럼 살피시며 위하시는데도 우리는 오히려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무덤덤하게 지내는 것이 실상이니까)으로써(살전 5.16-18) 우리는 각자 우리 "마음을 지키는"(잠 4.23) 것입니다.

마음을 지킴이 이렇듯이 중요하여 "생명의 근원"이 되므로 원수 사탄의 공격 목표이기도 함은 당연 사실. 고로 이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이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에서도 확인됩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절제 있는)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라. 주님께서 가까우시다(오실 때가 가깝다ㅡ이는 <예언>이 아닌 <부단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자주 쓰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이제까지 응답해 주셨으니 계속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기에)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知覺울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빌 4.6).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종말로(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니"(고후 10.5). 어떤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주님께 여쭙고 의논하고(에덴에서 여자가 자기 연장자인 아담과 먼저 상의 않고 독단으로 행하여 엄청난 파멸을 자초함과 같이 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하는 지혜스러움입니다. 시험과 유혹과 악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성경 시편 영역(Ps. 119.113)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I hate vain(원문엔 없다는 표시로 이탈릭체 표기)  thoughts: but thy law do I love(KJV). 우리말은,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로 되어 있고 일부 영문 번역도 그러하나, 위 설명에서도 보듯이 "생각하는 것 자체를 미워한다ㅡto hate thoughts"입니다.

"사람이 생각 자체를 아니한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 해서 그렇게 "두 마음, 운운"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본 뜻은 명확합니다. 왜냐년 그 대칭구가 분명히 "<하나님의 법>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생각> 대비/對比 <주님의 말씀>인 것이니 이렇게 되면 그 뜻이 명명백백히 드러납니다.

즉 스스로 생각해서 또는 생각나는 대로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자세를 버리고 무조건 주님께 여쭈어 묻고(사람과는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것은 귀찮게 여겨 "네가 알아서 해라"로 일관하나, 우리 주님은 반대로 오히려 기뻐하시므로) 오로지 하나님 말씀을 기준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점 우리가 마땅히 머음에 새길 일입니다.

하나님을 과거 믿지 않을 때처럼 그저 막연하게 의식해서는 안됩니다. 똑부러지게 즉 사람되셨으므로 사람 대하듯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도할 때도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느라 끙끙댈 필요가 없습니다. 우주보다 크시어 도무지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일부러 사람이 되어 주시어, 우리 각자와 가까이 하시게 되었으니 곧 예수님이시라고 설명하면 그가 믿든지 안믿든지 설명은 끝난 것입니다.

3위1체 법칙에서 짝을 이루는 것은 반드시 "하나"(요 10.30) 즉 제3위/가 되어 있는 까닭에 사람되신 성자 하나님의 모습은 바로 성부 하나님의 모습이 되어 계심입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또 보이라고 하는 것이냐"(요 14.9).

성자께서 육체(사람)가 되셨으나 그 영만큼은 사람 속성이 아니시고 창세 당시부터서의 성령이시므로("하나님은 영이시니ㅡ요 4.24) 여전히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사람, 사람-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진실과 진리를 알게 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은혜 안에서 한없는 느긋함, 든든함, 넉넉함, 그득함, 여유 만만의 기쁨, 평안을 누리고 전파하는 우리가 됩시다.

2026년 1월 5일 월요일

어느 시대에든 기도자는 존귀하다

카나다 피플 쳐치(People's Church)의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가 사도시대 바울 이후 가장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로 지목한 찰즈 피니(Charles Finney) 목사는 변호사로 있을 때(기독교와는 담을 쌓고 지낸 집안에 태어나) 법 관련 참고서로 성경을 자기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 두고 가끔 보,던 중, 마음 속에 가끔 파동 쳐 오는 것이, "이 모든 것이 진실이라면 '불이야! 불이야!' 소리 치며 교회당 종각에 매달려 밤낮 없이 종을 쳐대야 할 일이 아닌가"였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이 심적 고뇌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이른 아침 사무실 인근 숲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도했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데 바삭 하는 소리가 들리자 피니는 황급히 눈을 떴습니다. 그 순간 "만우주의 창조자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자가 사람 눈치를 보다니!" 하는 자책감이 크게 휘몰아치면서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거의 정오 나절 쯤에 기도가 잦아들면서 피니는 부시시 일어나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사무실로 가니 고객이 마침 찾아 왔습니다. 이 때 피니의 반응은, "이제 저는 예수 그리스도 변호를 맡았으니 다른 데 가보시기 바랍니다"였습니다.

크게 당혹감에 휩싸인 손님이 황망히 떠난 후 피니에게는 성령의 세례가 임했는데 그 양상은 이러했습니다. 즉 주님 친히 그 옆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서 계셨을 뿐인데 피니는 그 영혼으로 이를 느낀 것입니다. 피니는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며 그 입에서는 이제까지의 모든 죄가 낱낱이 고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부터 피니는 그 표정 하나로도 사람들을 죄 자백으로 휘몰아 넣는 성령 충만의 능력으로 일관해 갔던 것입니다.

특기할 것은 이 피니의 사역에는 다니엘 내쉬(Daniel Nash, 1763-1837)라는 막강한 기도 사역자가 항상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피니가 29세의 나이로 회개한 후 복음 전선에 즉각 뛰어들 때 내쉬목사의 나이는 이미 50대). 내쉬는 한 작은 교회 목회(Episcopal priest)에서 어느 정도 잘 나가는 편이었고 아메리카 인디안들 상대로 선교 활동도 했지만 피니의 회심/回心 무렵 심각한 안질에 걸려 오로지 기도에만 매달리던 중 지금까지의 미적지근했던 믿음생활을 회개한 후로 피니의 사역을 위한 남다른 성령 충만의 기도(금식과 더불어) 사역에만 7년간 오로지 집중하다가 세상을 뜬 인물입니다.

그에게는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Abel Clary)가 있어 합심 기도했는데, 내쉬는 설교 대신 기도로써 피니의 강력한 복음 전도 사업에 전력으로 힘을 다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하심에는 반드시 기도 사역자를 정하시어 동역/同役하게 하신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아 세상이 원수의 지배 아래 있으니까




 

초대교회 당시 만신창이로 얻어 터지면서도 복음을 전한 바울처럼 오늘날도 외쳐야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사탄의 옛 "에덴/아담"[창 3:4,5]식 거짓말)의 폐해는, 그릇된 구원론 즉 <행위(행함)는 무조건 부정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주장의 속임수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율법(계명)의 행위(순종 즉 계명을 지킴)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교회 내에서 분탕질을 일삼았던 할례 등 "모세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니, 즉 <모세 율법이 생겨난 이유>를 밝힘인데 사탄이 이를 악용해 "말씀 혼잡"(고후 2.17/4.2)을 시킨 것.


고로 오늘날 "천사의 복음"(계 14.6) 전파자들은 이 점에 유의하여 주력해야 마땅합니다. 믿음은 순종을 유발시키기 위한 조건일 뿐이니, 다시 말해 순종은 오직 "산 자"와만 관계된 일로서 "죽은 자"와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죽었는데 무슨 "순종"이 필요한가요? 할 수나 있는가요?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은(독생자 하나님의 죽으심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면서까지), 오로지 이 "산 자"되게 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 자"로서의 순종이라 이 순종이 우리를 하나님 앞 의인/義人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니"(롬 2.13)가 바로 그 뜻입니다. 이 뜻을 모르는 이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데(5.1) 이 무슨 소리냐" 하고 어리둥절해 하겠지만. 문장 독해력이 문제이지 아무  어려운 것도 복잡할 것도 없습니다.

순종을 해야지, 양부의 말을 듣지도 않는데 양자로 입양될 수 있나요? 당장 파양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양자"(롬 8.15,23/9.4)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 그 말씀하시는 모든 분부는 피조물의 생존에 절대 불가결인 생명의 법칙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을 영원토록 향유할 수 있는 최고, 최선의 방법인 것입니다.

곧 상대방중심 즉 "사랑" 다시 말해 주님 설명하신 대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즉 "사랑"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ㅡ마 22.37-40)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머리>로서의 본을 보여 주었으니 그 <몸>으로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바로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이 생명 아닌 죽음의 마약/독극물을 지금까지 주입시켰으니 그 결과야 물으나마나입니다. 오로지 주님이 엄중 경고하신 대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ㅡ마 18.3) 자들만 살아남았을 뿐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본성으로 움직입니다. 엄마 품에서 생육되니까. 그래서 엄마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엄마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것이 생명 자체인 줄 터득했으니까.

따라서 "참고 선을 행함이...영생"(롬 2.7)임을 재차 강조해야 합니다. "믿음=구원(영생)"은 이미 거친 전단계이고, 마지막 끝 마무리 단계가 순종의 행함, 행위인 것입니다. 야고보가 거듭 거듭 경고한 대로 아무 짝에도 소용 없이 헛되이 믿어 자기를 속이고 멸망에 들어가는, 만고에 없는 미련한 자, 마귀에게 꺼둘리고 휘둘리는 자가 되지 말라고 온 세상에 경고해야 합니다. 

2026년 1월 3일 토요일

죽음의 세상인즉 죽음의 질서에 보조를 맞춤이 안전의 터전


 

"나를 따르라"(요 12.26)ㅡ필승 강군의 특징은 지휘관의 진두 지휘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감)"(골 2.22). 부패로 결국 돌아가는 것은 무조건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것. 즉 동물성 육체와 관련되는 일체의 것 그리고 사탄의 지배권 아래 예속된 이 세상 자체.

영원한 영혼답게 육체도 영원한 것이어야 제격인 것이 인간 속성인데도, 영혼은 영원하고, 그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육체는 부패하여 사라져버리는 것이고ㅡ"이건 무슨 코미디(단지 <웃길> 목적으로 <유머>에 중점을 두는 일체의 것)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고, 이거 대체 뭐야?", 사람마다 이렇게 말하도록 만든다면 하아ㅡ이런 신성모독도 없다.

창조주를 아주 우습게 보는 결과를 낳기에 따라서 무신론, 진화론 등 어처구니없는 궤변들을 뱉아놓기에 딱인 바탕인지라 사탄이 낄낄대며 "영적 죽음"이란 말을 일부러 만들어 낸 줄은 모르고, 어리석디어리석은 인생들은 이 불경스러운 언사들을 무작정 따라 하기에만 바빴던, <맹랑하고, 이치에도 맞지 않고, 깜찍하고 당돌하고, 허망한> 바벨론 신학의 그동안의 행패였었다.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에 눈 뜬 이라면 모름지기 각성하여 사탄의 이 패악질에 한 순간이라도 가담치 말고 오직 하나님의 진실된 말씀만을 전달해야. 인간을 영생하는 자로 만드시어 신령한 몸으로 공중이든 해중/海中이든 자유자재로 번개처럼 내왕할 수 있게 하셨으나, 첫 사람 아담이 수하/手下 영물의 거짓말에 휘말려 그 엉큼한 계략에 넘어가 본디의 위계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사탄의 발 아래 기어 들어간 오늘날 만고에 없는 수치스러운 망동이 연출된 것이다.

내 영혼아, 진실을 전하라! 원수의 일방적 행패질에 아랑곳 말고 진리만을 외쳐라. 그러다가 죽으면 죽는 것이다. "죽는 것도 유익*(빌 1.21)이 여기 해당한다. 죽음의 각오 없이 전사/戰士되는 법이 없다.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바울을 위시해 초대교회 사도들은 죽기를 한하고 복음 전파자의 사명울 다한 본보기다. 우리의 사령관("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a Leader and Commander, KJV]를 삼았으니"ㅡ이사야 55.4)이신 주님의 독전/督戰 호령도 똑같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4,25).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그(사탄)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계 12.24,25).

영적 전쟁은 혈과 육으로써의 전쟁처럼 일진일퇴의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초반전'과 '후반전' 두 갈래로써만 나누어진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seed, 씨)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창 3.15)이라 하심 그대로다.

즉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이 먼저이고 "머리를 상하게 함"이 나중인데 이 <나중>이야말로 종결인 것이다. 다시 말해 뱀에게 발꿈치가 물리는 고통이 온 다음에 그 머리를 으깨어버리는 순서다. 따라서 이 전쟁에서 필히 요구되는 것이 오래 참음, 견딤, 인내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을 것이다"(눅 21.19) 하셨으니 즉 인내가 없이는 구원이 성사되지 못함을 단언하심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안일한 생각만 주입시켜 온 것이 바벨론 신학의 허망함인 것이다. 성령께서는 오늘날 환난 중의 북한교회를 통하여 이상 말씀을 확증하시고 있는 것이니 우리가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야.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 <인내로써 결실하는> 자이다"(눅 8.15).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다"(롬 15.4).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競走를 경주하며"(히 12.1). 



2026년 1월 2일 금요일

확고 투명한 인식 전환

무엇이 선/善(좋은 것)이고 의/義(정의, 옳은 것)이고 거룩함(성결/聖潔) 즉 "온전"("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ㅡ마 5.48)함이냐 물을 때, 그 답은 "최대한의 사람을 최대한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 허겠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애초 인간을 만드신 그대로의 모습,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이 아담 범죄로 산산이 부서진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세상에 죄(죄는 '불법', '무법', '범법'이니 곧 '하나님의 계명을 어김, 지키지 않음')가 오고 사망이 온 것입니다(마 5.12). 그리고 거짓이 왔으니 악령 용/(타락한 천사, 영물)아담 부부(실제로는 여자)에게 거짓말을 하여 하나님 말씀보다 이 거짓말을 추종한 결과로 범죄한 까닭에 악령이 인간 세상을 지배하게 됨으로써입니다.

이 악령은 본래 아담을 돕는 자 곧 보좌역으로 영계(초자연계) 에덴에서 창조된(창 2.18-20) 아담의 수하/手下들로서의 여러 천사 중 하나였는데, 범죄 타락했던 한 그룹(cherubㅡ"6일" 창조 이전 창조의 피조물) 다음 두 번째 자아중심으로 벗나간 자입니다. 범죄 전 아담은 "6일" 창조의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영생하도록 창조된 까닭에 영물과 똑같은 신령한 몸이었지만 범죄로 그 "영광의 몸"울 상실한 것.

따라서 이후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아담처럼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리는 통에 다 "죽은 자"가 되자 부득불 창조주 하나님 친히 아담(죽은) 대신이 되심으로써만 원래 창조와 같이 인간이 신령한 몸으로 회복할 수 있게 되는 판이 된 것입니다. 이 <원상 회복>이 다름아닌 우리 "구원"입니다. "무신론"이나 "바벨론 신학" 등 모든 악폐가 이 악마와 그 일당(사탄의 부추김에 넘어간 악령들 및 네피림[창 6.4]의 망령/亡靈들)의 소행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상전/上典인 아담에게 하극상/下剋上하여 시해/弑害함으로써 무도/無道한 "살인자"(요 8.44)가 된 것도 모자라 인간 세상의 지배자까지 되었으니 성경에 무식하면 나오는 소리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입니다. 이 악령의 행사만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다소간에 인생들이 저지른 악행만 해도 부지기수입니다. 원망의 원성이 하늘을 찌릅니다.

"성경에 무식하다" 함은 성경을 잘 읽지 않아 성령의 가르치심을 사모함이 없어 "문을 두드리지"(마 7.7) 않기 때문이요, "찾지"("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ㅡ예레미야 29.13) 않기에 그러하고, "구하지"("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ㅡ마 7.7)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자아중심[self-centerednes, selfish- ness]으로) 잘못 구함"(약 4.3)입니다.

사탄의 행패와 인간의 해악/害惡은 처음부터 질이 다릅니다. 전자의 경우, 아담이 이미 벌어놓은 죄악의 형벌 차원이라 마땅하기에 그렇고 둘째로는 아담 스스로 택한(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결과론적으로 사탄의 거짓말을 더 따른) 결말이니 "참고(인내하며) 선을 행할(상대방중심)"(롬 2.7) 따름입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창조 이래의 생명의 법칙에서 그 누구도 자아중심일 수가 없음을 되새겨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스스로 원수를 갚아버리면 나도 결국은 똑같은 범죄자가 되어버려 악을 행함이니까.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고 명령하신 것이며,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ㅡ히 12.14].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심이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ㅡ롬 12.17-21)고 한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것을 성경이 가르치는 것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창조를 시작하실 때부터 정해 놓으신 최대한의 모든 영적 피조물로 하여금 최대한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극히 상식 차원의 방법을 다시 말해 <상대방중심>을 설명한 것뿐입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악행 관련해서만은 악의 응징 차원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는 바로 이 점입니다. 다시 말해 <회개>시켜 새 생명의 새 사람되게 함이 현재는 유일무이의 목적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 말씀하신 그 이면/裏面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세상에 보내심 받아 <사람 살리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그 일>을 함이 목적이기에 당연히 순종하여, "원수를 사랑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나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나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눅 6.27-36) 것입니다. <확고부동>의 이유로서, 하나님 아들들로서의 절대적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보내심 받은(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시는 순간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의 신분인 것입니다. 한 순간도 이 <하나님 아들> 의식이 우리의 뇌리에서 흐려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충만케 함이 성령 충만입니다. 


구원 받음은 하나됨이요 하나됨은 반드시 상대방중심으로 나타남임을 명심해야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신 것은 주님 당장 오시는 <때>를 말씀하심이고, 그 전에 많은 사람이 바벨론의 마수에서 벗어나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을 듣고 연단을 받으며 정결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 하면 스데반과 같은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되므로 살아 남은 자가 극소수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 살아 남은 자가 공중에서 주님읊 영접할 것이라"(살전 4.17) 했으니, 적그리스도로 인한 세계적 대박해 중에도 생존자가 있을 것은 명백하나 극소수일 것입니다. 이 주님 재림 때, 죽은 자들(핍박 받은 결과로써)이 먼저 부활하면서 동시에 땅 위의 그 소수가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가는데 이것이 "휴거"입니다.

소위 "환란(적그리스도로 인한) 전에 휴거된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성경에 전혀 그런 언급이 없고 바벨론 신학의 조작일 뿐ㅡ살전 4.17은 그런 의미와는 전적으로 무관)은, 바벨론 신학에 물든 오늘날 자아중심의 절대 다수에게만 통하는 미신이요 자기 기만입니다. 지금은 순교의 일사/一死 각오로 주님의 일에 충성해야 하는 때입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14만4천"(계 14.1)이 "천사의 복음" 기간에 연단된 이들입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적그리스도의 등장과 함께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남과 동시, 바벨론 심판의 각종 "재앙"들로 연이어지고 드디어 주님의 재림입니다. 바벨론 신학자들은 이제는 복음이 다 전파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으나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천사의 복음"(계 14.6)이 전파되는 시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교회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우리 육체에 채우지"(골1.24)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중심(상대방중심)이 아니라 자아중심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죽은 자들"에게 생명의 복음은 전파한다지만(눅 9.60), "손에 쟁기를 잡고도 여전히 뒤를 돌아본다면"(눅 9.62) "아버지의 뜻을 행치 않은"(마 7.21) 까닭에 천국 차단이 될 것입니다("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 ㅡ마 7.21).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된다는 것은 주님과 "하나"(요 10.30) 즉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됨을 말함인데 이 하나됨은 한 몸됨에서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 여자의 몸은 남자의 것이 됨"(7.4)과 똑같은 이치로 상대방중심으로써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삶/생명이기에 그러합니다. 주님의 삶/생명은 오직 나를 위하심으로서 '서로 맞바꿈'이고, 이는 그 십자가 죽으심의 사랑으로 확증되신 바로서 모든 일의 기준이 되십니다.



2026년 1월 1일 목요일

"천사가 가진 복음"의 화려 막강한 배경

<미시세계>에서 우주의 모든 물질에 해당하는 보편적 성질로서의 입자-파동 이중성은 동시에 드러나는 법이 없는 바, 이유는 짝을 이룬 그 둘이 "하나"이기 때문. 이는 <거시세계>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 하신 말씀 그대로의 현상 이라, 이로써 하나님 계시는 모습으로서의 "3위1체"가 오늘날 양자역학에 의해 확증/確證되었으니 바로 그 사례다. 영자역학은 "3위1체"의 현대물리학적 서술/표현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를 다시,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9-11) 하심으로써 이 엄숙, 엄정한 사실을 재차 확고히 해 주신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이사야 34.16). 그리고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계 12.14) 또한 그러하다. 특별히 이 "한 때, 두 때, 반 때"는 "하나님이 그리시는 그림"으로서의 3운법칙 도식/圖式의 문자형/文字形, 문자화/文字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뿐인가. 3운법칙을 정하신 <때>와 그 <목적> 또한 그림 그리듯 너무나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이로써 하나님의 고안, 설계도/設計圖의 오목조목, 아기자기한 풍미/風味가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오늘날 사람마다 들여다보고 혀를 내두르는 바도 그것이다. 닐스 보어(1885-1962)의 상보성 원리에서의 "상반/相反은 상보/相補(CONTRARIA SUNTCOMPLEMENTA)"
즉 상합/相合 그대로의 표출이 아닌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요 10.30) 그대로이다.

노자와 다니엘 두 사람 모두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에 걸쳐 활동했기에 활동 시기가 겹침을 알 수 있다. 공자가 노자를 상면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 노자가 멜기세덱의 변신이라 보는 또 하나의 사유라 하겠다. 즉 다니엘과 노자 모두가 21세기 "마지막 때" 관련된 일을 털어놓은 것이다. 노자가 한 말이 무엇이었던가. 다름아닌 도덕경 42장 25언/言이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沖氣"일 때는 "비어 있는 기운", "氣"이면 "가운데 있는 기운"ㅡ혹자는 氣라고도 하기에).

이 노자를 여기 소개하는 것은 이 25언이 야말로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는 까닭이다. 노자를 멜기세덱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이유가 이 25언이 다름아닌 "3위1체" 곧 만유의 기본 대원리 즉 21세기 최대 발견을 명확히 정리하고 있기 때문. 즉 만물은 음과 양의 "하나"됨의 현현/顯現이라는 마지막 부분의 숨은 뜻이 절묘하다. 음으로 보면 음이 양을 업고 있고 양으로 보면 양이 음을 안고 있는 것이 만물이라는 것이다. 음과 양은 짝으로서의 둘이나 "하나"가 되어 있음을 말하는 정확한 표현이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해석인 것이다. 3위1체 자체를 모를 때이니까. 노자의 이 "음양"이라는 설명은 이 부분 딱 두 마디로써만 끝내고 그 어디에서도 달리 더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신기하다. 다시 말해, 노자는 여기서 음양론을 논하고자 함이 아니라 3위1체를 예고/豫告하고 있는 것이다.

"3위1체"를 이토록 간결하게 그러나 충실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을 다른 그 어떤 문헌에서도 구경할 수가 없다. 특별히 "三生萬物"이라는 결구(結句). 바로 ""3위1체'가 만유의 기본 대원리"라는 대사자후/獅子吼이기에.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벧후 1.16) 사실 그대로 피력함이다.

이로써 21세기 이 마지막 때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과 그 복음 말씀의 진실성은 훌륭하게 입증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하나"됨의 구성 요건 즉 짝을 이룬 갑과 을이 "하나"(병)를 이루려면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다. 즉 갑과 을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다. 이는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제 것"(요 27.10)이라 하셨고 "아버지께서 저 안에, 제가 아버지 안에 있어"(:21) "우리가 하나가 된 것"(:22)이라 밝히심 그대로다.

즉 만유의 모든 이치는 짝을 이룬 둘의 하나됨 곧 "3위1체"에서 결론지어지는 것. '상대성의 동시성'이다. 기계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생명과 삶의 이치는 <상대방중심>인 것이다. 허나님 계시는 모습이신 3위1체가 그 뿌리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철저히 성부께서는 성자를 위하시고 성자께서는 성부를 위하심의 일거수 일투족이시다.

성자께서는 성부의 거룩하신("독생자까지 아끼시지 않고 우리 위해 내어 주신"ㅡ롬 8.32) 뜻을 받들어(<성부를 위해>) 당신 자신을 우리 위해 바치셨고, 성부 또한 <성자를 위하셔서> 그러한 성자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성자께서 스스로를 살리신 또는 스스로 부활하시어 다시 살아나심이 아니었던 유일한 이유이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롬 12.19/히 20.30) 하심도 바로 이 이유에서다. 하나님의 심판도 이 상대방중심의 원리원칙에서이시다. 즉 우리의 원수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심이다. "3위1체"야말로 하나님의 모습이시요 일하시는 방법이신 것이다. 이 엄정한 진실이 오늘날 마지막 때에 이르러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으로 만천하에 밝혀져 증명된 것이다. 

"씨름하는" 기도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창피스럽기 그지없는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린 비극의 주인공 인생들을 장악하여 멸망 길로 끌어들이기에 광분하는 사탄 왕국(악령들의 징글징글한 씨앗들인 "네피림"이라는 별개 인종들이 설쳐대는)인 < 백해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