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8일 수요일

"하나님의 벗"ㅡ이스라엘을 구한 모세처럼 기도하는 기도자

야고보서 2.23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 했습니다. 이사야 41.8에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 역대하 20.7에도: "...주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벗"됨은 아브라함에게만 나타내신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사귐(교제)으로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함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즉 "하나님의 벗"으로서의 아름다운 그 좋은 실례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에 진노하여 그들을 멸망시키려 하실 때, 모세가 중보 기도하여 그 뜻을 돌이키시게 한 사건의 내용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32장에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십계명 돌판)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을 앞세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예배했을 때(.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7-10),

이 때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면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이 백성을 끝까지 이끌어 가실 능텩이 모자라 다 죽였다"고 할 것이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11-13).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어 이스라엘을 진멸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14). 이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들을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했다"고 시편 106.23에서도 회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것이 기도의 힘 그 능력입니다>.

모세가 만일 여기서 자기만을 생각했다면 이스라엘을 위한 그런 중보 기도를 드렸을 리 만무합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영광이 되는 일이라 여겨 은근히 그렇게 하시기를 기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늘 강조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그 지으신 모든 사람)의 유익(선)을 위하는 상대방중심(자아중심이 아닌)이어야 하는 것. 모세가 그러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벗"됨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증명/증거"


"어린 아이들"(마 11.25)에게만 하나님의 만천하 인간 구원의 생명의 거룩하신 말씀을 <나타내시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신다>, 일부러 숨기신다는 이런 말씀은 인간은 도무지 할 수 없는 말씀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실로 하나님시고 인간이 생각해낸 지어낸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실질적인 무서운 <검증>이 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인간이라면 오히려 그 반대되는 말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입니다. 왜냐면 이제 세상에 갓등장하시어 세상에게는 낯설은 소식의 새로운 메시지를 들고 나오신 분으로 어린 아이들 상대의 종교도 아니고 그 누구든 <한 종교 창시자>로서는 정신 이상이 아니고는 입 밖에 꺼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른들 또는 힘 있는 사람들 특별히 "지혜롭고 슬기 있는" 유력 인사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확보해야 새로운 종교 운동의 무시 못할 큰 자산이 될 수 있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을 배척하는 발언을 할 수 있겠나요? 게다가 공공연하게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기도 중에 200% 확신과 단정으로 하시는 발언이라니? 이런 것이 세상 그 어느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성경만이 갖출 수 있는 꾸밈과 가식 없이 나타낼 수 있는 순수성 그 자체의 진실성 그 진리됨 즉 하나님의 말씀되심에 대한 훌륭한 그 누구도 변박할 수 없는 <자체 증명>인 것입니다. 이는 말을 바꾸면 하나님의 실재/實在 실존/實存의 증명인 것입니다.

이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증거/증명"의 가치는 성경을 사랑하여 읽음으로써 성령의 계시로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다른 그 무엇으로는 획득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하시나요? 다시 말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39) 하시는 하나님, 모든 <오만함과 교만>을 책망하시는 만유 창조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시라는 확고 부동의 증명인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하실 수 있는 하나님.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어, "화 있을진저,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유대인에게는 하나님도 모르는 이장인릐 도시)에서 행하였더면 저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참회의 증거로 당시 나타내던)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21-24)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시고 말씀이신 것입니다(마 11.20-30). 

2026년 1월 26일 월요일

"천사가 가진 복음"의 시의적절한 경고


 

"좁은 문"ㅡ상대방중심의 인내ㅡ"참고" 선을 행함으로 "영생"(롬 2.7)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우리 각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하게 되어 있으니까) 일하시는(선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에게 선읊 행함으로써 하나님은 그 어떤 이에게 선읊 베푸심이 됩니다. 내가 선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만큼 선을 베푸심을 막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믿음" 하나만 줄곧 생각하고 "행함, 행위"를 일절 배제하는 사람은, 우리의 믿음이 그 최종 ⁸결과가 순종(행위)으로 증거됨을 마음에 다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순종(행함)이 없다면 믿음 또한 없다는 증거 밖에 되지 않으니까. 따라서 "구원 받음"에서 "행함"을 마치 비상처럼 여겨 멀리하는 경우(여기서 행위를 우리 구원에 필요 조건으로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행함이라는 개념 자체를 도외시함을 말하는 것) 이 사람은 구원됨을 자아중심의 한 방편으로 여김인즉 영원히 구원될 수 없다고 단정하게 됩니다. 자아중심(아담의)으로 죄를 지어 죽음에 이르면서 구원의 절대적 필요성이 생겼은즉 자아중심을 무조건 배격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자아중심이 아니면 상대방중심뿐으로 성경이 "사랑"을 강조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공로(그 죽으심과 부활)를 믿지 않고 행함 곧 순종만 앞세우면 당시 유대인처럼 율법 행위로 구원 얻자는 것이지만, 이것은 "믿으니까 그 믿음이 행함(순종)이 되어 나오는 것"과는 의미가 아주 다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 편지에서 역설한 것은 전자의 경우이고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후자인 것입니다. 혼동할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경계한 "말씀 혼잡"(고후 2.17/4.2)일 뿐입니다. 우리는 단연 이를 배격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은. 인간은 모름지기 상대방중심으로 선을 행해야 하되, 아담 범죄로 "죽은 자"(동물성 육체로 전락한)이니까 가장 먼저 시급하게 "산 자"부터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 순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세상에 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직결되고 이웃(사람)과 결부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자아중심일 수 없고 상대방중심이 정상입니다. 이걋이 선(착한 것)이고 의(올바른 것, 정의)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영원한 영혼이 있으므로 영생하는 자로 창조된 것인데 첫 사람(아담)의 범죄로 이런 썩음과 죽음의 동물 육체가 되었으니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되는 것(구원되는 것)이 우선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영생하는 것도 아울러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라면서 보기 흉하게 썩어 문드러진다는 것은 도무지 묵과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 썩는 것이 되게 하실 바에야 아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만드실 생각부터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나님 친히 하실 리 만무합니다. 영혼은 영원한데 그 영혼을 담은 그릇인 육체가 영원하지 못하게 하나님이 만드실 리도 없습니다. 바벨론 신학에 빠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제 정신차려 모두 깨어나야 합니다.

고로 이런 망가져버린 흉물스러운 육체는 죽음으로써 종결 폐기 처분되어야 마땅하고 그리고 동시에 원래 하나님 창조하셨던 대로 새로 창조되어야 또는 다시 나 원래의 신령한 몸으로 복귀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부득불 창조주 하나님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어(사람되시어) 우리 각자와 하나 즉 "한 영"(고전 6.17)이 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한 몸"이 됨과 동일한 이치로서 "육으로 남"(요 3.6)과의 대칭인 "성령으로 남"(:6)입니다.

"육"과 "영"으로서의 대칭일 뿐이지 "하나"(요 10.30)됨은 같으므로 그 반드시 뒤따르는 <짝으로서 하나됨>의 요건도 같으니 즉 짝을 이룬 갑과 을은 갑의 것은 을의 것이 되고 을의 것은 갑의 것이 되는 <맞바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몸"에서 남자의 몸은 여자의 소유가 되고 여자의 몸은 남자의 소유가 되는 것처럼(고전 7.4) "한 영"에서는 삶 자체가 그와 같은 형태가 되어 쌍방이 다시는 자기 중심이 아닌 상대방중심이 되는 것. 아담 범죄는, 마땅히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는 하나님과의 "언약(약속)"을 어기고 자아중심으로 나간 결과물이었던 것.

이러한 범죄의 결과로 죽음에 이르렀다가 이제 그 "죽은 자"됨에서 "산 자"로 변환됨에서는 필수 요건이 당연히 자아중심이 아닌 상대방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니, 여전히 자아중심이라면 백 번 구원 받았다 해도 그것은 구원이 어니라는 증거만 될 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에서 "선을 행함"(롬 2.7)이 필수가 되는 이유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도 역시 없다는 증거인즉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입니다. 모름지기 산 자는 선(상대방중심)을 행해야 하고 악(자아중심)을 버려야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은 상식입니다. 후자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것 밖에 없으니까 사회(공동체)에서 축출되어야 마땅한 때문.

상대방중심이 일관성 있게 지속되어 나갈 때 이를 우리는 "거룩함"이라 하는데,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한 그대로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됨은 상대방중심이 됨과 동일한 뜻이요 자아중심으로 머무는 한 제아무리 "구원 받아도"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상과 같이 바울 사도는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살전 5.15) 것은 자아중심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아 주마" 하심은 상대방중심을 말씀하심입니다. <영생에는 상대방중심인 자만 들어간다>는(롬 6.22) 이상 바울 사도가 말한 사실을 다시 마음에 새깁시다. 행함이 아닌 은혜의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극구 주장했던 바울 사도 자신이 명명백백히 마무리 지은 결론임을 다시 강조하니 우리 모두 명심합시다. 상대방중심은 선한 행위로 일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 때부터의 생명의 법칙에서 그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를 강조합니다. 내가 원수를 갚는다고 가정할 때 바울 사도가 믿기 전 사울이었을 당시 딴에는 하나님의 원수들을 척결한다는 열심으로 종교적 핍박을 교회에 많이 가했는데 그러면 그 사울을 응징하는 나는 장래의 바울 사도를 해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여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하게 됩니다. 고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일임함이 최상의 현책입니다.











오늘날 창조주 하나님은 100% 증명되었다ㅡ세상이여, 들으라!


21세기에 들어 인류사상 최초의 
100% 하나님 증명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해 온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너무 믾이 나간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아닙니다.
초능력의 지능자 사탄 자신 이를 증명했습니다.
갑자기 무슨 뜽딴지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이 사실을 성경 자체에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
"그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 하나님 증명되는 것 보았지?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이야" 의기양양하게 소리 칠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이 사탄이기에!

고로 확언컨대 지금 사탄은 과거 시절과는 달리
"하나님 증명"을 방해할 일체의 의사가 없습니다.
오히려 부추길 뿐더러 장려할 생각만 합니다.
머지 않아 하나님으로 자처할 자기 때가 오니까!
고로 다시 장담하거니와 <100% 하나님 증명>이
완료되었으니, 얼마든지 안심하고 알려도 됩니다.
이에 누가 뭐라고 찍소리도 못하게 돼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충분히 검증되셨어요!
인류 역사상 일찍이 이런 때가 없었습니다.
북한은 '무신론자' 횡포가 아닌 독재자 만행일 뿐.

지금껏 설명해 온 것을 얼마든지 힘 자라는 대로
소책자로 만들어 배부해도 떳떳이 하십시오!
조금도 위축될 것 하나 없습니다. 검증되었으니!
하나님도 3위1체시요 만유 기본 법칙도 3위1체.
같은 3위1체라 하나님의 창조가 훌륭히 입증됨.
3운법칙과 짝의 법칙(3위1체 법칙)의 상호 검증.
3운법칙은 초등생까지도 셈하여 검증할 수 있어.
검증 작업이 이같이 <대중적>이었던 적은 없어.
더군다나 인간 생애를 정확히 가려내는 일에서!
이 인간 법칙 역시 "3위1체"를 기반으로 짜여져.
전대미문의 엄청난 최고 작업이 이다지도 쉬워!
하나님이 일부러 오늘날을 위해 정하셨기 때문.
"누구든 하나님을 증명해보라" 하시는 뜻에서.
노자 도덕경 25어의 오늘날 부각도 백미/白眉.
상보성의 원리/양자역학이 또한 이를 증명.
닐스 보어의 "상반/相反상보/相補" 또한
3위1체를 말함이니 만유의 질서가 이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이 진실은 불변.
성경은 이 근본적 이치를 처음부터 밝혀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이사야 34.16).
"3위1체"에서 가장 핵심 요지라 할 수 있는
짝의 "하나"(요 10.30)됨도 주님이 밝히신 것

2026년 1월 25일 일요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KJV)

지금까지 사탄은 두 가지 거짓말로 세상을 지배해 왔으니 무신론이요 그리고 반성경적 "바벨론 신학". "쳔사가 가진 복음"(계 14.6)이 오늘날 이 둘을 명확히 상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지으신 만물을 뻔히 보면서도 하나님 없다는 선동에 넘어가는 "미친 마음"(전도서 9.3)들은 악령들의 부추김이 없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 하나님 창조의 순수성 즉 인간이 신령한 몸 그대로였다면 이런 사단/事端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 아담 범죄로 인류가 갑자기 동물적 육체가 되면서 일어나는 불상사. 이런 것이 소위 말하는 "세상 지배"입니다. 온통 악령들의 난장판. 사탄의 오늘날 득세는 아담이 (그 범죄로) 사탄의 거짓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따른 결과이기(눅 4.6) 때문입니다.


이를 깨뜨리기 위한 천사들의 주전략 중 하나가 "3위1체". 즉 만유의 기본 대법칙(만유의 창조와 운영의 대원리)을 이 마지막 때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은 하나님 친히 무엇을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따라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 이름으로 하는 모든 것을 말함인 것).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 즉 성부와 성자께서 짝(낳으신 이 곧 파생/派生하신 이와 낳아지신/낳음을 입으신 곧 파생되신 이로서의 상반/相反성)을 이루심으로 "하나"(요 10.30)가 되어 계심 그대로를 기반으로 하여 하나 밖에 없는 <만유의 법칙>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3위1체 하나님"이시라 함도 이 때문. 따라서 사탄이 이 중요 사실을 지금까지 막아 온 것도 당연합니다. 때문에 이 3위1체를 정확히 아는 자가 없었던 것도 어찌 보면 무리가 아닙니다. 사탄이 한사코 막아 왔으니까. 신학적 용어로서의 3위1체"는 알려진 지 오래이나("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ㅡ마 28.19), 정작 어떻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지 설명할 재주가 없었던 것. 사탄이 철통 같이 막고 있었으니까. 3위1체야말로 하나님의 실존은 물론 모든 성경 이해의 기본 틀이 되니까.

하늘의 전쟁에서(계 11.19) 천사의 군세/軍勢가 사탄 일당을 제압함으로써 "천사의 복음"(24 6)이 등장하여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자 이제 겨우 3위1체가 알려지기 시작하는 오늘의 시점입니다. 이와 더불어 세상에 그 빛(가치)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있는데 다름아닌 노자요 그 도덕경입니다. 노자와 도덕경은 실제 성경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성경 어디에도 일언반구의 힌트도 없습니다. 그런데 3위1체를 설명하다니! 성경이야 3위1체와 관련된 숱한 암시를 주고 있는 유일한 기록물임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제대로 이해를 못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새삼스레 오늘날 노자의 도덕경이 3위1체와 관련해 갑자기 조명/각광을 받는 것은 3위1체와 관련된 가장 과학적 서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이 아니면서도 성경적인 심오한 풀이를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멜기세덱과 관련지어 노자를(여러 정황을 참작해) 제사장 멜기세덱의 <한 때 변신>이라 보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이미 해설한 바 있지만 부활한 아담의 변신 곧 아담 본인인 것입니다(히 7.3). 그러나 더 이상 "아담"으로 호칭되지 않는 것은 역사상 "아담"은 죽어 사라졌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를 대신하여 이제는 "머지막 아담"께서 엄존해 계심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신령한 몸으로 살아생전에 변환한 예로는 에녹과 엘리야가 있고 모세도 여기 포함된다는 것이 개인적 판단입니다. 주님께서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실 때 엘리야와 함께 나타났으니까(마 17.4).

그런데 성경을 감리/감독하시는 성령께서 에녹과 엘리야의 극적 사실은 알리시면서도 모세 관련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으신 것은, 에녹과 엘리야는 그 신령한 몸으로서의 변환에 중대한 함의가 있기 때문임을 전에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애초 하나님께서 인간(아담)을 신령한 몸으로 즉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있고 이를 모든 인생들에게 상기시킴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930세에(이 아담의 나이는 아담이 신령한 몸을 박탈 당한 후 지상으로 영구 추방된 순간부터 세어진 햇수이고 그 이전 에덴에 있던 당시의 기간은 합산되지 않은 것) 죽은 지 얼마 안되어 <인류사상 두 번째로> 세상을 하직한 인물이 됨으로써 둘의 직전 비교(대조/對照)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에녹이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것은 <아담의 죽음>이 비정상임을 알리심 다시 말해 애초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음을 하나님이 온 세상에 강조하심이었고, 엘리야의 경우 역시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의 탄생>과의 관련이니, 단지 에녹과의 차이는 예수님 탄생 직전의 세례 요한의 등장을 엘리야(이미 세상에 나와 역사 속 인물로 사라진)의 대리/代理 출현으로 정하셨다는 것.

그 의미는 무엇이냐. 예수님은 비록 죽으시나 곧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이해되도록 하심이었던 것. 다시 말해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명백한 대칭성에서 전자는 정상에서 비정상으로의 전락이나 후자는 반대로 비정상에서 정상에로의 복귀인 까닭. 따라서 여기서의 주안점은 전자의 동물적 육체가 아담 본인의 범죄로 인한 결말임을 강력히 적시함에 있는 것입니다.

노자를 멜기세덱의 "일시 변신"이라 함은 그 도덕경의 놀라운 내용 즉 "3위1체"의 의미를 완전히 꿰뚫는 그 초강력 설파/說破에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아니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노자 도덕경이 그런가 하면 동양 철학의 진수라고 할 노자 도덕경 그 중에서도 핵심부라 할 42장 25어/"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가 그러한 것입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지만, 그 후반부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를 지금까지 사람들은 "만물은 음을 등에 업고 양을 가슴에 안아, 그 빈 기운(충기)으로써 조화를 이룬다"로 풀이했지만, 이렇게 되면 음과 양의 상반성/相反性을 나타내려고 한 노자의 의도와는 전연 상관 없는 의미가 되어버립니다. "만물이란 것은, 음은(음이) 업은 것이고 양은(양이) 안은 것(모습/구조)"이라고 고쳐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이러한 상반된 둘의 성격을 상보성/相補性으로 설명하면, "음으로 보면 양을 업고 있으며 양으로 보면 음을 안고 있어 혼연 일체다"가 됩니다. 음으로 보든 양으로 보든 둘 중 하나로만 말할 수 있지 전혀 별다른 둘의 상황을 동시에 말하지 못하는 법이기에, 이는 미시세계 실험에서(입자성과 파동성의 2중성) 반드시 어느 하나로만 관찰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 모두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3위1체"를 웅변하는 것입니다. 노자가 말한 대로의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을 그대로 설명함입니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을 다시 해설하면 이렇습니다. 왜 이 대목을 <3위1체를 가장 반듯하게 밝히는 것>으로 보는가 하는 바로 그 이유입니다. 서두에서 지적했듯이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과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획기적인 것으로 "3위1체'를 지목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앞의 道生一, 뒤의 三生萬物을 주목하시기를. 道生一에서 괄목할 만한 사실은 지금까지 하고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스쳐갔지만 그 한결같은 소리가 "여기서의 道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 道가 무엇이냐?", " 道가 무엇을 나타내느냐?".

道가 난해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이 대목을 읽을 줄을 모른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즉 一, 二, 三 연속으로 나가는 숫자 1, 2, 3은 창조의 단계 혹은 변천해 가는 과정을 상징함인데 이를 간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三"으로서(써) 뚝 그쳐버립니다. "生/생"은 "생성시키다", "낳다", "~가 되다"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창조가 道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니 道는 창조의 주체 즉 창조주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창조 전의 하나님, 피조물 없이 홀로 계시던 때의 "하나님이라는 실존"의 뜻이 됩니다. 하나님을 "창조 이전의 하나님"과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입니다. 실로 참신한 발상입니다.

바꾸어 말해, 노자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지 않는다면 이런 표현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냥 막연하게 추상적으로만 인지하는 정도라면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말할 사람이 천하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알고 있으니 막연한 말로써만 그쳤을 것입니다. 따라서, 노자는 자기의 확고한 신념으로 하나님의 실재/實在를 단 세 마디 道生一로써 설파한 것입니다. 이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이렇게 싑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확신할 확고부동의 근거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1만 마디의 유신론을 단 3 마디로 처리할 능력도 엄두도 확고한 근거 없이는 나지 않는 법입니다.

고로 이런 사람의 나머지 말은 신뢰할 수밖에 없 다는 결론으로 기울여지게 마련입니다. 태산과 같은 그 위압감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연이어 나오는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 마찬가지.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이 셋으로써 만유가 존재하고 움직인다"이니, 마치 성경이 주장하는 바 그대로를 아니, 성경 자체를("3위1체"에 관한 한) 옮겨 놓은 듯합니다. 즉 창조를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의 시발점/始發點으로 "독생자를 낳으셨다"입니다. 그리하여, "둘로서의 짝을 이루셨다"까지로 진전합니다. 왜냐면 곧이어 나오는 것이 "二生三"이기 때문입니다.

"二生三"은 무엇이냐. "짝을 이룬 <둘('갑'과 '을'의 상반/相反성)>은 반드시 <하나(이 둘이 연합하여 '병'으로서의 상보/相補성>로서 존재하고 움직인다" 즉 단도직입으로 "3위1체"라는 결론에 당도해버린 것입니다. "이 '3위1체'야말로 만유를 유지시키고 동력화/動力化하는 근본 원리이다"가 "三生萬物"입니다. 다시 말해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낳으심으로 짝을 이루시어 둘이 아닌 하나(요 10.30)로 계시니 "3위1체"를 구성하심이고, 바로 이 "3위1체"로써 만유의 기본 대원리로 정하셨다는 <성경적 선언> 그대로를 노자의 도덕경이 아주 유효적절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3위1체"가 "천사의 복음" 전파의 강력한 배경("천사가 가진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입증해 주는 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으로 작용하는 "21세기 표적과 기사"의 하나입니다. 그 중 하나가 이 노자 도덕경임이 이제 드러난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런 사실을 성경이 직접 전하는 것이었다면 "21세기 표적과 기사"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빙 둘러 우회적으로 미리 준비해 두심으로써 <하나님의 실존>과 <성경의 진실성>을 극대화시키신 것입니다.

노자 도덕경의 이 42장 25언이 3운법칙과 3위1체 법칙의 상호 검증이 알려지는 이 시점에 세상에 소개됨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양자역학/상보성 원리의 등장과도 시의적으로 아주 적절히 맞물리고, 성경의 20세기 이후 예언인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신속히 왕래하며 지식이 더할 것이다"(단 12.4) 및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계 12.14)와도 정확히 겹쳐집니다.

"간수하고 봉함한다"는 것은 예언이 성취되는 바로 그 시점에 이르러서야 그 예언의 의미를 완전히 음미한다는 뜻이니 이상 다니엘의 예언이 그러합니다. 더군다나 다니엘의 예언에는 특이하게 구체적으로 천사의 등장을 적시합니다. 천사가 미래사를 알려 준 것으로 명시했습니다. 이는 이 21세기 "천사가 가진 복음"과 여축없이 맞아떨어집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알 것은 다 알게 되었습니다. 믿을 것은 다 믿을 수 있도록 충분한 근거를 확보하게 해 주셨습니다.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기도와 말씀 봉사에 총력을 집중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이를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알게 합시다. 





2026년 1월 24일 토요일

모세 시대 <모세의 기적>과 21세기 "천 사의 복음"의 <과학시대의 기적>은 그 격이 다르다

현재 우리말 성경 번역처럼 "대신 죽음"으로 우리 주님의 복음을 오해하게 되면 "'한 번' 구원은 '영원' 구원(Once saved, always saved.)"이라는 성경에 없는 전형적인 "바벨론 신학"이 되어버려, "우리 대신 일단 미리 죽어 주셨으니까 죄 지음에 대한 형벌의 대가를 미리 치르셨으니 웬만한 범죄는 간과해 주심이 명백하다"는 또다른 사탄의 거짓말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는 모든 범죄는 "크든 작든" 자아중심이 그 뿌리이므로 여하한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배신 행위와 동일한 본질임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반면 성경대로의 "나와 하나로서 함께 죽으심"은, 주님의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죽음으로서 직결되어 <나라는 존재>가 깡그리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기에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달리 다른 것으로는 생각할 여지가 아주 없어져버립니다.

이는 나 위해 죽으신(나와 "하나"되어 함께 죽으신) 주님 친히 그 성령으로 내 속애 내 영혼("새 사람"의 "새 생명"의 "새 영혼")처럼 강림해 오심으로써 구체화/현실화하는 것이라 단순한 논리로 끝남이 아닌 엄청난 일대 <역사적 사건>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래서 "새 창조"요 "다시 남("to be born again")"입니다. 이는 서로 <육신>과 <영>이라는 대칭(짝) 관계이니까 가능하지 달리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철두철미 과학(scientific)입니다.

덴마크 과학자(현대 물리학의 거장/대가/大家)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가 자기 가문 휘장에다(아래 그림) 직접 도안해 넣은 태극 문양과 "CONTRARIA SUNT COMPLEMENTA(상반/相反은 상보/相補)라는 라틴어 글귀가 우연일 수 없습니다. 왜냐면 오늘날 21세기에 모든 과학 이론의 총본산이요 총결산이라 할 3위1체 법칙을 상징하는 문양이요 문구이기에 <때맞춰 나온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때" "천사의 복음"의 "표적과 기사"로서의 막강한 배경/배후가 되기에 너무나 시의적절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짜여져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3위1체를 오늘날 널리 홍보함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닐스 보어의 이같은 휘장 도안이나 3운법칙의 생애 도표(FASHOMO diagram)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둘 다 <그림>이라는 점에서입니다. 과학적 진실이 이같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그림으로 표출되기는 유사이래 처음입니다. 그림이라는 것은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이 마지막 때 "천사가 가진 복음"을 나타내심에서 만인간 상대의 하나님다우신 면모가 충분히 유감 없이 드러나심이라 할 것입니다.









 


2026년 1월 23일 금요일

모든 범죄자는 악마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름을 아시는가

이 마지막 때 "내 백성아, 거기서(바벨론에서) 나오라"(계 18.4) 하시는 하나님 경고를 듣고 탈출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슬픈 사실은, 혹자가 구원 얻는 자가 적는지 여쭈었을 때 대답하신 경계의 말씀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들어가려고 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눅 13.23,24)에서 충분히 확인됩니다. "<들어가기 원해도 못하는> 판이니 가히 알 만합니다.


또 하나, "힘쓰라"고 하신 대목에 유의해야 합니다. 얼핏 알기로 우리 구원은 새 창조요 다시 남("거듭 남")이므로 우리 피조물로서는 그저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면 되는(영생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쉬우나 역사적 실례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이 왜 범죄하여 이토록 엄청난 비극을 인류에게 끼쳤나요? 하나님 창조에는 없었던 죽음인데 아담이야말로 죽음을(자기 범죄로써) 불러들인 원흉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창조를 헛되이 돌리는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왜 또 용(사탄)은 범죄로 전인류에게 해악만을 끼치는 악마가 되었나요? 왜 인류에게 원수가 되었던가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요일 3.8)고 할 정도이니 그는 "처음부터 범죄함"(:8)한 자라 그렇습니다. 때문에 모든 범죄자에게 "아비(father)"(요 8.44ㅡ"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따라] 행한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 원조/元祖(조상)가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처음 저지르니 범죄(죄)의 아비, "거짓의 아비"(:8)가 되기도 합니다. 비단 이들뿐 아니라 누구나 그와 같이 악과 죄의 본보기가 되어 악한 영향을 끼치는 당사자가 될 수 있능 것입니다. 반면 선(goodness)과 의(righteousness)를 힘쓰는 자도 있게 마련이니 주님께서 "힘쓰라" 하심이 바로 이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일단 받아 피조물이 되었으니 그 다음부터는 피조물 자신에게 모든 것이 달린 것이라 그 자신이 좌우하게 되어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기계적인 자연계 생물과는 반대로 인간, 영물과 같은 영적 존재는 자기 운명의 자기 결정자입니다.

단 이 "운명"이란 것은 <영원한 생사>에 관한 것이고 그렇지 않은 그 외의 것은 자기 결정권이 없으며 창조주 소속이니 이는 '창조 질서' 차원이기에 그러합니다. 3운법칙(fashomo: FAS, divine law; HOMO, Homo sapiens)과 같은 것이 그 예. 그러나 영원 운명으로서의 삶과 죽음 문제는 전적으로 당사자(피조물) 책임이니, 단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는 이를 미리 아신다(보신다) 그리고 이에 따른 적절한 조처(예를 들어 미리 정하심, 택하심 등) 정도를 취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니 더 긴 설명 필요 없이 사람되어 오신 성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 오시어 "성을 보시고 <우시며>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날이 이르면 네 원수들이...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할 것이니...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눅 19.41-44) 하신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일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도 속수무책이시라 "우셨던">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두 손 놓으실 수밖에 없으시다니!

고로 주님 친히 말씀하신 대로 각자 스스로 "힘쓰는" 것 외 달리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 것 외에는 없습니다. 항상 이런 절박한 상황인지라 성령께서는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심"(8.26-28)이라 했습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27).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28).

주안점은 "하나님 사랑함"에 있습니다. 제발 "<힘씁시다>",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하나님 사랑하기를 힘씁시다". "사랑에 무슨 '힘씀'이 있느냐, 마음에 우러나는 대로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사려 하면 공을 들여야 하고 때로는 무진 공을 들여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이 이루어져 부부가 되었어도 노력 없이 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작은 노력이라도 그것을 게을리 할 때 큰 화를 불러 올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답답한 시기는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기도해야,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때입니다. 주님처럼 "말할 수 없는 탄식(신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바벨론 신학의 거짓말에 의한 분탕질로 사탄은 이 "힘쓰는" 것을 거의 모든 교회에서 제거해버린 꼴이 되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악한 사탄 일당들이 천하를 주름잡고 있어 방해와 장애, 위협이 등등한 판에 생명의 영생문이 누구나 들어가지개 넓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들어가야 한다는 의지력도 없어요. 그저 "믿기만 하면 다 되는 영생/구원"이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세뇌되어 태평 일색입니다. 그런 것이 "믿음"일 리 없건만 이를 모르고,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라야 하는데 그것이 믿음의 증거인데도 상식인데도 이를 무시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요일 3.8). "마귀 일"은 죄 짓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 함"이라 하지 않았으니 "구원 받음"과 "죄 짓지 않는 눙력 받음"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죄 지음"은 여전히 "구원되지 않음"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성령 모심을 가리킴>이요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이다"(:9).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남이니 무릇 의(사악함, 부정, 불법, 불의가 아닌 올바름, 정의)를 행치 않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사랑이 없음은 상대방중심이 아닌 자아중심임을 뜻하니까)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다"(:10).

이로써 구원되었는지 여부의 자가 진단법이 확실히 밝혀진 것입니다. 성경 곧 하나님 말씀을 스스로 가까이하여 성령의 계시로써 배우려 하지 않고 무조건 "교회", "목사 설교", 전통적인 "신학" 일변도로 나가는 사람마다 오늘날까지 "바벨론"의 좋은 먹잇감만 되어 준 것뿐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바울 사도가 복음을 처음 세상에 전파할 때부터도 "말씀 혼잡"(고후 2.17/4.2)은 이미 교회 내에서 득세했습니다. 사탄 일당들의 이 세상 지배에 대한 거의 가시적/可視的인 증거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따르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갈 1.6)고 바울 사도 자신도 놀라마지 않았던 것이니 하물며 오늘날이야! 



"오늘날의 교회" 상징인 "이스라엘 광야교회"(행 7.38)ㅡ60만 중 갈렙과 여호수아 단 둘만 제외하고 죄 탈락해버린 사실이 안겨 주는 교훈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는 것이다"(고전 15:44). '육의 몸→신령한 몸'의 순서(단계)는 지금 우리에게만 비로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아담 창조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지금의 우리는 그 짝을 이루어 있는 것뿐입니다. 즉 "첫사람 아담"(:45)과 "마지막 아담"(:45)의 대칭과 같습니다. 왜냐면 아담도 육의 몸(자연계 몸)으로 창조되어 있다가 하나님이 에덴에 한 동산을 창설하심으로 거기 들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때문. 

우리가 이렇게 신령한 몸으로 회복되는 때를 가리켜, "보라...비밀을 말하니 우리가 다 잠잘(그리스도인들의 죽어 장사지내짐을 가리킴ㅡ행 7:60)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이니 나팔 소리가 난즉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할 것"(:51,52)이라 한 것입니다. 즉 주님의 재림이 그 <때>입니다.

소위 "휴거"라는 것은, 세상 끝이 되어 주님 다시 오실 때 거의 모든 이들이 죽음을 맞았지만("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마다 죽임을 당하므로ㅡ계 13:15) 그래도 소수 살아 남은 자 중 일부에게만 해당됩니다. 이렇게 공중으로 들려 감을 받는("휴거") 이들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기 때문이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현재의 육체 그대로라 천년 왕국(아담 때처럼 천년 가까운 수명을 누리는 시대)에서 자식들을 낳고 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멸망의 대상자는 물론 여기서 제외됩니다.

이들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지 않은 것은 절대 다수가 젊은이들로서 장차 천년 왕국을 구성할 인원/人員이기 때문. 여기 속하는 극소수(이사야 13:12) 청춘 남녀는 주님 재림시 멸망은 면한 터이지만 신령한 몸에서는 제외되었으니 구원은 받은 몸이나 주님을 위해 이렇다 할 고난은 받지 않아서입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을)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딤후 2:12)이라 한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천년 왕국에서 부조/父祖 역할로만 한정될 뿐이고, 왕권/王權 행사의 자격은 없습니다. "천년 왕국"이란 것은 반복 설명이지만, 아담이 범죄하지만 않았다면 잠깐 즉 천년간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마지막 심판을 실시했을 필연적 과정이었는데, 아담의 범죄로 인해 폐기, 유보되었다가 "마지막 아담"께서 "첫 사람 아담"을 이제 대신함으로 인하여 그 순연/順延, 유보되었던 <아담의 세상 통치>가 지금 비로소 진행됨에 있음을 뜻합니다.

만약 가정해서 아담 자신은 비록 범죄하지 않았더라도, 그에게서 난 소생들 중에는 분명 선악과에 손대는 자들이 일부 생기게 마련이고 그것도 (아담의 통치 중인지라) 벼르고 벼르던 끝에 일시에 집단적으로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동물적 육체가 생겨나 한 세상을 이루었을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실을 상정/想定하여 진행하는 것이 "마지막 아담"의 이 "천년 왕국"인 것입니다. 

일부가 그런 범죄 행위를 했을 것이고 나머지는 그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럴 경우 아담도 신령한 몸일 것이요 또한 가담치 않은 자들 역시 그러한 아담의 소생들이니까 신령한 몸 그대로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 때에도 신령한 몸을 가진 자들은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린 범죄자들에게 신/神과 같고 왕/王과 같은 존재였을 것. 다만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출생한 터라 "마지막 아담" 즉 사람의 아들들이 아닌 성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성령으로 났는데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하나로 계심이니까). 우리 인간이 애초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이런 유추/類推를 통해서도 너무나 명백해집니다.

그러므로 환란 당하기 전에 소위 "휴거"를 통하여 그 재앙을 비켜 간다는 자아중심적 망상은 아주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 이기적이고 저속한 탐욕적인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 받아 구원된 사람의 특징은, 한 사람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해내고 믿음을 붙들어 주고 또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합심 기도에 부단히 몰입해 있어 그런 넋 나간 잡념에 빠져 있을 여가가 도무지 없으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 1) 바로 이것이 "깨어 있음"(마 24:42,43/25:13)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일단 구원 받았으니 이는 영구 불변이라 이제는 마음 놓고 태평스럽게 지내도 좋다는 말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고후 13:5)라는 경고만이 명백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한다"(:7) 했듯이 쉬지 않는 상호간의 기도를 역설한 것은,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절절한 경고와 맞닿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로서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너희 중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전 11:18/히 10:25/ 3:12,13) 한 그대로입니다. 히브리서도 그 문맥과 내용 등으로 판단컨대 바울 사도의 글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상 모든 것은 구원 받음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구약의 핵심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짚트 탈출과 가나안으로 향하는 광야 여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교회'를 묘사함이요 관련된 모든 경고/경계이기 때문입니다. 이짚트의 압제를 알단 벗어났으니 이는 우리의 <구원 받았음>에 해당합니다.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나 광야 통과는 절대 무시 못하는 <현실>이요 실제 난관이었던 것임에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이짚트(애굽)를 탈출한 장정/壯丁(20세 이상)이 60만(출애굽기 38:26)이었는데 그들 중(장정 수에 들지 않은 이후 출생/성장한 나머지는 제외) 실제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오직 둘뿐이었으니 그 함축하는 의미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사탄의 거짓말은 이같은 성경의 경고를 무시하고 "안전하다", "평안하다"는 말만 남발해 왔고, 그리하여 모든 각종 비극으로 유도해 왔던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지만 않았어도 마귀가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범죄 형벌 차원에서도 악령들의 개입이 당연시되니 오호라! 곤고한 인생들입니다. 핍박과 탄압만 아니라 온갖 거짓이 난무합니다. 바벨론 신학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험한 광야 길이 그 명백한 상징입니다. 광야 자체가 이 세상 상징입니다. 사람 살지 못할 황무지 일색이 현세의 가감 없는 특징적 묘사입니다.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착각하면 영혼의 영원한 삶을 잃거나 빼앗깁니다. 오직 성령의 "불 기둥, 구름 기둥"(민수기 14:14)의 인도하심 따라 일보씩 조심해서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상징인 "이스라엘 광야교회"(행 7.38ㅡ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이 성령으로 경고했던 사자후)ㅡ60만 중 갈렙과 여호수아 단 둘만 제외하고 죄 탈락해버린 사실이 안겨 주는 교훈



간단한 시대 진단

바울 사도의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중심으로 주님의 재림 관련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재림을 "주님의 날"로도 표현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주님의 전지구적 심판("마지막 심판"은 주님 재림 후 천년 통치 종결과 동시에 오는 것)이 주님 재림 때 시행됩니다. 이 재림 전에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멸망의 아들"을 가리켜, "그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멸망의 아들"이 "자기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아 왔음"이 드러났습니다. 때가 되기도 전에 출현하려고 어지간히 나댔던 모양.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했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막는 자가 치워지면 "멸망의 아들"은 즉각 등장하는 것. 이 "불법한 자"가 나타나 일정 기간 활동하면 "주 예수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악한 자(보통 우리가 "적그리스도"라고도 일컫는)>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라 했고,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 구원함을 얻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이라 설명했습니다. 즉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한 것입니다.

고로 두 가지 점으로 이 시대를 조망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심판의 유혹"이 시작될 정도로 진리가 충분히 전달되었느냐 할 때, 답은 "아니다"입니다. 오히려 이제서야 "천사의 복음"이 갓전파되려는 시작점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따라서 이 "천사가 가진 복음"의 전파가 분기점이 되어 끝나면 물론 그 이후에는 이 복음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심판 차원에서 "악한 자의 유혹"이 발동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 때 사탄의 각종 기적들이 기승을 부리게 됩니다. 아직은 그런 사탄의 난동(초자연계 속성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 둘째입니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이 주님의 "강림"/재림입니다. 이 직전에 "성도들의 세력이 깨어진다"는 다니엘의 예언대로 스데반과 같은 하나님의 순교자들이 처처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끝이니, 주님의 재림이심입니다. 오늘날까지 말하는 "휴거" 따위는 바벨론 신학이 지어낸 사탄의 거짓말이니 일절 이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 "휴거"는 주님 재림 때에만 일어납니다. 그 때 이미 사탄 일당은 무저갱에 들어가고 "더러운 귀신"(행 5.16) 일당과 네피림은 곧장 불못으로 휩쓸려 가 지상에서 깨끗이 청소됩니다.



2026년 1월 22일 목요일

만고불변의 이치를 알았으니

우리의 관심사는 "영생"도 아니고 "구원"도 아닙니다. <오직 메시야 예수 "한 분 사람">이십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정확한 의미요 또한 설명입니다. 주님은 성자 하나님이시므로 성자와 관련되는 것은 성부 하나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는 "하나"이시니까 그러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되심에서 만유를 창조하신 것이라 만유의 기본 법칙으로 정하셨으니 이름하여 "3위1체의 법칙" 또는 간단히 "짝의 법칙", 줄여서 "3위1체"라고도 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형상"이신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과 "하나"(요 10.30)되어 "한 영"이 되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구원"이요 "영생">인 것입니다. 비슷한 또는 같은 말인가 싶어도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주님과 "한 영"으로서의 "하나" 의식 없이 그래서 <주님은 나를 위하시고 나는 주님만 위하는> "하나"됨의 확고부동의 짜임새/얼개 없이, 그냥 막연하게 "나는 믿으니까 구원 받았다, 그러니까 나는 영생이다" 하고 자금까지의 "바벨론 신학"의 궤변(사탄의 거짓말)으로만 일관되게 나가면, 그것이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됨"(마 18.3),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듦"(막 10.15)이 아닌 이상, 자아중심으로 흘러버릴 수 있어 유야무야되기 십상이니 이 경고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한 분> 사람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365일 24시간 관심의 대상이셔야 그래서 이 불변의 위치에 우리 심중에 자리잡아 계셔야 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여기서 그 어떤 다른 무엇에도 누구에게도 한눈팔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를 금과옥조로 여겨야 합니다. 왜냐, 말 그대로 나와 "하나"이시기에 그러합니다. 다른 이유 없습니다. 이 "하나"됨의 구조에서 나는 주님만 위하고 주님은 나만 위하시기 때문에 그러함을 다시 역설합니다.

"믿음"이 나를 구원함이 아닙니다. "순종의 행위"가 나를 구원함이 아닙니다. 오직 나와 24시간 함께 계시는 주님께서만이 구원 자체이시고, 영생이시고, 내게 "거룩함"이 되시고 "의로움"이 되시고 "지혜"가 되시고 모든 것이 되십니다.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 그래서 내 영혼 앞에 계시는 주님이. 24시간 그렇게 계시는 주님을 당연히 의식하는 것이 내게 삶이요, 생명이요, 나의 전부인 것입니다. 마음에 새깁시다. 따라서 나능 주님만 위할 따름이요 똑같이 주님은 나를 위하십니다. 나와 주님은 "하나"인지라, 나로서 보면 나 자신이요, 주님으로서 보면 주님 자신이시기에 그러합니다.

물질의 2중성(짝을 이루어 하나됨에서)으로서의 파동성과 입자성에서 파동이면 파동, 입자면 입자로만 나타나지 절대로 둘이 동시에 나타나는 법이없는 그대로입니다. 가시적인 세계의 물질에서나 영적 불가시성에서의 존재들이나 하나님 정하신 원리원칙은 단 하나 즉 그 계시는 모습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영원불변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쉬지 않는 기도"ㅡ심중/心中 기도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살전 5.14).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15). 항상 기뻐하라(:16). 쉬지 말고 기도하라(:17). 범사(매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18).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22).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25).
 
말 그대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전체 존재가 하나님께 바쳐진 하나님의 것이라 하나님만 위하고 섬김이요 바로 그것이 나에게 생명이요 무한 낙이기에 그러합니다. 이는 주님과의 "하나"(요 10.30) 곧 "한 영"(고전 6.17)됨으로 인한 당연 결과이니 바로 이 "하나"됨의 이치로써 주님의 모든 것도 나의 것 곧 나의 소유인지라 따라서 만유가 내것이 되는 굉장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치 나만을 위하시듯 그렇게 동시에 모두(주님의 몸된 교회에 속한 각 지체, 각 부분)를 위하심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내것이 됨으로 인한 나의 구원인 것입니다. 단 이 "하나"됨은 이와 같이 짝(갑과 을)이 됨으로써 맺어진 결과인지라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으며 을 또한 똑같이 갑에 대해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자신을 위하게 되면 이 둘 사이는 더 다시는 하나일 수가 없어 파탄이 나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생명의 법칙이라 합니다. 이유는 생명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그 피조물들이 이같은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자아중심일 때 그는 생명에서 끊어지게 마련임은 필연이요 이는 자명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의 법칙에서 벗어난 자아중심을 말합니다. "회개"는 이 자아중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 한 대로 이 "욕심"이 <자아중심>이며 인간 욕심의 폐악은 모두에게 익숙해 있어 잘 아는 사실입니다. 고로 성경에서 "회개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자아중심에 반대되는 개념이 상대방중심 곧 성경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인 것입니다.

이 실례 또는 실상이 "한 몸"(고전 7.4)됨에서 역력히 드러납니다. "한 몸"됨은 남녀 하나됨이지만 원리는 동일하여 "한 영"("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ㅡ고전 6.17)됨으로써 생명의 법칙이 발동/작용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나 영물(천사)이나 자아중심이 아닌 상대방중심으로 살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영생의 법칙(생명의 법칙)입니다. 가장 이상적으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무이의 방법인 것입니다. 이상형적이라 해서 너무 고매해 접근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라도 철든 나이라면 이해 가능한 상식 차원일 뿐입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라도 모든 인류가 의지력만 있으면 "지상 천국" 소리는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사회 형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상대방 중심의 생활이 되므로 "성인군자/聖人君子"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단 그렇다고 하나님이 영생으로 인도하시지는 않으니 영생은 전적으로 다시 나는 새 창조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는 자아중심인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됨을 이루지 못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새 창조"는 믿음으로써만 가능하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피조물 스스로가 끼어드는 일은 만고에 있을 수 없으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전적으로 나를 위하심이 믿어지니까 궂은 일이든 아니든 나 위하심의 결과물인 것은 분명하기에 매사에 감사함이 우러나게 됨은 자연스러운 일이 됩니다. 따라서 항상 즐겁고 태평해 기쁨과 평안이 넘쳐남도 당연합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신 대로 "주님 친히 베푸시는 평안이요 기쁨"입니다. 이런 가운데 나는 나대로 오직 주님만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그야말로 일편단심이므로 어찌하든지 주님 뜻대로 하려고 주님 뜻을 여쭙는 형식의 "쉬지 않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동시에, 주님 향한 변함 없는 사랑으로 나 스스로 힘써 노력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이요 또한 그 지름길입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신음)으로 우리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엡 6.18ㅡ"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와 "성령으로 기도함"(유다서 1.20)이 병행됨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만인간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우시고 아름다우신 단 한 분

성경에 "아가(雅歌)서/Song of Songs"가 있는데 남녀 사랑의 연가에 속하나 "마지막 아담"과 그 교회를 상징함입니다. 유대인의 구약성경인데 무슨 그런 의미이냐 하겠지만, 신구약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감리 감독된 내용이므로 장차 오실 메시야(사람)와 교회 즉 "신랑과 신부"(계 18.23/21.2 9)로서의 관계를 상징함이라는 당연 결론입니다.

사람이심을 강조한다고 그것을 굳이 인간의 남녀 관련이라 오해하는 것 역시 금물입니다.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눅 20.35) 하신 대로 신령한 몸은 성별도 물론 없으니까. 모두가 여성미와 남성미를 두루 갖춘 호화 찬란한 신령한 모습이며 초능력으로 얼마든 서로를 식별하는 것입니다. 아담 범죄로 신령한 몸을 상실하기 전에는 자식 샹산도 초능력으로 진행되는 것이었으나 범죄 후 동물성 육체로 전락하면서 짐승의 암수 교합과 똑같은 양상이 되어버린 것.

따라서 아담 후대들은 남녀 성별도 없었고 아담 부부만 그런 유사한 모양새였을 뿐으로 오늘날과 같은 동물적 육체 속성은 아니었다는 것이,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창 3.16)이라 하신 말씀에서 확인됩니다. 현재의 인간의 식욕, 성욕, 수면욕 등 단순 욕구는 동물성 육체가 되면서 생긴 것으로 신령한 몸일 때의 무궁무진한 다양성의 쾌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너무나 단조한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니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한다"(고후 5.16)고 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육체"는 그 의미가 성별 관련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몸"(롬 6.6)됨도 가리킴이라 혹자 말할 수 있겠으나 주님도 "육체대로 알았다"는 대목이 있으므로 주님은 우리와 달리 성령이셨기에(인간의 영이 아닌) 우리의 죄 짓는 육체와는 처음부터 구별되십니다. 죄를 짓지 않으셨다고 또한 선언하셨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가 이제 "다시 새로 창조되어" 있음에 바울 사도가 역점을 두고 있음에서도 그러합니다. <아담이 애초 창조되었을 때 신령한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율 사도의 이같은 관점을 따를 때 댜대적 인식 변화가 불가피해집니다. 즉 아직도 우리는 낮은 몸, 육의 몸에 속해 있어 영광의 몸, 신령한 몸이 아니지만, 나와 남을 막론하고 인식만큼은 후자 쪽으로만 고정시키자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논리적으로 하자는 없습니다.

메사야 예수 우리 주님께 대한 인식도 더 이상 복음서 기록에서 연상되는 육체대로의 그런 자연계 물질적 형상의 모습이 아니신, 바울(당시는 사울)이 직접 뵈웠던 "정오의 태양보다 더 강도 높은" 찬란한 광채의 "영광의 몸"으로서의 모습이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상상력에도 지금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의 변화만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어닙니다. 특별히 우리 믿음의 식구들 상호간 인식에서 그러하다고 봅니다.

신령한 몸에는 현란한 광채뿐만 아니라 늙음이 없어 모두가 새파란 이팔청춘들뿐입니다. 늙음은 한낱 죽음의 전조/前兆에 불과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모습을 호호백발 노인으로 표현해 놓는 것은 성경적 무지의 극치라 핳 수 있습니다. 종전의 인식을 모두 바꾸어야 합니다. 사실대로 인삭하는 것은 훌륭한 작업입니다. 타당성이 충분합니다. 우리의 새 창조에 대한 이러한 정당한 인식은 실로 획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생활에서도 감지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비극적이고 비정상인 현재의 우리의 현실에 대한 과감한 치료책의 역할일 수도 있습니다.

더욱 핵심적인 것이 주님과 나와의 실질적 관계입니다. 다른 어느 누구와도 아닌 꼭 나와만 관계하시어 함께 계셔 주시는 그런 똑같은 의미로 모든 사람에게 그러하심이 성령으로 계시고 역사하심의 의미인 것입니다("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保惠師/Comforter)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니"ㅡ요 16.7). 위의 설명과 같은 성령으로 한 날 한 시 세계 방방곡곡 각 사람과 함께 계시는(왜냐면 만유 안에, 만유를 관통해, 만유 위에 계시는 만유 충만의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이신 메시야 예수("구원자"라는 의미) 내 주님이신 것입니다. 남녀 성별에는 전혀 해당하시지 않지만(지금까지의 설명대로) 오히려 더욱 더 하신 사랑의 상대/대상이시요 주인공이신 것입니다. 지구상 어느 누구보다 내게 가까우신 존재가 주님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짜르트와 베토벤의 사랑의 연가를 올리니 주님(사람 창조 이후 가장 사랑스러우시고 가장 아름다우신 오직 한 분 그리고 사람이신 이 성자 하나님께서는 바로 성부 하나님의 모습ㅡ"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ㅡ요 14.9)께 불러 드리는("너희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ㅡ엡 5. .19) 노래로 각자 그 가사에다 우리말을 지어내어 붙여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일반 찬송가와는 또다른 정서에서ㅡ).



프리츠 분들리히
모짜르트의 요술피리에서
https://youtu.be/uVb12RXmM0M?si=wJwqAxdSbdOqLA0y

베토벤의 사랑의 노래, Ich liebe dich,
Tenor - Peter Schreier
Piano - Norman Shetler
https://youtu.be/YXtbCEnIF-0?si=HGKb7h2jkHDQ9cXb








"씨름하는" 기도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창피스럽기 그지없는 동물성 육체가 되어버린 비극의 주인공 인생들을 장악하여 멸망 길로 끌어들이기에 광분하는 사탄 왕국(악령들의 징글징글한 씨앗들인 "네피림"이라는 별개 인종들이 설쳐대는)인 <백해무익>의 현세상임을 우리 마음에 아로새기어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씨름을 하십시다.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아담 즉 "마지막 아담") 재림 세상이 되어야 비로소 살 만한 인간 세상, 세상다운 세상으로 회복됩니다. 하나님 은혜로 새로 지으심 받아 다시 나서 새 피조물된 우리는 이 현실을 똑바로 직시해 항상 의식하는 중에서야 마땅히 대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위 "과학 문명"이 발달하여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세뇌되어 왔으나 천만의 말씀! 신령한 몸의 초자연계적 작동(삶)에 비하면 아이들 소꿉 놀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림없는 <눈 속임>에 불과합니다. 실상대로 말하면 이 모든 것은 "악한 자" 적그리스도 출현을 위한(손쉬운 적그리스도 세계 통합을 꾀하는) 악령들의 짓거리의 일단일 뿐입니다.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런 비극적 동물성 육체는 여전히 그대로인데에 이보다 더한 "진보 발전"이 있은들 그게 무슨 대단한 것인가요.

하나님의 애초 창조의 초자연계적 "영광의 몸"(고전 15.44/빌 3.21)에 비하면 전적으로 무의미, 무가치 그 자체입니다. 초자연계 속성의 모든 아름다움과 그 경탄스러움은 아담 부부만이 체험한 것이라 우리야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니까 상상조차 못합니다. 이런 비참한 실태를 우리는 마음에 깊이 아로새김으로써 <천국에서의 탈락>을 한사코 면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5) 하셨으니까. 세상에 연연하여 미련을 접지 못하는 사람마다 "어린 아이 같은 받듦"이 아님을 누구나 알 수 있으니까!

어린 아이는 다소곳이 그 원하는 하나에만 골똘히 집중하는 순수한 특성이 있습니다. 천국에서의 영생도 원하고, 세상에서 밑지지 않게 남 부럽지 않게 사는 것도 원하는 <양다리 결치기>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 "천국"입니다.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마음이 갈라져 요동치는 것)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  7.33-35).

이렇게 요동치는 마음으로는 얍복강 가에서의 야곱의 "기도 씨름"이 불가능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말하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말하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습니다...그 사람이 망하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다...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창 32.24-30)는 뜻이었습니다.

기도는 "씨름"이요 따라서 "이기는 자"가 축복을 받아 기도 응답이 되는 것이니 실로 "결심하고 기도에 임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림>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천사의 복음" 전파에서 이를 위하여 기도로써 씨름하시는 기도의 동역자 여러분이야말로, 이 <21세기 하나님 역사>에서의 주역들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 세상은 나부터 화급히 구원 받았으면 다른 많은 이들도 화급히 구원 받아야 마땅하니까 달리 딴 것에 마음 둘 틈이 없는 것이 정상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눅 9.62) 하심은 그런 자세의 사람들은 자아중심이므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전제 조건은 "회개"("<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ㅡ막 1.15,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ㅡ행 3.19,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ㅡ행 26.20)이기에 자아중심을 버리는 것이니 그러한 회개의 결단은 주님과 하나됨으로써 자아중심의 "죄의 몸"(롬 6.6)이 "멸해지는"(:6) 것이 현실화함인데도 여전히 이전처럼 자아중심이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질 때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할 것이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림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들에게 나음은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응하였다"(벧후 2.20-22)가 될 뿐입니다. 

이 <죽음>의 세상에서는 주님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의 <죽음>의 대상이 되는(골 1.24) 것 이상의 최고 영예는 없어

 



이 죽음의 동물성 육체는 미력이나마 주님의 고난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뜻에서는 최대의 가치


성경에 "한 때, 두 때, 반 때"로 상징된 "천사의 복음"(계 14.6)을 통해 전파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믿어 참으로 성령을 받아 모신 각자 "성령의 성전"(고전 6.19)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종전과 같은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자칭 "구원 받은 자"라는 자기 기만이 아닌), 위의 계시록 12.14에 적시한 대로 하나님 은혜로 "양육 받아"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4.24/골 3.10)되어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갈 5.25) 상대방증심의 일관된 자세일진대 모두가 "성인들(saints)"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함"은, "또 <저들을 위하여 제가 저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요 17.19) 하신 것처럼, "<상대방을 위하여> <내 스스로 노력하는> <내 의지력>과 관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게 "사랑"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 가능한 일이 "거룩하게 됨"이니 어려운 일도 힘든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 5.3) 함과 같습니다. 

사탄의 속임수로 인해 비정상이고 병적인 자아중심에 너무나 매몰되어 있기에 "거룩함"을 마치 어마어마하게 불가능한 무엇인 양 여기는 당치도 않은 선입견에 우리는 더 이상 휘둘리지 않아야 합니다. 무턱대고 "살았으니 이왕이면 잘 살아야 한다"는 맹목적인 세상("삶"에 대한) 사랑이 그 원인이라, "돈을 사랑하는" 탐욕에 멋모르고 빠져 허우적거리기 때문에 그런 것뿐입니다. 새파란 청춘이라도 오늘 내일 어찌 될지 그 누구도 모르는 실로 덧없는 이 육체로서의 기막힌 처지에, <살고자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는 것이 실로 "미친 마음"(전도서 9.3)이 아니면 무엇인가요! 

이런 마음을 "미쳤다"고 인식하면서도, 이방 여인들에게 빨려들어 세상 사랑에 허덕이고 빠져 나오지 못해 감히 하나님 앞에 못할 짓을 자행한 솔로몬왕 그 자신! 다윗은 그럴 경우 통회 자복을 했다지만 솔로몬 자신은 그런 기록조차도 찾아 볼 수 없으니! "나"라고 해서 그보다 나을 것 없습니다. "별 수 없이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란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과거 "죄의 몸"(롬 6.6)이 "멸해진"(:6)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애초 거룩하게 의롭게 창조되었던 아담이요 용/이건만, 그렇게 처참한 꼴이 된 것을, 바로 그 사실 앞에서, 우리는 경악하고,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고 있는"(빌 2.12) 이런 현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과 나을 것 없다는 뜻입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과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바쳐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결국)'은 영생이라"(롬 6.22).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어 주셨으니"(롬 6.22).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고전 6.1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한다"(살전 3.1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살전 4.3).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은 것이다"(히 10.10).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상속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너희는 말씀하신 자를 거역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라. 땅에서 경고한 이를 거역한 저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그러므로...은혜...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것이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다"(히 12.14-29). 

거룩함의 본질을 이상 말씀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천사가 가진 복음"을 통해 처음부터의 복음(사탄의 거짓말인 "바벨론 신학"이 아닌) 듣고 믿는 "하나님의 백성"(계 18.4)들은 이 글 모두에서 밝혀진 대로 곧 닥칠 적그리스도 아래에서 영광의 순교를 할 것이 예정되어져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환란의 날이 오기 전 하나님 백성을 단련/정련 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십니다.

고로 "천사의 복음"으로 "양육 받음으로써"(계 12.14) 연단된 우리는 마지막 복음 전파의 이 황금 시기에 가일측 기도/전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 때가 지나면 곧장 주님 재림의 영광의 날이 오므로 더 이상 "일할(하나님 앞에서 온 천하보다 소중한 영혼을 건져내는)" 기회가 오지 않으니까 실로 막중한 무게의 이 시간들인 것입니다. 








2026년 1월 20일 화요일

하나님의 택하심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서 비롯되는 것

 


"(나사렛 예수)...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주신 바 되었거늘 너희가...못 박아 죽였으나"(행 2.22,23).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니"(벧전 1.2).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택하심")/"예정"은 "미리 아심"을 근거로 하심입니다. 즉 구원 받을 사람이 복음을 듣는 경우 자기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게 될 것을 <미리 아시기>에, 아무쪼록 그 "믿은"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아무런 불가항력적 방해나 장애를 부당하게 받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조처해 주시는 것이 미리 "택하심", "예정"이신 것입니다(행 3.20/4.28/엡 1.5,9/3.11). 이는 어버이로서의 창조주되신 위치에서 너무나 당연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내가 택하심을 받지 못했다면 또는 혹 네피림 중 하나라고 한다면 아무리 믿으려고 또는 믿음 지키려고 용을 써보아야 헛수고가 아닌가" 하는 망상에 젖어 있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 잡념은 악령들이나 집어 넣어 주는 것이니까. 내가 내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여 순종하는 한 그것이 바로 내가 택하심 받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와 같이 그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을 샅샅이 꿰뚫어 보시고 미리 아시는 분이므로 인간 생애를 관장하는 3운법칙도 인간 창조 당시부터 얼마든지 정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담을 신령한 몸으로 만드셨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 범죄하여 애초의 동물적 육체로 회귀해버릴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라멕의 살인 행위를 보시고 나서야> 인간 생애를 이같이 주관하는 조처를 취하심이 아닌 것입니다.

먼 훗날 이 세상 "마지막 때" 21세기에 이르러, "천사의 복음"이 선포될 필요성을 미리 아시고 그에 상응하는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위해서 미리 준비해 두셨던 일련의 작업이셨던 것이니, 즉 3운법칙을 정하시게 된 이유 그 배경적 상황을 이같이 <일부러> 보이시는 그 명백하신 자취와 흔적을 나타내심으로써 이 세대에 각자 직접 하나님을 확증하도록 해 주심이었던 것입니다. 이 깊은 의미를 마땅히 제대로 음미하고  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천사가 가진 복음"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임을 전지구 인류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한 가시적 증표이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동선/動線(움직이심)과 동기/動機(그 움직이심 또는 역사/役事하심의 목적) 그 자체를 목도/目睹케 하심입니다. 이를 명명백백히 입증하여 확인시켜 즈심이니, 이보다 더 정확한 족집게 하나님 <실존>과 그 모든 <말씀의 진실성> 확증이 또 있으리요! 이러한 면에서 가히 인류사 최대의 "표적과 기사"(요 4.48)라 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하신 대로, 이 모든 "표적과 기사"가 주님께서 친히 (이제는 성령으로) 행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마지막 때 마치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과 같이 새롭게 하나님을 확인하게 해 주셨으니, 때문에 계시록에 이 사실을 가리켜, 새삼스럽게 전지구적 규모와 범위로 하나님 소개를 이제 비로소 하는 듯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한 것입니다. 2천년 가까운 사탄 일당의 "바벨론 신학"의 "영적 죽음", "대신 죽음", "로마서 7장", "행함과 믿음에서의 '말씀 혼잡'" 등 첩첩이 쌓인 엄청난 온갖 거짓말을 깨뜨리고 뒤늦게 진실과 진리를 정상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보통의 작업이 아니기에, 이같은 미증유의, 일찍이 없던 "표적과 기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2026년 1월 17일 토요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력을 <발휘>하는 21세기 "표적과 기사"

 


세상은 아담 범죄의 결과로 "거짓말의 아비"("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자아중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함이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자아중심]>으로 말함이니 이는 그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다"ㅡ요 8.44) 사탄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음을 항상 의식하는 것이  진리(거짓이 아닌)를 아는 우리들의 <세상 거짓과 속임수>에 대처하는 크나큰 자산(밑천)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니엘의 21세기 예언("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빠르게 왕래하며 지식이 더할 것"ㅡ단 12.4)대로 교통 통신 등 분야의 급속 발달(이 모두 주님의 재림에 대처/대비하는 사탄의 초능력의 일환)로 인해 사탄의 거짓말/속임수가 어지러울 정도의 소위 "정보 홍수"를 이루어 범람하고 있는 이 때 그 계략에 속절없이 말려드는 낭패를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 일당들은 거짓말만 나불거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수작을 통해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소모시키는 것도 그 전략 중 하나이기 때문. 따라서 21세기 "천사가 가진 복음"의 충성된 전파자인 우리들로서는 성경상으로 충분히 밝혀진 천사의 "표적과 기사"(요 4.48) 즉 3운법칙 관련의 방패(shield)만을 들고 있어도 우리 소임을 다하는 오늘날 전투 현장에서 일보도 밀릴 이유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과 그 말씀이신 성경의 <진실성> 관련해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력입니다.

고로 흔들림 없는 요지부동의 자세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to give ourselves continually to)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악령들은 중점적으로 기도를 방해합니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기도의 실질적인 위협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파에서 교회 사상 괄목할 만한 업적을 기록한 역대 인물들은 예외 없이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배경이었고 기도의 산실/産室(birthplace)로부터였습니다.

"너는 범사(매사)에 그를 인정("쉬지 말고 기도함으로써"ㅡ살전 5.17)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 "In all thy ways acknowledge him, and he shall direct thy paths."(KJV)


본격적인 기도자는 "하나님을 돕는 자"

기도에 본격적으로 힘쓰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스스로는 "구원 받았다" 또는 <대형교회 교역자>라 하여도, <싸울 줄>도 모르고 <일할 줄>도 모르고 그냥 무용지물. 세상에서 무용지물이라 천국에도 무용지물일 터이니 그냥 천국 입국 사절. 그냥 '놀고 먹는' 사람이 많은 것이 오늘날 "교회"의 일반적 특징이니 그대여, 너무 늦기 전에 각성하시라. "여호와의 사자(使者)의 말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강한 자, 이스라엘의 원수)를 치지 아니함이라" 하였다"(사사기 5.23). 영적 전쟁이 한창 치열한이 시대에 기도로써 "하나님을 돕는" 것이다. 성령으로 오늘도 우리 인간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신음 중에) 간구하시는" 성자 하나님을 도와 드림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다. 그가 출가한 후 7년간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84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더니 마침 이 때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니"(눅 2.36-38).

이처럼 지극 정성으로 하나님 섬긴(기도로써) 하나님의 여종이라(19세에 결혼했어도 당시 나이 100세를 넘겨),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세상에 오시는 구주님을 영접해 맞는 지구상 단 두 명의 영접사 중 하나로 뽑아 주셨으니 그 영예/영광이야 하늘을 찌르듯 드높다. 과연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기도하는 심령을 얼마나 소중히 보시는지 그 좋은 본보기라 할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이런 설명을 덧붙일 리 없다. 이를 통해 오늘날도
<성령의 메시지>를 우리는 듣게 된다. 그대여, 이 교훈의 소중함을 부디 마음 속에 새겨 두시라. 




2026년 1월 16일 금요일

기도 않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무지무식의 극치


3운법칙이 아담 범죄 직후 즉 세상("세상"이라 함은 인간이 아담 범죄로 부득불 동물적 육체로 움직여 구차히 명맥을 이어가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지구상의 무대'를 가리킴)이 갓진행되기 비롯하던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데에 이 대목에서의 6하원칙 적용의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다름아닌 그 "누가(HO"의 정체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아주 강력하게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이 동물성 육체의 본능 곧 "죄의 몸"(롬 6.6)에 지배되어 짐승처럼 설쳐대는 판인지라 이 "인간 짐승들"을 3운법칙이라는 운명의 우리(cage) 안에 가두어 두심이니, 인간의 이 야수성을 제재하는 역할만 아니라 이로부터서의 보호 구실도 겸하여, 시도 때도 짬도 없이 죽음을 당하는 만행(가인의 아벨 살해와 같은)의 비극이 없도록 조처하심입니다. <죽을 때>가 되어야 죽도록 "죽음의 때"를 정해 주심입니다. 실로 살벌하기 짝이 없는 살풍경의 인생 무대입니다. 이런 짐승 같은 날파리 목숨이지만 그마저 '삶'이 아닌 '죽음'의 비탄스러운 연출 공간이 이 세상. 


이같이 <세상에서 나그네>된 우리의 실상을 알려 주고 경고하기를 성경은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일구월심 자기의 근본인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마음뿐 달리 다른 마음은 눈곱 만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고향"이라 함은 애초 인간을 창조하셨던 그 <신령한 몸>. 이 세상은 주님이 실상을 밝히신 대로 "죽은 자"(마 8.22)들의 집합소. 뿐 아니라 악한 영물 용/의 지배 아래 있어(아담이 하나님의 말씀 대신 악마의 거짓말을 더 추종함을 인해 자초한 것) "이 세상 신/"(고후 4.4)의 왕국. 따라서 세상 삶에 연연하여 "남 밑지지 않게" 살려고 "개밥의 도토리 신세" 면하겠다고 끙끙대는 이마다 "천국"(신령한 몸으로의 환원/복귀ㅡ눅 9.27) 영구 탈락입니다. 결과론적으로 죽음과 사탄의 세상에 속하려고만 애썼으니 그 원대로 사탄과 함께 불못으로 들어가는 것뿐. 


그러하나, 이 엄청난 비극의 현장인 세상 실상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구제책인 "은혜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도리를 만인간에게 화급하게 알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알려 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면, 왜 주님께서 세상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히 5.7)을 올리셨던가요? 왜 지금 성령으로 계시면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롬 8.26)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인가요? 마치 우리 구원이 아직 <미완성>인 것처럼? 


그렇습니다.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머리이신 주님께서 그리하셨으니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있는 우리 각자도 머리되신 주님과 동일 보조를 취하지 않고는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는 엄중 경고임을 반드시 <뼈저리게>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초대교회 당시 말씀 전파의 업무를 전담하던 사도들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행 6.4) 한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기도를 아 세웠슴니다. 왜 그렇게 기도가 필수이냐, 우리가 아는 대로 사탄이 이 세상 신으로서 세상을 직접 지배함이 그 이유입니다. 치열한 전쟁 상황인 것입니다. 그 현격한 예시가 오늘날 드러난 "바벨론 신학"의 엄청난(거의 2천년간에 걸친) 횡포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감히 일개 피조물인 악령이 훼방을 놓다니?"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벌어들인 화근이요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범죄자 사탄의 거짓말을 더 따른 당연 결과가 "죽은 자"됨 곧 '동물성 육체로의 전락"과 '사탄의 인생 지배'인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인간 세상이 존속하는 한 사탄의 인간 지배는 존속하는 것이요, "바벨론 신학"과 같은 거짓말은 그 기세를 떨칠 수밖에 없는 세상 구조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현재 구원의 은혜는 다름아닌 <하나님(성자) 친히 '죽은 아담'을 대신해 아담 역할을 하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역사이시므로 그래서 사람되셨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원수 사탄과의 전쟁"(창 3.15) 중이신 것입니다. 아담 스스로가 자기 범죄로써 사탄의 명맥을 이어 주고 기승을 부리도록 만들어 준 꼴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의 양상은 원수에게 먼저 발꿈치를 물리고 그 뒤에 그 머리를 발로 으깨어버림으로 끝남이기에 지금까지 그 물린 고통 중에 있는 전황이요 마침내 주님 다시 오심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어 머리를 밟아버리게 되므로 사탄(그 패거리 악령들과 함께)은 무저갱에 천년간 유폐되고 네피림 무리들은 불못으로 모조리 들어가 영구 청산되는 그런 전투인데 아직 재림파시지 않은 것입니다.


왜 "천년"이냐 하면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세상을 통치할 기간이 천년이었기 때문에 그 기간을 "마지막 아담"께서 비로소 채우심입니다. 아담이 범죄 않고 살았다면 그 천년간 세상을 다스리며 악인과 의인 및 악령과 거룩한 천사를 "마지막 심판"으로 가려내어 악한 자들을 불못에 던져 넣어 세계를 완전 정리해 변치 않는 영원한 왕국이 비로소 전개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범죄로 수행하지 못했던 바로 이 일을 새 아담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 이행하심이 메시야 예수("구원자"란 뜻의 히브리어) 우리 주님의  "천년 왕국"입니다. 사탄 일당이 무저갱에 있다가 이 천년 말에 방면되어 난동을 피우게 되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지 않아 세상을 통치했더라도 천사 가운데 용과 같은 악령들이 생겨 기회를 엿보다가 천년이 끝날 즈음에 필연적으로 반란을 노리게 마련이므로 이와 대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사탄 일당(숱한 악령의 씨들인 네피림 포함)의 지배 아래 놓인 세상이라 그리고 이것이 아담 범죄의 불가항력적 결말인지라, 이들 악의 세력이 <사생결단하고 인생 구원을 막고 방해>하므로 하나님 친히 그 크신 사랑의 구원을 이루셨다고 전부가 아니니 절대 <안일한 생각은 금물>입니다. 여기서 기도의 필요성이 절대적입니다.


발꿈치 물린 상황의 치열한 싸움의 발로가 이 "기도"로써 표출됨이니 이것이 지금 거론되는 기도의 중요성인 것입니다. 기도가 없다는 것은 전투를 포기하고 적에게 바로 투항하는 것이니까. 기도 없이 말씀 전파만 강행하는 것은 심각한 백해무익의 자기 기만임을 알아야 하는 것. 


이 경우 사탄 일당의 세력을 아예 싹쓰리 제거하시면 되지 않는가 한다면 그렇다면 아담의 범죄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가 되기에 원리원칙대로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의 의미와 그 중차대함을 마음 깊이 아로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의 마술에 걸려 대부분 아이들처럼 굴었던 <철부지 코흘리개>였던 것입니다. 



2026년 1월 15일 목요일

육하원칙에 의한 21세기 "표적과 기사"(요 4.48)



거룩하신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가 명확히 육하원칙(六何原則)에 의해서 발표된 것은 유사이래 최초이자 마지막(주님 재림 전으로는)입니다. '육하원칙'은 기사나 보고서 등 신뢰성 있는 글쓰기에서 필수적으로 다루는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어떻게(How), 왜(Why)의 6가지 핵심 요소를 말하는 바, 글의 기본적인 뼈대를 잡아주는 중요한 원칙(영어의 "5W1H[Who, What, Where, When, Why & How]")입니다. 이 6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글을 구성하면 정보 전달이 명확해져 글의 완성도가 높아지므로 교육과 실무에 널리 활용됩니다. 

여기 "6하원칙 하나님 표적과 기사"는 다름아닌 "21세기 표적과 기사" 중 하나인 3운법칙을 말합니다.

• 누가(Who): 행위의 주체.....1. 하나님
• 언제(When): 사건 발생 시점.....2. 인류가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으나 아담 범죄 결과로 "육의 몸"(고전 15.44) 즉 "죽은 자"로 돌연변이하면서부터 그 초자연적 특성의 기운이 한동안 잔존했던 현상으로서 그 결과 노아 당시까지도 천년 가까운 수명이었을 때
• 어디서(Where): 사건 발생 장소.....3. 시기심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던(창 4.6) 현장 및 "소년"이 라멕에게 달려들어 해치려 하자 라멕이 자기 방어로 엉겁결에 소년을 쳐 죽인(4.23) 두 살인 현장
• 무엇을(What): 사건 내용 즉 대상.....4.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 생애를 말함이니 다시 말해 일정 연령에 달하면(18,9세가 넘으면ㅡ프랑스의 쟌다르크 소녀가 현재 그 대표적 예)
• 어떻게(How): 사건 진행의 방식.....5. 만유의 기본 원리인 3위1체의 법칙에 기반한 3운법칙으로 LP(활동기, 전성기), DP(비활동기, 침체기), JP(유청소년기ㅡOT, SN형에만 적용되고 FS형은 3위1체 도식/圖式 다시 말해 성경에 "한 때, 두 때, 반 때"로써 미리 예언되어 있었던 형식에 맞추어져 제외) 따라 철저히 통제 관리됨으로써(그렇게 되도록 모든 인간의 운명을 처음부터 미리 정하심)
• 왜(Why): 사건의 이유 즉 원인.....6. 가인과 라멕의 경우처럼 어느 누구든 사람 목숨을 함부로 끊어 놓지 못하게 철저한 보호막 울타리를 쳐놓으신, 마치 이 모든 것을 카메라 렌즈로 "아담 영상(ADAM pix)"의 DPA(Devils' Practical Appearances), NSO(Nephilim Soul Orbs)가 촬영된 것처럼(사진처럼 완벽한 증거는 없어) "촬영된"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의 가시적/可視的 <실물 증거>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보다 격조 높은 "표적과 기사"는 없기에 이 "마지막 때" 유사이래 최초의 "21세기 표적과 기사"라 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실존> 및 그 <역사/役事하심>의 200% 확증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거듭 거듭 강조하신 것이 "구하면 이루어 주신다"는 역속이십니다. 물론 자아중심의 이기적 기도가 아닌(자아중심으로써는 이 하나님의 우주에 살 영적 존재가 없어ㅡ약 4.3) 오직 상대방중심의 "새 생명"의 "새 사람"인 경우에만. 왜냐 하면 악령들도 초능력으로 "기도 응답"인 양 얼마든지 속일 수 있으므로 오늘날 "응답" 자체에다 어떤 비중이든 두지 말아야 합니다(마 24.24). 내가 주님 은혜로 새 피조물이 되었는지 여부는 성령 친히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증거하시니까(롬 8.16).










2026년 1월 14일 수요일

로마서 8장 26,27절의 <성령의 기도>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심이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기도할 바를"ㅡ개정개역)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다"(롬 8.26).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NIV-1984) "Likewise the Spirit also helpeth our infirmities: for we know not what we should pray for as we ought: but the Spirit <itself> maketh intercession for us with groanings which cannot be uttered."(KJV)

"마음을 감찰하시는("살피시는"ㅡ개정개역)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심이니 이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다"(:27).

"And he who searches our hearts knows the mind of the Spirit, because the Spirit intercedes for the saints in accordance with God's will."(NIV-1984) "And he that searcheth the hearts knoweth what is the mind of the Spirit, because he maketh intercession for the saints according to the will of God."(KJV)

[아래 "새번역"은 권장할 만한 것이 못됨을 두 가지 점으로 지적한다. "위하여"를 왜 굳이 "대신하여"라 하나? "대신하여 죽으심"이라는 오역의 여파인 것 같다. 우리말 어감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시니까 우리들 자신은 형제들이나 다른 사람 위한 기도에 그다지 관심 두지 않아도 된다"는 큰 일 날 소리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왜 "사람의 마음"이라 하나? 이 대목에서 가리키는 것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신 바, '성부"께서는 사람의 마음은 물론 "성자'의 마음도 아신다는 의미이다.]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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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역에서 NIV는 "친히 간구하신다"에서 "Himself"라 했고 KJV는 "Itself"라 했다. 흠정역은 원어에 충실하다는 정평이 있다. 필자는 성경을 반드시 열심히 읽어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원어 공부 생각은 일절 없었던 것은, 그렇게 되면 거의 사람마다 무조건 원어를 접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불필요한 인식 조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 하나님 친히 살피시는 성경 번역 사업이라 확신했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감리 감독하시니까 단지 영역(KJV)만 참고해도 충분하다 생각한 것이다.

KJV가 성령 관련해 인칭대명사(Himself)를 쓰지 않고(이런 경우에서만)
 "it"로 받은 것은 원문에 그렇게 되어 있음이라 보는 것이다. 그럼 원문 집필자인 바울 사도는 왜 그렇게 표현했느냐 하면,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고전 2.11)이라 했듯이, 사람과 그 영혼을 분리해서 설명한다고 가정했을 경우 둘 다 인칭대명사로 설명할 수 없어 부득불 "영" 관련해서는 "it"로써 구별할 수밖에 없음을 감안했던 무의식적 판단으로 그리 되었으리라 보아도 무방하다는 결론.

하나님께서도 그런 정도야 크게 흠 잡을 이유가 없다고 보셨을 수 있고. 필자의 과문 탓인지는 모르나 성령 관련해 이런 식으로 성령을 지칭한 예는 이 하나뿐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성령"은(여러 차례 설명했듯이) 하나님 성부 및 성자께서 "하나"(요 10.30)로 계심이다. 그러나 성자께서 성부의 형상 곧 <형체>이신즉 <실체>이신 성부보다 항상 전면/前面에 <나타나심>(말 그대로 "형상"ㅡ고후 4.4/골 1.1이시니까)을 감안할 때 이 대목에서도 "성령"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다. 곧 메시야 예수 주님께서 그와 같이 우리 각자를 위해 간구하심이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심"이니, 여기 탄식은 영역에서 "groans"이다. '고통, 불행 등으로 인해 내는 "신음(소리)"을 뜻하며 깊고 긴 소리로 아픈 소리뿐 아니라 극심한 심적 불편을 표현함'이다. 부흥 전도자 찰즈 피니 목사와 마치 그 그림자처럼 함께 하며 기도자로서 7년간 일관되게 동역했던 대니얼 내쉬(Daniel Nash) 목사 역시 그와 같은 기도의 표본이었다. 주님께서 
육체로 땅에 계실 때도 "심한 통곡과 눈물(strong crying and tears)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던"(히 5.7) 그대로다. 기도가 이 정도되면 자연스럽게 금식 기도로 진전하기도 하는 것이다. 

3운법칙을 학문으로?

  운법칙은 지금까지의 그 내용으로도 충분히 판단되겠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길흉화복의 점괘 같은 것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생애를 분석해 보면 더 많은 새로운 사실이 분출돼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흥미 위주로 생애 분석에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