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우리 각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하게 되어 있으니까) 일하시는(선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에게 선읊 행함으로써 하나님은 그 어떤 이에게 선읊 베푸심이 됩니다. 내가 선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만큼 선을 베푸심을 막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믿음" 하나만 줄곧 생각하고 "행함, 행위"를 일절 배제하는 사람은, 우리의 믿음이 그 최종 ⁸결과가 순종(행위)으로 증거됨을 마음에 다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순종(행함)이 없다면 믿음 또한 없다는 증거 밖에 되지 않으니까. 따라서 "구원 받음"에서 "행함"을 마치 비상처럼 여겨 멀리하는 경우(여기서 행위를 우리 구원에 필요 조건으로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행함이라는 개념 자체를 도외시함을 말하는 것) 이 사람은 구원됨을 자아중심의 한 방편으로 여김인즉 영원히 구원될 수 없다고 단정하게 됩니다. 자아중심(아담의)으로 죄를 지어 죽음에 이르면서 구원의 절대적 필요성이 생겼은즉 자아중심을 무조건 배격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자아중심이 아니면 상대방중심뿐으로 성경이 "사랑"을 강조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공로(그 죽으심과 부활)를 믿지 않고 행함 곧 순종만 앞세우면 당시 유대인처럼 율법 행위로 구원 얻자는 것이지만, 이것은 "믿으니까 그 믿음이 행함(순종)이 되어 나오는 것"과는 의미가 아주 다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 편지에서 역설한 것은 전자의 경우이고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후자인 것입니다. 혼동할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경계한 "말씀 혼잡"(고후 2.17/4.2)일 뿐입니다. 우리는 단연 이를 배격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은. 인간은 모름지기 상대방중심으로 선을 행해야 하되, 아담 범죄로 "죽은 자"(동물성 육체로 전락한)이니까 가장 먼저 시급하게 "산 자"부터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 순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세상에 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직결되고 이웃(사람)과 결부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자아중심일 수 없고 상대방중심이 정상입니다. 이걋이 선(착한 것)이고 의(올바른 것, 정의)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영원한 영혼이 있으므로 영생하는 자로 창조된 것인데 첫 사람(아담)의 범죄로 이런 썩음과 죽음의 동물 육체가 되었으니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되는 것(구원되는 것)이 우선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영생하는 것도 아울러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라면서 보기 흉하게 썩어 문드러진다는 것은 도무지 묵과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 썩는 것이 되게 하실 바에야 아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만드실 생각부터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나님 친히 하실 리 만무합니다. 영혼은 영원한데 그 영혼을 담은 그릇인 육체가 영원하지 못하게 하나님이 만드실 리도 없습니다. 바벨론 신학에 빠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제 정신차려 모두 깨어나야 합니다.
고로 이런 망가져버린 흉물스러운 육체는 죽음으로써 종결 폐기 처분되어야 마땅하고 그리고 동시에 원래 하나님 창조하셨던 대로 새로 창조되어야 또는 다시 나 원래의 신령한 몸으로 복귀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부득불 창조주 하나님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어(사람되시어) 우리 각자와 하나 즉 "한 영"(고전 6.17)이 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한 몸"이 됨과 동일한 이치로서 "육으로 남"(요 3.6)과의 대칭인 "성령으로 남"(:6)입니다.
"육"과 "영"으로서의 대칭일 뿐이지 "하나"(요 10.30)됨은 같으므로 그 반드시 뒤따르는 <짝으로서 하나됨>의 요건도 같으니 즉 짝을 이룬 갑과 을은 갑의 것은 을의 것이 되고 을의 것은 갑의 것이 되는 <맞바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몸"에서 남자의 몸은 여자의 소유가 되고 여자의 몸은 남자의 소유가 되는 것처럼(고전 7.4) "한 영"에서는 삶 자체가 그와 같은 형태가 되어 쌍방이 다시는 자기 중심이 아닌 상대방중심이 되는 것. 아담 범죄는, 마땅히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는 하나님과의 "언약(약속)"을 어기고 자아중심으로 나간 결과물이었던 것.
이러한 범죄의 결과로 죽음에 이르렀다가 이제 그 "죽은 자"됨에서 "산 자"로 변환됨에서는 필수 요건이 당연히 자아중심이 아닌 상대방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니, 여전히 자아중심이라면 백 번 구원 받았다 해도 그것은 구원이 어니라는 증거만 될 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에서 "선을 행함"(롬 2.7)이 필수가 되는 이유입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도 역시 없다는 증거인즉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입니다. 모름지기 산 자는 선(상대방중심)을 행해야 하고 악(자아중심)을 버려야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은 상식입니다. 후자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것 밖에 없으니까 사회(공동체)에서 축출되어야 마땅한 때문.
상대방중심이 일관성 있게 지속되어 나갈 때 이를 우리는 "거룩함"이라 하는데,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한 그대로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됨은 상대방중심이 됨과 동일한 뜻이요 자아중심으로 머무는 한 제아무리 "구원 받아도"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상과 같이 바울 사도는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살전 5.15) 것은 자아중심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아 주마" 하심은 상대방중심을 말씀하심입니다. <영생에는 상대방중심인 자만 들어간다>는(롬 6.22) 이상 바울 사도가 말한 사실을 다시 마음에 새깁시다. 행함이 아닌 은혜의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극구 주장했던 바울 사도 자신이 명명백백히 마무리 지은 결론임을 다시 강조하니 우리 모두 명심합시다. 상대방중심은 선한 행위로 일관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 때부터의 생명의 법칙에서 그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를 강조합니다. 내가 원수를 갚는다고 가정할 때 바울 사도가 믿기 전 사울이었을 당시 딴에는 하나님의 원수들을 척결한다는 열심으로 종교적 핍박을 교회에 많이 가했는데 그러면 그 사울을 응징하는 나는 장래의 바울 사도를 해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여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하게 됩니다. 고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일임함이 최상의 현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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