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31일 토요일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으로 3운법칙이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강제력(간섭) 발동이 확인됨으로써 아담 범죄와 죽음의 이세상이 결단코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임이 증명되었으니 (5)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으로 3운법칙이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강제력(간섭) 발동이 확인됨으로써 아담 범죄와 죽음의 이세상이 결단코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임이 증명되었으니 (4)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으로 3운법칙이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강제력(간섭) 발동이 확인됨으로써 아담 범죄와 죽음의 이세상이 결단코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임이 증명되었으니 (3)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으로 3운법칙이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강제력(간섭) 발동이 확인됨으로써 아담 범죄와 죽음의 이세상이 결단코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임이 증명되었으니 (2)

 


3운법칙은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 만유의 법칙, the law of duality, the Universal law)과 상호 검증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으로 3운법칙이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강제력(간섭) 발동이 확인됨으로써 아담 범죄와 죽음의 이세상이 결단코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임이 증명되었으니


 

2024년 8월 30일 금요일

아담 범죄와 죽음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가 아직 식지 않으셨으니 이 아침 이슬 같은 시간들은 오직 인간 구원을 위해 임시로 만들어 두신 것일 뿐인즉 오로지 이 일에만 모두들 전념해야 합니다


 

2와 3의 과학으로 싸인 "천사가 가진 마지막 때의 복음" 전파자가 되어야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쌍대성/雙對性(duality)"은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자주 쓰이는 말로서 그치지 않고 모든 과학의 총본산/總本山인 3위1체의 법칙(그래서 "만유의 (기본)대법칙"이라고도) 그 자체임이 오늘날 성경으로 입증되었으니 이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일대 사건이라 해야 제격일 것. 사물의 모든 이치가 <하나>로 귀결됨이니 그야말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다. 만사, 만상이 단순화, 체계화, 단일화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요 10:30)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니까. 이 사실이 이제 아주 확립된 것이다. "쌍대성"은 "2(짝은 둘로 표현되니까)의 과학"이다. 그러나 이 '둘'은 '셋'으로 또한 전개되는 특징이 있어 여기서 더 진전/進展해 나갈 여지가 있다. 창조주께서 "3위1체"로 계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성부/聖父)와 아들(성자/聖子)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마 28:19).

창조주께서 성부와 성자로 "쌍대성"으로 계시나 둘로 나누어 계시지 않고 "하나"(요 10:30)로 "합하여"(고전 6:17) 계시는 모양새를 가리켜 "3위1체"라 하는 것. 이를 표현하여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으로 계신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물질은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이다. 성질은 정반대이나 본질은 같기 때문에 "하나"로 존재하는 불변의 이치 그대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짝(이중성, 쌍대성)으로 하나되어 있는 구조로서의 일관성으로부터 결코 벗어남이 없다. 바로 이와 같은 원리로 만유는 창조되었고 영원히 존속하는 것. 따라서 생명의 법칙이 이를 따름은 물론이다.

'2'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3'인 것이니, '짝'으로서의 '2'가 되기 전의 '하나(1)'였던 것과, 지금 '짝'으로서 '둘'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성질이기에, '짝'으로서의 '2'와 그 '하나'로서의 '1'을 보태어 '3'으로 표현함인 것. 때문에 "2의 과학"이기도 하고 "3의 과학"이기도. 1이었던 것이 2로 갈라졌으나 3으로 진전되었다 할까. 고로 입자와 파동의 2중성에서, 입자와 파동이 <동시에> 나타남이 없고 입자 아니면 파동, 파동 아니면 반드시 입자 홀로 나타나는 특질을 지닌다. 둘이면서도 하나이기 그러할 수밖에8 없다. "상반/相反은 상보/相補(CONTRARIA SUNT COMPLEMENTA)" 그대로다. 왜냐면 갑과 을로서의 짝일 때 갑은 전적으로 을만 위하고 자기를 위함이 없으며 을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을이 아니면 갑이, 갑이 아니면 을만 나타나는 법.

이렇게 서로 위하는 것을 "갑 안에 을이 있고, 을 안에 갑이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하심과 같다. 단 성자께서는 실체/實體이신 성부의 형체(형상)이시므로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형상이지 실체가 드러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내가 주님과 "한 영" 곧 하나되어 있음도 마찬가지. 주님은 성령으로 계시니까 오직 보이는 것은 나이지 주님은 아니시다. 그러나 저 형제가 성령 받아 모심으로 구원 받았으면 저 형제를 통해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이실 수 있으니 믿음의 형제자매를 대할 때 항상 주님을 대하듯 해야. 구원되어 주님을 모신 특징은 자아중심이 아닌 자기 부인임이 그 증거됨을 항상 명심해야.

하나님 말씀이 진실 그대로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심을 한 마디로 쐐기를 박으신 것이 다름아닌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한신학/韓神學(K-theology)"이 곧 "한과학/韓科學(K-science)"이요 "한과학"이 곧 "한신학"이라 하는 이유ㅡ둘 다 그 발원/發源이 21세기 한반도이니까


 

짝의 법칙은 세상에 이미 널리 알려졌던 것이나 정작 그 핵심이 바로 성경임을 이제껏 몰랐던 것뿐인데 3운법칙을 통해 이제야 확인된 것


 

2024년 8월 28일 수요일

2024년 8월 26일 월요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핵심 골자

상대를 봄으로써 

상대를 위하는 것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요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며,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13:1-13).


위에 지적한 모든 것은 "성령의 은사/恩賜(선물)에 속한다. 성령의 선물을 나타냄은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증거인데, 성령이 계심에도 사랑이 없을 수 있느냐 하겠지만, 사랑 유무는 나의 자유 의지(자유 선택)와 직결되므로 얼마든지 가능하고 그런 상태가 일정 기간(다소간에) 지나다가 그 죄를 즉각 회개하지 않을 경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히 10:29) 것 즉 "하나님 아들을 짓밟는" 망동/妄動으로 끝난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을 의미함이기도 하고 동시에 성자 하나님이시기도 하는 바 성자께서 성부의 "형상"이시라는 점에서 메시야 구원자(예수) 우리 주님으로서 묘사될 때가 대부분.

이는 초대교회 당시의 얘기이고 지금은 적그리스도 때 즉 하나님 모방의 광란기/期이므로 마귀 악령이 '성령 행세'하는 시대라 별 꼴불견도 다 보는 때다. "하나님 너 까불면 나한테 죽어" 하는 귀신의 언사도 거침 없이 튀어나오는 그런 난장판이다. 그들이 자랑하는 소위 "방언"이 귀신의 주절거림이라는 명백한 증거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그런 소리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미친 자만이 자기 부모더러 "너"라 하고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 하겠지.

바울 사도가 여기서 강조한 대로, '구원 받은 증거'는 자기 위주, 자기 본위, 자기 중심의 소멸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형수로서의 사형 집행을 당한 몸'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즉 그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소유/所有함'이 구원 받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를 위함이 없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롬 14:7). 자기를 위하지 않으면 오로지 나를 위하시어 그 자신을 버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인)님(나를 소유하신 나의 소유주)을 나도 <위하고>, 또한 그 분의 지시를 따라(본을 따라) 나와 상대를 이룬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다.

나의 상대가 되는 이는 내가 대하는 모든 이다. 나의 "원수"까지도(눅 6:27,35). 내가 나를 볼 수 없고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내 상대다. 본다는 것은 '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못보면 위할 수가 없다. 아무도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한다. 내 등 뒤를 볼 수 있는가? 그러나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은 그 앞과 뒤, 좌우, 상하를 다 완벽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노자/老子가 말하는 "무위/無爲"와 "작위/作爲"다. "무위자연/自然"이니까 생긴 대로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 <창조된> 그대로 순응함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 창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마치 창조주인 것 같이 일을 꾸미고 만드려고 함이다. 이 "창조"를 떠올리지 않고는 노자의 "무위자연"은 제대로 이해 불가다. 이런 인간사의 최대 골격을 논파하면서도 제자를 두어 가르치지도 않았고 방대한 저술 행위도 하지 않았으며 태생년과 사망일도 불분명한데다 명칭까지도 "노자/老子"라 노인으로 세상에 불현듯 나타났음을 강력히 암시하는 판이니 그래서 그의 "三生萬物/삼생만물"을 다니엘 예언과 같은 성격의 "봉함/封緘"(단 12:4)예언이라 하는 것이며 아담의 후신/後身인 멜기세덱(히 7:3)의 변신/變身이라 하는 것이다.

생명의 창조주이시니까 그 작정하신 대로 설정하신 대로 무조건 순응함이 곧 생명이요 삶의 지혜다. 만사 형통이요 만사 태평이다. "원수 사랑"이 무슨 대단한 것도 엄청난 것도 아니다. 말씀으로 천지 창조를 하셨으니 그 똑같은 말씀이시므로 그 말씀대로 따르면 그만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5:5) 하면 끝나는 일. "다만 <말씀으로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마 8:8).

생명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이 가장 이상향적 삶을 사는 생명의 법칙을 정하셨으니 그

것은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하고 결코 자기를 위하지 않는, 짝(대칭/對稱)을 이룬 <둘>이 <하나>로서 작동하는 3위1체 법칙의 <상대성의 동시성>. 내가 나를 일절 위하지 않음으로써 나 자신을 0(제로)의 위치에 두면 이것이 바로 무한수/無限數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음으로써 모두가 다 나를 위하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든다)가 일어나는 것.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요 10:10) 비결인 것이다. 사람마다 주님과 "주님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고전 11:25) 관계에 들어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을 가리켜 천국이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가리켜 구원 받음이라 함이니 여기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이 믿음에 들어오기 전 필수 요건인 "회개"는, 바로 이 자아중심 즉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만 위했던 일체의 허물 즉 죽을 짓만 쌓아 온 것을 뉘우치고 쓰레기 비우듯 완전히 내다버림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결단하고 믿음의 순종에 들어오는 즉시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이 되는 고로 일사천리로 의/義와 선/善의 고속도로를 주행하게 되어 있는 것. 이 나를 위하지 않는 것은 주님 안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그 무엇이 아나라 창조주께서 창조를 시작하신 순간부터의 영원한 불문율.
짝의 법칙으로 창조 작업에 착수하셨으니까.

믿음은 이렇게 내가 우리 주님과 함께 하나로서 죽은 <사실>을 믿는 것이니 때문에 이를 가리켜 "믿기만 하면 되는 은혜로 선물로서 얻는 구원"이라 하는 것. "믿음"의 의미 그 정체를 모르고 바벨론 신학의 밑도 끝도 없는 허황된 소위 "믿음"을 안개 잡듯이 갈팡질팡헀던 모든 혼돈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죽었는데 무슨 자기, '자아'가 또 있다던가!

앞의 성경 구절에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남 위해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그것이 얼마든지 사랑이 아닐 수 있는 것은 자기 구원의 한 수단으로 여기거나 하나님께 곱게 보이려는 등의 자아중심적 욕구, 욕심으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바울 사도가 이 대목에서 의미하는 "사랑"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인 것. 그리고 내가 내 원수를 갚는 것은 내가 나를 위하는 자아중심이라 그 원수가 행한 죄와 똑같은 악. 내가 나를 위하지 않고, 나를 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니까,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심이다.

주님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저들이 하는 것을 저들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하심과 같이, 또한 바울 사도가 믿기 전 "알지 못하고 행함"(딤전 1:13)이었음과 같이, 알면서도 행하는 악의 경우라도 하나님만이 아시는 부분이므로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일이지 우리의 소관사가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용서하고> <잊어버리는(마음에 듀지 않는)> 것뿐이다.

자연 만물이 자연법칙 따라 한 치 오차 없이 운행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짝의 법칙에 기반한 생명의 법칙(사랑과 삶의 법칙) 따라 그와 같이 함으로써 우주의 조화(둘이 하나됨)를 이루는 것이다. 짝의 법칙을 이해함으로써 모든 과학적 연구가 완벽한 '하나'로서 오늘날 체계화한 것을 가리켜 이 시대인으로서의 우리는 "2(짝을 상징)의 과학" 또는 "3(3위1체의 뜻)의 과학"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다.


2024년 8월 25일 일요일

항상 음미할 가치의 "21세기 표적과 기사"의 경이/驚異



 


죽음과 썩음의 세상 및 지금부터 시작되는 전지구적 파멸의 재앙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 남는 유일무이의 방법


지금은 확실히 때가 메시야께서 다시 오시는 종말이므로 "한류"도 한 때뿐으로 끝나고 단계적으로 전지구적인 각종 재앙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된 뒤에는 "사람이 정금보다 희소케 되고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심"(사 13:12)으로써 완전히 별개의 세상이 새로 전개될 것이기에 오직 유일하게 가치 있는 유의미한 일은 영원 멸망에 처한 현재의 인류가 다 하나님 구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다시 나고("거듭 나고") 새 창조를 입게 하는 복음(구원의 희소식) 전파하는 것 오로지 이뿐이니, 이 일을 위해서 간구하고 함께 모여 합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교인들이 새벽 기도로 모여서는 이같이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를 위해 교역자들과 선교자 및 일반 전도 업무 종사자들 그리고 믿음의 형제 자매들 그리고 나라의 권력자들과 세상의 구원 받을 자들을 위한 기도는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엡 6:18)는 없이, 이기적인 자아중심적 기도만 일삼으니 축복은커녕 죄만 짓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자기를 위할 그 자기라는 것이 없으니 주님과 함께 하나된 이치를 따라 두님과 함께 죽어 더 이상 자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 <내것으로서의 자기>가 아닌 <하나님께 바쳐진 하나님의 것(하나님의 소유)으로서의 자기>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당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셔서 영원히 나의 소유가 되어 계시는 것이 나의 구원 받음이기 때문. 남녀 한 몸되어 육체로 하나됨(고전 7:4)과 똑같은 이치 곧 짝의 법칙에서의 "하나됨" 즉 사랑과 삶의 법칙이요 <상대성의 동시성>인 것입니다.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주관/主管)하지(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함이니".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제것"(요17:10)이라 하심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10:30)라 하심과 같은 뜻으로서, 주님의 성령이 내 안에 오시는 성령 세례로 나는 주님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는 것이라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되니까 그래서 값없이 은혜로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칭의/稱義, justification)>입니다. 고로 나는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골 3:17/15:16) 것이요 주님은 내 이름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나를 위하시고 나는 주님을 위하는 '머리'와 '몸'의 '한 몸됨'의 관계. 이같이 모든 것이 다 '나와 주님과의 하나됨'에 있는 까닭에 주님 친히 내게 "거룩함(sanctification)" 곧 '성화/聖化'가 되시고도 남으시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여, 주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주님 계심인 것(요 14:13,14/10:38/14: 20). 이것이 정확한 성경적 구원의 3위1체 법칙(짝의 법칙)에 의한 골격(뼈대)이니 반드시 명심해야. 성자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것이니(요 10:25/14:26/16:23),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의 법칙과 이치를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체가 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으로 주님을 위함이니까 우리가 핍박 받는 모든 고난 고통도 의당히 주님을 위한 것이 되어 주님의 이름으로 되는 일이기에(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했으니 이야말로 너무나 엄청난 은혜이기에 주님은 "기뻐하고 뛰놀라"(눅 6:23) 하셨을 정도.

다시는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이 점돠 관련해 주님 또한 명백히 말씀하셨으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한다...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義(옳고 마땅한 것)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마 6:19-34).

"먼저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은 먼저 하고 나중 하는 순서를 말씀하심이 아니라 항상 오로지 최우선으로 의식한다는 뜻이니,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신다>"고 하셨기 때문. 이는 "참새도 먹이시고 풀꽃도 입히신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로서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 위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심 즉 한 몸의 이치에서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 위함>인 것입니다. 혹자는 묻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왜 그럼 우리 모두를 부자로 만드시지 않느냐?" 하는데 그러면 반문하노니, "지금이 삶의 때인가, 아니면 죽음이 때인가?". 삶의 때라면 북한교회가 지금 <없는 자, 약한 자, 천한 자>로서 핍박 중에 결코 있지 않을 것입니다. 둘 중 어느 쪽인지 그 명명백백한 증거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 순간부터가 비로소 생명인 것입니다.


2024년 8월 18일 일요일

21세기 영적/靈的 항우/項羽의 역발산 기개세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차등을 두고 차별하실 리 없습니다. 똑같이 사랑하시니까 똑같이 대우하십니다. 모세 시대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실 때에도 많이 거두었다고 해서 그 많은 것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았고 적게 거두었다고 모자라지도 않은 것이 그 명백한 증거입니다. 혹자는 부자로 태어나고 혹자는 가난하게 태어나는 것부터가 이 세상 "삶"이 정상이 아닌 동물적 육체의 비정상이라는 증거입니다. 동물적 육체가 아닌 "신령한, 영광의 몸"이라면 다 똑같이 평균, 평등할 것인데 자연계 물질의 육체가 되다보니 그런 차등이 생긴 것.


이런 죽음의 인간고가 주관하는 현재의 세상에서 호의호식하는 것 자체가(자기가 가진 것을 선한 일에 쓰라고 맡기셨다는 원래의 하나님 뜻을 양심상으로 느낄 수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여 마치 축복 받은 것인 양 여기는 자기 기만으로써) 하나님 앞에 죄가 되어 천국 입국 불가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를 보아도 북한과 같이 교회 핍박이 극심한 데가 있고 미국 등 구미 제국과 같이 자유로운 데가 있는데, 이상과 같이 모든 사람을 평등으로 대하신다는 사실을 기준할 때 핍박 받는 것이 정상이고 편안한 가운데 있는 것이 도리어 비정상이라 위험한 상태에 놓였다는 증거가 됨이 명백한 것입니다. 소위 "자유세계" 에 있는 이들은 이 핍박의 고난 중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기도하며 더욱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하늘로부터의 신호인데도 이를 무시하고 안일 가운데 지내는 것부터가 하나님 앞에 "불법을 행함"(마 7:23)이 되는 것입니다. "한 몸"(고전 12:26ㅡ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의 이치에서 분명코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 몸"이 아니라는 증거만 될 뿐이니까.

이 모두는 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이므로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신다고 해서 그래서 그 고통을 경감해 주신다고 해서 절대로 될 일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 친히 당신께서 세우신 법질서를 무시하심이 되니까. 하나님께서 오직 하실 수 있는 일은, "한 몸"됨의 생명의 법칙에서 죄인된 자로서의 고통의 형벌의 십자가를 친히 함께 져 주시는 것만이 유일한지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지(본을 보이신 대로 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9: 23) 즉 "구원 불가"라는 선언이십니다. 바벨론 신학을 통해 마귀는 이 엄숙하신 명령을 "행함으로 얻으려는 구원"이라고 속여 일괄 처리함으로써 완전히 무시해버렸으니 이 악랄함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아담 범죄 후 지금까지 인간(아담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은 아담에게 하극상/下剋上하여 아담을 시해/弑害한 사탄과의 전쟁(창 3:15) 양상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닙니다. 육체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이나 전쟁은 그 승리가 '사즉생 생즉사(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에 있음은 불변입니다(요 12:25 -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 이를 항상 마음에 아로새기고 있는 자 실로 복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필패/必敗, 영멸/永滅이기 때문. 자아중심이 그 뿌리라는 것도 공통입니다. 하늘 아래 세상 만물이라 하는 것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짝의 법칙에서의 <상대성의 동시성> 즉 생명의 법칙으로 철두철미 운용되어 나가니까.

이 세상은 이미 죄와 죽음으로서의 엎질러진 물 바로 그것입니다. 절대로 다시 쓸어 담을 수 없는 영구 폐기물입니다. 메시야 우리 구원자(예수) 주님의 다시 세상 오시기까지는 절대로 정상화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그 대망/待望의 순간이 오고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죽음을 마냥 회피하려는 "두려워하는 자"(계 21:8)에게는 "21세기 표적과 기사"로서의 하나님 증명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강력 경고합니다. "침노하여 천귝을 빼앗아 차지하는"(마 11:12), "밀치고 들어가는, 강력히 압박해 들어가는, "침입해 들어가는"(눅 16:16) 자에게만 해당되는,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이시기 때문. 그저 안일하게 "믿기만 하면 영생"이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세뇌된 자는 철저히 배제될 것이니까.

"행함으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이미> 구원 얻었으니까" 그 넘치는 기쁨으로, 확신 충만한 가운데 치솟는 은혜의 기력/氣力으로, 당연히 나타낼 수밖에 없는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임을 똑바로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 차이입니다.


2024년 8월 16일 금요일

유사 과학의 정체

 








21세기 정중동/靜中動의 그러나 천지 경동/驚動의 대혁명ㅡ3운법칙과 3위1체 법칙을 아는 자에 한해

 재차 강조하지만 짝의 법칙이 아니고는 성경이 제대로 설명이 인됩니다. 초대교회 때는 단지 진실이 그러하니까 달리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없고 단지 수용하기만 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그 동안의 사탄의 모든 거짓말을 까발려 진실을 드러내는 때인지라 더욱 그러합니다. "3위1체"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에덴이 이 자연계와는 정반대의 성질인 초자연계란 점에서 또한 그러합니다. 가장 이상향적 삶을 보장해 주는 사랑과 삶의 법칙 즉 생명의 법칙의 핵심인 자기 부인(자아중심과 정반대)을 각자의 마움에 각인시키는 일에서도 이 지식은 필수입니다. 갑과 을 둘의 하나됨이 갑은 오직 을을 위하고 을은 갑만 위하는 짝의 법칙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


이것이 한/韓신학(K-theology)의 특징입니다. 한신학과 한과학(K-science)은 불가분입니다. 현대물리학에서 철저한 실험을 통해 3위1체 법칙(짝의 법칙)을 자연법칙 측면에서 발견해냈다고 하지만 그 오의/奧義는 성부/聖父 하나님이 성자/聖子 하나님을 낳으셨다(만드셨다)는 데에서 처음 출발하는 것이며 이는 또한 성경에서 밝히는 3운법칙으로 상호 검증되는 터라 자체 증명이라는 확고부동의 토대는 실로 요지부동인 것입니다. 이 모두 21세기 한반도 교회에 비로소 나타내어 주신 역사적 시발점/始發點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과학"이라 불러도 어색함이 없는 것이며 '신인학/神人學(fashomology)' 이 이룰 대변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21세기 "마지막 때" 즉 메시야 우리 주님 재림 직전의 복음 전파는 말 그대로 과학("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영, 성령)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ㅡ사 34:16)으로서의 말씀 전파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과학의 혁신(이전과는 달리 지금은 모든 과학 법칙의 기본 원리 곧 짝의 법칙을 터득한 기본 바탕을 깔고 진행하게 되는 학문인 고로)과 복음/福音(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복된 소식)의 동시 전파"이니, 모든 과학적 법칙은 '창조물'이요 그 모든 법칙의 모태/母胎가 되는 것이 "3위1체의 법칙"이라 거기서 일체의 과학적 원리가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구체적 <창조주 하나님의 증명>이 3운법칙임을 항상 기억하시기를.


2024년 8월 15일 목요일

21세기 교회는 현재의 북한 교회가 그 대표적 본보기로 성령께서 정해 주신 것


바벨론 신학의 바벨론 교회(개신교와 천주교 통틀어)와의 차별화(구별)를 위해서는 "메시야 교회"라는 명칭이 바람직합니다. "메시아 교회"의 눈에 띄는 특징(대외적으로)은 사도행전 4:32("믿는 무리가...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이어야. 초대교회  당시 사도(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들 외에 "집사" 직분을 두었던 것은 교회의 이러한 구제 활동을 위한 필요성에서 나왔던 것.

메시야 교회는 일종의 새로운 "교파, 교단"처럼 할 필요는 없고 이 "마지막 때" 사명감을 절감하는 형제들의 자율/自律에 달린 것입니다. 장감침/長監侵 소속의 어느 개교회든 신앙 양심을 따라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메시야 교회" 규모는 개척교회 또는 "집교회"(고전 16:19/골 4:15/빌레몬 1:2) 수준. 그러한 "메시야 교회"로서 명칭을 붙일 경우 행정 구역을 따라 정하면 좋고 간판을 붙일 필요는 없고, 교회로서 모이는 인원수는 가정 집에서 모일 정도의 숫자면 되고 가령 12명이 되면 반으로 나누어 6명씩으로 해서 장소를 나누어 모여 다시 시작하는 등. 이렇게 갈라져서 모이다보면 예컨대 서울이면 "강남 압구정 1교회", "강남 압구정 2교회" 등.

이름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나 교회 간 교류와 식별에 도움이 되겠지요
21세기 교회 활동은 모름지기 현재 핍박 받는 교회(예컨대 북한교회)를 기준하는 것임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목사 안수 받은 사람을 배척할 필요는 없고 또 반대로 고집할 것도 없고(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구별이 전연 무의미함이 북한교회로써 충분히 입증되었으니까) 뜻 있는 형제는 누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회로서 모일" 수 있는 것. 적그리스도로의 때로 접어든 때이니까 핍박 받아 죽임을 당하는(계 13:15) 순간을 매양 변함 없이 각오하는 것이 기본 자세.

소위 "대환난울 피하는 휴거" 따위 망상은 버려야. 주님 재림 현장에서의 "휴거(공중으로 들어올려짐)" 밖에는 성경에 없으니까. '환난을 면한다'는 생각은 '잘 믿어 축복 받아 잘 산다'는 것과 똑같은 자아중심. 그렇다고 억지로 교회당 건물을 버리고 집교회 형식으로 전환한다고 해서 그것이 최상일 수는 없을 듯. 성령으로 계시는 구원자(예수)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합석하시어(마 18:20) 교회 주인이시고 친히 지도, 인도하시는 것임을 알면 그것이 "교회 운영"의 핵심. 사탄은 자기에게 넘어 온(눅 4:6) 아담의 통치권 행사이므로(아담이 사탄의 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따르는 결과로서의 범죄였으니까) 주님 다시 오시는 순간까지는 이는 불변이고 따라서 생살여탈권도 있어(12:4) 때문에 "사망의 권세"(히 1:4)를 쥔 자이기도. 고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교회 핍박, 탄압이 가능합니다.

"혼자서라도 믿으면 되지 굳이 교회로서 모일 필요가 있느냐" 하는 생각은 위험천만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님.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모이기를 힘쓰자>"(히 10:24,2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 2:45 -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성찬예식)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 2:44-46).

 

기계적 삶의 동물에게는 자연계적 생명의 육체이지만 영원성의 영혼을 지닌 인간에게 이런 육체는 곧바로 죽음의 인간고/人間苦를 뒤집어쓴 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


 

2024년 8월 14일 수요일

원래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하여 영원한 존재로 청조되었는데 아담 범죄로 동물성(인성/人性이 아닌) 육체로 전락해 죽음의 인간고/人間苦에 매몰되어버린 것이니 아아 가련하기 한없는 인생들이여


원래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속하여 영원한 존재로 청조되었는데 아담 범죄로 동물성(인성/人性이 아닌) 육체로 전락해 죽음의 인간고/人間苦에 매몰되어버린 것이니 아아 가련하기 한없는 인생들이여
 

아담 범죄 후 지금까지의 6천년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시간표에서 '0(제로)', '백지/白紙'의 시대 연속이었고 오직 <새 창조>만이 유의미, 오직 그 기록만 남을 것

 


사탄의 <색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안되는데 맨눈의 <성경>으로 세상울 인식해야 하는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성령)은 수면(물 위)에 운행(움직임)하셨다"(창 1:2). "물이 있으라" 하시지도 않았고 "땅이 있으라" 하시지도 않았고 단지 땅이 물에서 "드러나라"고만 하셨고 기존의 물을 나누시어 "하늘이라 칭/稱하셨다"고만 되어 있으니, 기존의 물에 기존의 땅이 풀어져 있었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했으니, '이전 창조'의 세계가 '와해'되어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그 당시 창조되었던 계명성(새벽별)들 중 그룹(cherub) 하나가 범죄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던 것.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6일 창조".

지금은 영물/靈物들의 일부와 아담(인간)의 범죄로 그 '6일 창조'는 다시 '와해'되고(그 이전 세계는 '물'로 망하고 지금 세계는 '불'로 망하게 예정되어) 그래서 성경에 예언된 대로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계 21:1)이 대기 중인 것. 이상은 '망하는 세상'과 '망하지 않는 세상'과의 대칭이니, 망하는 세상은 '물로써 망함'과 '불로써 망함'으로 대칭되고, 망하지 않는 세상은 다음 말씀에 해당되니 곧 "나 여호와가 말한다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사 66:22).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이 "6일 창조"는 "새 하늘과 새 땅" 창조 이전의 "혼돈", "공허", "흑암", "깊음", "물"(천하가 다 노아 홍수 당시와 같은 물 바다)로서의 참담 그 자체임을 똑바로 직시/直視해야. "6일" 창조 이전의 "혼돈", "공허", "흑암", "깊음", "물"이었던 그 패턴(pattern) 그대로에 해당되는 것 외 아무 의미가 없으니, 20세기 이후 소위 "찬란한 과학 문명"이란 것은 한낱 주검(송장) 위에 색동 비단 치마 저고리 입혀 놓은 것과 같을 뿐임. 죽음이니까 죽음 일색일 따름이지 그것이 만년을 간다 한들 생명일 수는 없으니까!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부자연, 부자유의 허망한 동물적 육체뿐만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이름으로 나오지 않는 그 무엇이든 다 철통 같은 악령들의 지배, 간섭, 통제에 포로되어 꼭두각시로 움직이는 일거수일투족이라는 비극적 실상인즉 이 어찌 "혼돈", "공허", "흑암", "깊음", "물구덩이"가 아니리요! 실상을 제대로 안다면 365일 24시간 통곡과 애처로운 흐느낌으로만 날을 보내고 밤을 지샐 일이다. 악령들에게 눈이 감겨 깜깜하여(행 26:18) 지척울 분간 못하니 악령들이 속이고 몰아가는 그대로 희희덕거리고 원수들의 장단에 놀아나는 비극만의 연출인 것이다! 이것이 일말의 거짓 없는 지금까지의 인류사 6천년 세월의 실제의 맨모습(실상)인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아 정상 상태로 "6일 창조"가 지속되어 나간다 해도 아담 후대의 일부 인간들 및 영물(스랍과 그룹이 아닌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보좌하도록 창조하신 "천사")들의 일부(지금의 사탄 일당처럼) 범죄는 필연일 것이니 어차피 '불로 망할 세상'임은 정해진 것이나, 문제가 된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아담 자신이 범죄하여 죽어버리는 서슬에 현재와 같은 6천년의 대형 사고로 홍역을 치르는 것이다. 허나 그 기한도 드디어 끝나 우리의 구원자(예수) 주님이신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다시 오심으로써 비로소 아담 통치가 이제 시작되려는 시점인 것이다. "6일 창조"를 마치신 하나님이 쉬시려고 하실 즈음에 아담 죽음이라는 이런 사달이 났으니 아담 통치가 6천년이나 늦추어진 것.

고로 그 '아담 시대'의 천년 세월을 앞둔 우리는 모든 실상을 알았으니 어리석게 악령들의 농간에 꺼둘리지 말고 놀아나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들다운 품위와 체통을 지켜 하나님의 "맏아들"로서의 우리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람들 구원해내는 일에만 오직 전념할 것이다. 우리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어떤 본을 보이셨는가. 친히 사형장으로 나가시는 사형수의 모습이셨던 것. 왜냐면 천하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서 (아담 범죄로 죽은 자이니까, 죄 값은 죽음 밖에 없으니까, 생명 아니면 죽음이라는 대칭성 즉 양면성의 짝의 법칙에서) 사형수 죄인이기에. 그 사형수의 모습으로 그 위치에 함께 있어야 함께 생명에로 인도할 수 있음이다.

이 함께 하는, 하나되는, 한 몸을 이투는(짝의 법칙에 기반한 생명의 법칙이 "한 몸"됨에 있으므로ㅡ고전 12: 26)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사즉생/死則生(죽고자 하면 살고)생즉사/生則死(살고자 하면 죽는다)의 방법 외 없는 것과 같은 것. 살면 함께 다 살고 죽으면 함께 다 죽는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이 이상향적 삶의 생명의 법칙.누구는 부하게 태어나 부자로 살고 누구는 없는 자로 태어나 없이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애초 창조가 생명 아닌 죽음으로 일체가 망가져버린 흉물스러운 죽음의 꼴불견인 것. 하나님의 창조의 뜻은 평등, 평균에 있는 것.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됨에 있으니까. 이 죽음의 세상에서 나 혼자 살고자 하는 욕심을 단죄하시는(요 12:25)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세계 지성인들이여, 현대 물리학(과학)과 성경의 완벽한 접점/接點이 짝의 법칙임을 아시는가?





이전에는 상보성 원리를 제대로 이해 못해 "짝의 법칙"의 겨우 문턱에 이르렀다고 평했지만 이제 다시 알고 보니 그 핵심을 이미 꿰뚫었고(직접 <실험>을 통해ㅡ이 점이 아주 중요), 단지 짝을 이룬 둘의 인과/因果성을 간과한 것뿐이었음.

양자역학에서 파동-입자 이중성(波動粒子二重性은 모든 물질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는 것을 말함이니, 파동과 입자를 아주 다른 성질로 말하는 고전역학에 비해 두 개념을 하나로 통합해 설명하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양자역학에서 상보성 원리는 이 물리적 실재의 성질들이 상호보완적인 <짝을 이루어 존재함>을 말함이니(그래서 "짝의 법칙"이라 하는 것) 즉 한 물리적 실재가 경우에 따라 A이기도 하고 B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A이자 B일 수는 없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빛은 때에 따라 입자 또는 파동으로 움직이되 동시에 입자이며 파동일수는 없다.

하나의 대상이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 두 가지를 모두 지니되(그 하나하나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 파동성과 입자성이 동시에 나타나는 일이 없는 성질이 상보성이다. 짝의 법칙의 핵심이, 짝을 이룬 둘이 성질은 정반대이나 본질은 하나 즉 같다는 데 있음이다. 이와 같이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도 둘인 것을 1, 2, 3위/位로 표현하는 바 때문에 짝의 법칙을 "3위1체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이는 다름아니라 짝을 이룬 둘이 본디는 하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는 극히 보편적인 상식에 속하니, 장갑, 양말, 신발 등의 짝을 만드는 과정과 같음이다. 띠라서 필자는 상보성 원리의 닐스 보어가 짝의 법칙 발견자임을 온 세계 앞에 단언하는 것이며, 3운법칙과는 상호 검증 관계에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크신 은혜 찬미, 찬송합니다>.

짝의 법칙 관련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이 "마지막 때" 우리 전도에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21세기 표적과 기사"가 3운법칙이기 때문(요 4:48/행 4:30/5:12/14:3/15:12). 그리고 성경에 처음부터 이 짝의 법칙이 너무나 자세하고 완벽하게 설명되어 있고 3운법칙 역시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봉함"(단 12:4) 예언(지정해 둔 때가 와야만 그 예언의 의미 자체가 겨우 알아지는)을 비롯 요셉(야곱의 아들), 노아, 이브라함, 모세의 생애 관련한 성경상의 자세한 설명이 아니고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에게 K-theology(한신학/韓神學)와 K-science(한과학/韓科學)는 "한약방에 감초 가듯" 해야. 특별히 중국인을 상대해서는 노자/老子를 120분 활용해야.

(요한복음 4:48) -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사도행전 4:30) -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사도행전 5:12) -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니
(사도행전 14:3) -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님을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님께서 저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시어 자기 은혜의 말씀의 증거를 주시니
(사도행전 15:12) -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로마서 15:18) -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함이니


2024년 8월 11일 일요일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니 평생 가까이 해야



 

돈을 사랑함은 세상 사랑의 상징이자 증거ㅡ모든 이단 사이비의 특징은 세상 사랑과 돈 사랑ㅡ죽음과 원수 사탄의 나라인 이 세상에서 "없는 자, 약한 자, 천한 자"됨을 외려 자랑, 은혜로 여겨야.

 


천국 가는 것(영생)이 험한 것이 아니라 범죄로 영생에서 추락해 떨어진 죽음의 영역이니까 당연히 험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부터 좀 제발 제대로 하라는 말인데 말귀도 못알아듣수?


 

21세기 모든 교회 목자의 자격은 오직 "양 무리의 본"(벧전 5:3)이 됨에 있지 "설교"에 있지 않아 (2)


 

21세기 모든 교회 목자의 자격은 오직 "양 무리의 본"(벧전 5:3)이 됨에 있지 "설교"에 있지 않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ㅡ다시 정리하면 (끝)

 사는 것이 무엇인가. 첫째는 생명의 법칙대로 사는 것이니, 나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으로 각자 이웃을 위함이 가장 이상향적 삶의 유일한 방법이기에 그렇고, 둘째는 영원히 사는 것이니 죽어 없어질 것을 창조하실 리가 만무한없는 것입니다. 자연계 동식물은 그 종/種이 처음 창조된 그대로 오늘날까지도 이어 갑니다. 개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은 신진대사 작용과 같을 뿐. 그러나 인간은 영원성의 영혼이 있어 각 개인이 그와 같은 "종"에 해당됩니다. 현재의 동물성 육체는 아담 범죄의 비극적 결과일 뿐. 지저분한 모든 사탄의 거짓말과 속임수에서 한시바삐 벗어남이 시급합니다.우리의 구원자("예수"의 뜻이니 막연히 "예수님"이라 하지 말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 의미 따라 호칭함이 듣는 자에게 유익된 것이니 따라서 구원의 역사가 종료되는 재림시에는 그 호칭도 바뀌어지신다고 했음) 주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이심을 항상 (명심하여) 인식해야.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이므로 첫 창조처럼 <완벽> 그 자체입니다. 두 번 다시 더 손볼 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복음을 받아 믿는 순간부터 이전 아담(범죄 전) 시대와 같은 완전한 상태이 우리가 위치함을 알아야. 다만 사람에 따라 그 반응 정도가 천차만별이라 스데반처럼 믿는 즉시 성령 충만한 이가 있는가 하면 아나니아/삽비라 부부처럼 결국 멸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는 것.


이 "완전"함은 주님의 나 위한 죽으심과 부활 그대로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재하심으로 인하여 말 그대로
나와 "하나"되심(짝의 법칙 따라) 즉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됨으로 형성됩니다.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대로 (문자 그대로)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니 이 사실로써 우리 자신을 세뇌시켜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이루어진 사실>을 믿음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는 이전의 사람들도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 사람에 한하여 넉넉히구원 받아 하나님의 일함에 하등 지장이 없었던 것은 비록 그 자신은 위의 설명과 같은 지식이 없어도 이미 이루어져 있는 "하나"되심의 대역사/大役事는 이루어져 있어 차질 없이 성령 안에서 유감 없이 가동/稼動되므로 그런 것.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것을 이루실 줄 믿은 그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 따라 차질 없이 이루어 주심 입니다.

고로 죄를 이기는 막강한 능력이 내 안에 성령으로 포진/布陣하여 그 힘을 발휘하므로 우리는 사탄과의 모든 전투에서 그야말로 백전백승입니다. "패배, 좌절, 불가능" 따위 부정적이고 소극적 자세는 상념으로든 말로든 표시하면 안됩니다. 단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나의 믿음 여하에 모든 것이 좌우된다는 것. 사랑과 직결된 믿음은 내게 속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대신 믿어 주시는 일은 없으니까. 사랑은 항상 자유의지와 관련되기 때문. 이는 앞서 말한 스데반ㅡ아나니아로도 확인되는 차이입니다. 때문에 성장 속도가 느린 이도 있고, "약한" 이들도 있게 마련이고 "육신"에 얽매여 있는 현상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루신 구원)에 하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임을 항상 명념해야 합니다. 때문에 세상 끝날에까지도 성경을 읽음으로써 성령의 가르치심을 사모함을 멈추지 말아야. 진리를 바로 깨닫고 있어야 내 믿음도 헛되지 않으니까.

성경 진리를 바로 깨닫고 믿음으로써, 능력이 필연적으로 발동하는 것이지 기도한다고 열심히 구하고 조른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일체로 그 무엇이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남들을 위한> 제사장으로서의 기도가 원칙. 이렇게 묵묵한 순종 중에 <상대성의 동시성>으로 하나님께서도 풍성히 베푸시고 주시는 것.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다고 여기는 것까지 빼앗겨(막 4:25). 내가 죄 또는 육신을 스스로 못박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 안에서 못박혀져 궤멸된(롬 6:6) 사실을 믿음으로써 확인, 재확인하는 것뿐임. 주님이 <다 이루셨으니까> 나는 그것을 누리는 것뿐이요 감사, 찬미하는 것뿐. 또한 내가 세상에 대해 주님과 함께 죽었으니(갈 6:14/5:24 ) 세상과 나는 완전 단절됨을 의식하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기도. 자아중심은 세상 사랑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기도 하니까.

부정/不淨하지 않은 것도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롬 14:14)과 같이 하나님의 능력도 어린 아이처럼 믿음에서야 나타나십니다. 이미 이루어 놓으셨으니 믿기만 하면 되는 것. 이루어져 있음에도 이를 믿지 않고 내 스스로 무엇을 하겠다, 십자가에 못박겠다 등등으로 몸부림쳐보아야 그 이루심이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나기는 백년하청. 내가 나 자신에게(주님과 함께) 죽었고 오직 하나님께만 살아 있다고 믿지 않는 한 자아중심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합니다. 믿어야 구원인데 믿지 않는다는 것이 허물입니다.

성령께 대한 막연하고 흐리멍덩한 일체의 잘못된 인식과 언급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구원자(예수) 우리 주님이 지금 성령으로 여전히 활동하시는 "이름"이 성령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하나로 계시니까 동시에 아버지께서 친히 일하시고 나와 함께 계십니다(요일  2:3).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형상이시니까 항상 전면/前面에 나서시는 것뿐입니다. "세 분 하나남"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부자/父子 관계로서의 "하나"(요 10;30)이십니다. 3운법칙과 상호 검증되는 짝의 법칙에 의해 "삼위일체"는 그 의미가 이제 21세기에 명확히 드러난 것입니다.


2024년 8월 1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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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의 "마지막 때"(단 12:4) <20 세기 이후 지목/指目 예언>인 "지식 급증"의 단적 표현인 이 '과학 시대'에 조명/照明되는 성경이다보니 <과학>과 연결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고, 이 특별하신 하나님의 계시(학문적 연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와 가르치심에 따른 결과물로서의 지식이 3위1체의 법칙 곧 만유의 기본 대법칙인즉)가 장구한 역사의 인고/忍苦와 연단을 배경으로 하는 한반도 교회에 주신 특별한 은총이기에 한/韓과학(K-science), 한신학(K-theology)이라 하는 것뿐이지 무슨 거창한 의미일 수는 없다. 예루살렘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되고 전파된 애초의 하나님 구원의 말씀 그대로를 드러냄일 뿐이니까. 그리고, 초대교회 당시는 구약 시대 교훈을 배경으로 한 말씀 풀이였던 반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과학적 법칙에 따라 하나님 말씀의 전모/全貌가 세밀히 드러났다는 그 차이만 있다.


따라서 우리 "구원"의 의미를 정확히 음미할 필요가 있으니 즉 많은 사람이 오해(이해가 아닌)하는 대로 <최종 완성>이 아닌 "만유 회복"(행 3:21)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창조의 완성은 이미 "제7일"(창 1:31-2:1)째 안식하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임을 알아야. 즉 처음에는 동물적 육체, 최종 단계에 이르러 신령한 몸이라는 순서는 완성, 그 때 종료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쉬신(안식/安息)" 것. 사탄은 마치 아직도 창조를 계속 중이신 것처럼 "말씀 혼잡"을 꾀하여 "영적 죽음"이란 거짓말로 둘러댄 것이다. 지금의 새 창조는, 첫 창조가 아담 범죄로 망쳐졌기 때문이다.

"구원", "구속"이라는 말 그대로다. 물 또는 불에서의 구원은 이전에는 물이든 불이든 일절 상관 없다가 지금은 거기 빠지거나 갇혀 있으니 거기로부터의 탈출이 아닌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도 똑같은 의미요 순서다. 정상ㅡ비정상(사고를 당함)ㅡ정상(사고 수습). 영생하는 몸ㅡ이전의 동물적 육체로 다시 환원(되어버리니 영생의 몸이 망쳐진 것)ㅡ영생의 몸으로 다시 회복(구원). 성경대로 믿지 않고 거짓말을 믿으니까 어렵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도리어 성경에다 뒤집어 씌워 "성경이 어렵다" 하도록 마귀는 부추긴 것이다. 악마 사탄이 만든 말도 안되는 거짓말(인간을 처음부터 고통의 존재 즉 동물적 육체로 살도록 창조하셨다는)을 믿고서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렵다ㅡ왜 이토록 고난을 당하게 만드셨나?" 하게 만든 것과 똑같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대를 어찌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입에 발린 소리이고 그래서 자기 사랑의 자아중심일 따름. 그래서 최종 귀착점은 멸망뿐. "회복, 만회, 복구"이기 때문에 "새 창조"이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신 것이 아닌가!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아무 뜻도 모르고 안식일 지킨답시고 율법의 핵심은 간과한 그 암울함을 책망하심이었다. 이 너무나 명백한 진실을 21세기에 들어 한국 교회가 초대교회 이후 처음으로 발설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한신학"(K-theology)이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음양 이원론은 아시아 동북 지역에서 활발히 논의됐으나 그것을 과학적 법칙으로는 명확히 규정 짓지 못해 정확히 자리매김할 수 없었는데 현대 물리학에서의 상보성 원리, 양자 역학 등의 화려한 등장과 함께 성경의 "3위1체"가 명확히 밝혀지는 첫 계기가 한국교회를 통했으니 때문에 "한과학(K-science)이 곧 한신학(K-theology)"이라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 모든 과학의 <뿌리>가 성경(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이신 것이니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


2024년 8월 9일 금요일

하나님이 한류를 주심은 한과학(K-science, "2"의 과학), 한신학(K-theology) 전파 목적(한신학이 한과학, 한과학이 한신학) (1)



거의 2천년간 엉뚱한 거짓말이 소위 기독교 교리로서 전승/傳承되어 온 비벨론 신학의 그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속임수를 가장 알기 쉽게 한 마디로 지적해 내라면, "창조주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다" 할 것이니 즉 "'에덴'은 자연계를 초월한 영계"라는 말일 것이다. 자연계가 있으니 반드시 그와 성질이 정반대인 영계가 있음이다. 오늘날 과학시대에 과학적으로 설명함이다. "2"의 과학. 이를 바꾸어 말하면 사탄 악령은 초대교회가 가동되기가 무섭게 손을 써 초대교회 복음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 유사 복음(바벨론 신학)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성경의 내용이다" 하고 "꾀기" (계 12:9) 시작한 역사가 2천년이 가깝다는 뜻. "2천년이나!" 하고 놀랄 것은 없다. 그것이 이 마귀가 "이 세상의 신/神"(고후 4:4)이라는 즉 이세상을 사탄이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바울 사도의 목회 서신 역시 이를 입증함이니 "말씀 혼잡"(고후 2:17, 42)이 그것이다.


사도들의 생전에도 그와 같은 마귀 사탄의 수작질을 못참았으니 하물며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오죽하랴! 그러고도 오늘날 2천년이 지났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대로의 "바벨론 신학" 현상이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리라. 왜냐면 마귀가 이세상을 지배하는 신/神이라는 성경적 사실을 의심하여 한낱 지어낸 이야기라고 입방아를 찧게 되었을 테니까! 그러므로 당연 수순을 밟은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 말 것이다. 성경을 너무 모른다는 핀잔만 듣게 될 테니까! 또한 사탄의 사탄다운 특징은 그 거짓말(요 8:44) 즉 속이고 "꾀는"(창 3:4,5) 데에 있음이 이미 창세기에서 증명되었으니까.

고로 이는 왜 초대교회 당시부터 사도들에게 오늘날과 같은 2의 과학(또는 3의 과학)을 통해 쉽게 이해하도록 해 주시지 않았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되기도 한다. 그 "때"(전도서 3:1-8)가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또한 솔로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지혜. 3운법칙도 이 '때'의 과학적 서술인 것이다. "저들이 예수님을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라"(요 7:30).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라"(8:20).

양면성(대칭성, 짝)의 원리를 따라 자연 물질계가 있으니 불가시적 반/反물질인 영계가 있게 마련. 성경은 '2의 과학'으로써가 아니면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유일하게 특징이 있는 것이니 모든 "<법칙>적 과학"의 하나님, 모든 법칙을 창조하신 하나님, 모든 법칙의 기반인 짝의 법칙(만유의 대법칙)을 '최초로 이루신 모습의 존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이러한 영계 곧 초자연계에 아담을 두셨다 해서 아담의 당시 육체가 "신령한 몸"(고전 15:44)이라는 것이 아니라(물론 당연히 그러하지만) 상식적으로 하나님이 아담에게 죽고 썩어 없어지게 육체를 만들어 주실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인간으로서의 사도들의 말이 아니라 성경(베드로 사도가 바울 사도의 편지를 "성경" 이라 명백히 했듯이-벧후 3:16)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성령으로 계시는 예수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서의)에 "죽음은 죄의 대가/代價"(롬 6:23)라 못박은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니 그 죄값이 육체적 죽음인가 아니면 바벨론 신학의 횡설수설인 "영적 죽음"인가? 어느 것인가 확실히 답하라!

하나님이 한류를 주심은 한과학(K-science, "2"의 과학), 한신학(K-theology) 전파 목적(한신학이 한과학, 한과학이 한신학)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