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은 것이다(골 3:9).
주 예수님과 함께 죽어 무덤 속에 있는 것.
그 죽으신 주님께서 우리 눈 앞에서 부활하신 모습 그대로
나타나시는 그 날에야 나도 부활의 몸으로
삶을 누리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지금은 죽었으니까 생명을 못누리고
오직 메시야 주님의 죽으심을
내 몸에 짊어지는 것뿐이다(고후 4:10,11).
그런데 왜 억지로 살려고 삶을 누리고자 하는가?
때가 되어야, 삶의 때가 와야
임마누엘께서 나타나셔야 그제야 기다리는 그 때다(골 3:4).
때를 기다리지 않으면
일껏 얻은 생명(구원)을 잃는다, 빼앗긴다(눅 9:25).
아담의 범죄, 그리고 악령들의 불순종,
모두 이 "잃고 빼앗긴" 경우다.
때문에 삶이 아닌 그 이상의 "천하를 얻고도"(:25) 하신 것이다.
지금은 삶이 아니다. 어느 모로 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마귀만이 이 세상 주름잡으면서
마치 사는 곳인 양 인류를 전체적으로 속여 왔다는
그 사실만이 진실이다. 그런 인류 기만사가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다.
이렇게 속아 온 역사의 인류사.
지질학자들은 기만년이 아니라 수십억년이라 하는데
그런 것이야 얼마든 무엇이라 하든 좋다.
단 성경은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설명한 적이 없으니까.
설명하지 않고 간단히 "생략 처리"해버렸다.
6일 창조 이전의 세계는 "암흑, 혼돈, 물"로써 생략해버린 것이다.
바로 그 생략된 세계 때 스랍과 그룹들이 창조되었고
이들은 영물로서 초자연계 존재이므로
그 대칭인 자연계가 분명 있었다는 것만
우리의 6일 창조로 보아 명백한 것이다.
스랍과 그룹이 창조되던 초자연계(영계)가 바로 "에덴"이다.
창세기에 에덴동산이 그 "에덴 동편"에 창설됐다고 했다.
고로 이미 에덴이 있었음이 명백하다.
자연계만 그룹의 반역으로 인한 분란으로 "물로써 망한" 결과
그렇게 물과 암흑과 혼돈만이 남았던 것.
이제는 물과 대칭인 불로써 다시 한 번 최종적으로 망할
그 시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벧후 3;6,7).
6일 창조에서 제4일째 날에 천체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광명을 만드셨다 했으니 빛을 내게 하셨다
또는 발광체가 되게 하셨다 정도로 알면 되는 것이다.
주야를 가리는 시간 단위가 이 때 정해졌음에도
이미 하루, 이틀 하나님 창조의 시간은 세어져 나갔으니
그 하루가 우리가 아는 하루와는 차이가 엄청나다.
땅(지구)은 이미 있어 물로써 잠겨져 있는데
나중에 천체가 만들어졌다고 믿은 황당함ㅡ모두 마귀의 "꾐" 덕분이다.
성경의 때는 분명하고 진실은 명백하고
마귀의 속임수는 천하를 휘덮고 있고
단지 이 현실대로만 정직하게 온 것뿐인데 인생들은 너무 휘둘려 왔다.
아담의 범죄로 이 꼴이 났으니
여하한 일이 있어도 생명의 법칙을 사수할 일이다.
주님께서 생명을 잃는다, 빼앗긴다 하신 것이 모두
이 똑같은 범죄를 두고 경고하신 것이다(눅 9:25).
그 범죄에는 다시는 용서하는 제물이 없다(히 6:6/12:26,29).
짝의 원리를 따라 정반대되는 성질의 이치를 따라
베푸신 마지막 구원의 기회이기에
"마지막 아담"이신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은 어느 모로 보나 사는 때가 아니다.
생명을 누리는 때는 따로 있다. 그 때까지는 죽음의 고통뿐이다.
온 천하가 사는 세상인 양 사는 소리로 천지가 진동하더라도
이 죽음의 때가 끝나는 날, 마침내 세상은 쥐 죽은 듯 고요하리라.
그 다음부터는 죽음의 고통의 나락에 떨어진 이들의
처절한, 처절한 울부짖음, 고통의 비명만이 울려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할 것이다.
생명의 환희가 영원하니
그 대칭이 되어 있는 죽음의 아비규환도 영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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