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 보완ㅡ아래 밑줄 친 곳)
"그러나 화 있을 것이다, 너희 부요(부유)한 자여! 너희는 너희 <위로>를 이미 받았다"(눅 6.24).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이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는 것이다"(눅 16.25).
"천하에 범사(매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으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전도서 3.1,2,4) 했듯이 지금 이 세상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장소도 때도 아닌데도(위로 받는 때와 장소는 천국에 들어가서야) 죽음과 사탄이 판 치는 이생에서 "하나님 축복 받아 부자로서 잘 산다"는 사람마다 축복커녕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음을 알고 깨어나야 합니다.
지금 "바벨론 교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잘 믿는 자 축복 받아 잘 사는 것이면 하나님은 믿음과 사랑과 의행/義行, 선행을 강요, 강제하심이 됩니다. 위협을 하거나 달래는 것이 되니까. 인간의 자유의지와도 상충되는 이런 억지 주장은 실로 무의미한 말이니 옛에덴에서의 거짓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평균"(고후 8.13,14), 평등입니다. 위로를 받으면 다 함께 똑같이 위로를 받아야 하고 받을 때와 위치가 아니면 똑같이 일제히 그러해야지 누구는 이러하고 누구는 저러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고전 12.26)이라 한 "한 몸"의 진실에서 그러합니다. 고로 이는 확고부동입니다.
생명의 법칙 즉 갑과 을 상대성의 동시성 곧 짝을 이룬 둘은 하나가 됨으로써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어느 쪽도 자기를 위하지 않는다는 철칙은, 하나님을 "머리"(역대하 11.22/고전 11.3)로 모신 모두가 그 "한 몸"됨의 각 지체됨을 기반으로 합니다. 몸이 하나이니 <평등하게> 그리고 <평균되게> 몸의 모든 지체에게 똑같이 임함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모두가 하나 같이 되어 머리(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을 똑같이 위해 주시는)로서의 하나님께 그 몸의 각 지체가 '하나' 의식으로 순종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이상향적 삶의 사람 사회인 것입니다.
만인 평등의 행복이 구현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러하여 <사도행전 432>(행 4.32)가 실천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런 점을 모방하여 대단한 이상주의적 이념처럼 나타나 한 때 젊은이들을 사로잡아 선풍적 인기를 몰았던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그러나 시행착오 끝에 독재자들의 먹잇감으로만 전락하여 한낱 환멸의 비애로 끝난 것입니다. 폭력으로 강제, 강요했기 때문. 자진자발적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는 한 실속 없는 헛구호에 지니지 않는 것이 공산주의의 기만성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처럼 소규모 단위별로 그런 이상적 사회 운동은 가능합니다. 일종의 경제공동체적 성격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으로서의 언약(약속) 관계에 있었기에 한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타락하여 자아중심으로 마음들이 변질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어져 흐지부지가 되었고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당연 순서란 뜻이 아니고 슬픈 현실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북한교회처럼 교회가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경우에만 다 같이 '없고' '천하고' '약한'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이루기에 오히려 형제 사랑이 굳건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를 말했지만 전체를 얘기할 때 사실상 이 세상은 모든 인간이 "죽은 자"(마 8.2)로서 "위로"가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측복 아래에서야 위로가 가능한데 "죽은 자"에게 무슨 "축복", 무슨 "위로"가 해당되나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세상에서 이미 받은 위로"는 천국에 비하면 아이들 소꿉장난에 불과한 <부자로서 호강을 누리는> 것뿐인데, 바로 이 때문에 멸망하다니! 하나님 기준에서가 아니라 사람(세상) 기준에서 다루어지는 엄연히 냉혹한 현실이기에 그러합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 및 이 엄중한 경고는 세상 불신자 상대가 아니라 교회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벨론 교회는 "축복", "축복" 소리만 남발하며 많은 영혼을 멸망 길로 몰아 넣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의 구원 받음을 확신해도 "부자 호강"은 모든 논란을 잠 재우는 확실한 멸망 건목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세상 (삶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썩음과 죽음의 동물성 육체>에다 <악령들의 지배>하에까지 있는 세상을 직시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이에 대한 해답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창조하신 적이 없고 범죄의 결과물이니까, 이런 세상 사랑은 하나님의 진노만 촉발시키는 것이야 당연합니다. 이런 흉악 흉측한 세상인데도 그 삶을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 마귀 편임을 스스로 드러내어 선전하는 꼴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고"(딤전 6.8)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면"(히 13.5)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 이상으로는 "부자"의 "이미 받은 위로"에 여축없이 맞추어지므로 경계해야 합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까"(:5) 이 약속의 말씀이 자기 의지/依支가 되어 있는 자 실로 복 있는 자입니다. "복이 있다"고 해서 지금 받는 복이 아니라 장차 받을 복입니다. 지금 여기 세상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일에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위로"는 완강히 사절해야 하는 것이 주님의 경고 말씀으로 미루어 명백합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부자되기 위해 "선한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빈궁한 자 구제"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의 마땅한 도리이자 의무인 것입니다. 자급자족 생활은 그 다음 순서일 정도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하면" 모든 힘과 관심이 하나님 섬김, 하나님의 일 특별히 오늘날 천사의 복음이 전파되는 때에는 이 사업의 원활한 집행을 위한 기도가 요구되는 때입니다.
복음 전파의 일에 헌금하는 것도 충분한 기도 중에 인도하심을 받아 결정할 일이고 전도 책자 배포도 반드시 기도 중에 이루어져야 함이니,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천사가 자동으로 개입되어 돕는 것이란 망상은 버려야 합니다. 반드시 "기도의 씨름"이 그 배경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인데, 대형 예배당을 지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생각은 너무 무식하거나 "미친 마음"(전 9.3)입니다. 마귀의 연장이요 도구인 바벨론 교회당이나 그런 모양을 냅니다. 모여서 합심 기도에 힘쓰기에는 사도시대 교회처럼("저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ㅡ행 2.42) 집에서 모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수가 많은 것에 주목하지 않으시고 기드온의 300명 용사와 같이 모인 각자의 진정성에 따라 함께 하시므로(사사기 7.2)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20) 하신 약속 말씀은 불변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부유)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다"(고후 8.9). 한 몸으로서의 <전체>가 부유해지기 위해 지금은 그 <전체>가 고난의 기간 중에 똑같이 예외 없이 산고/產苦, 산통 중인 것입니다. <전체>가 그런데도 자기 혼자만 예외인 듯 주님께서 경고하신 "위로"를 탐함은 한사코 피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의 "축복"이나 기타 말씀은 장차 독생자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친히 가르치실 모든 것을 수용함에서, 그 예비 사전 교육 차원으로 즉 유치원생에게 초보 수준으로 가르치심이었던 것이고 신약시대 즉 어른이 되어 있는 상황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 이를 구분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칙 즉 갑과 을 상대성의 동시성 곧 짝을 이룬 둘은 하나가 됨으로써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어느 쪽도 자기를 위하지 않는다는 철칙은, 하나님을 "머리"(역대하 11.22/고전 11.3)로 모신 모두가 그 "한 몸"됨의 각 지체됨을 기반으로 합니다. 몸이 하나이니 <평등하게> 그리고 <평균되게> 몸의 모든 지체에게 똑같이 임함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모두가 하나 같이 되어 머리(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을 똑같이 위해 주시는)로서의 하나님께 그 몸의 각 지체가 '하나' 의식으로 순종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이상향적 삶의 사람 사회인 것입니다.
만인 평등의 행복이 구현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러하여 <사도행전 432>(행 4.32)가 실천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런 점을 모방하여 대단한 이상주의적 이념처럼 나타나 한 때 젊은이들을 사로잡아 선풍적 인기를 몰았던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그러나 시행착오 끝에 독재자들의 먹잇감으로만 전락하여 한낱 환멸의 비애로 끝난 것입니다. 폭력으로 강제, 강요했기 때문. 자진자발적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는 한 실속 없는 헛구호에 지니지 않는 것이 공산주의의 기만성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처럼 소규모 단위별로 그런 이상적 사회 운동은 가능합니다. 일종의 경제공동체적 성격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으로서의 언약(약속) 관계에 있었기에 한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타락하여 자아중심으로 마음들이 변질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어져 흐지부지가 되었고 지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당연 순서란 뜻이 아니고 슬픈 현실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북한교회처럼 교회가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경우에만 다 같이 '없고' '천하고' '약한'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이루기에 오히려 형제 사랑이 굳건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를 말했지만 전체를 얘기할 때 사실상 이 세상은 모든 인간이 "죽은 자"(마 8.2)로서 "위로"가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측복 아래에서야 위로가 가능한데 "죽은 자"에게 무슨 "축복", 무슨 "위로"가 해당되나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세상에서 이미 받은 위로"는 천국에 비하면 아이들 소꿉장난에 불과한 <부자로서 호강을 누리는> 것뿐인데, 바로 이 때문에 멸망하다니! 하나님 기준에서가 아니라 사람(세상) 기준에서 다루어지는 엄연히 냉혹한 현실이기에 그러합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 및 이 엄중한 경고는 세상 불신자 상대가 아니라 교회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벨론 교회는 "축복", "축복" 소리만 남발하며 많은 영혼을 멸망 길로 몰아 넣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의 구원 받음을 확신해도 "부자 호강"은 모든 논란을 잠 재우는 확실한 멸망 건목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세상 (삶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썩음과 죽음의 동물성 육체>에다 <악령들의 지배>하에까지 있는 세상을 직시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이에 대한 해답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창조하신 적이 없고 범죄의 결과물이니까, 이런 세상 사랑은 하나님의 진노만 촉발시키는 것이야 당연합니다. 이런 흉악 흉측한 세상인데도 그 삶을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 마귀 편임을 스스로 드러내어 선전하는 꼴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고"(딤전 6.8)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면"(히 13.5)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 이상으로는 "부자"의 "이미 받은 위로"에 여축없이 맞추어지므로 경계해야 합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까"(:5) 이 약속의 말씀이 자기 의지/依支가 되어 있는 자 실로 복 있는 자입니다. "복이 있다"고 해서 지금 받는 복이 아니라 장차 받을 복입니다. 지금 여기 세상은 어떤 경우에도 어떤 일에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위로"는 완강히 사절해야 하는 것이 주님의 경고 말씀으로 미루어 명백합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부자되기 위해 "선한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빈궁한 자 구제"가 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의 마땅한 도리이자 의무인 것입니다. 자급자족 생활은 그 다음 순서일 정도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하면" 모든 힘과 관심이 하나님 섬김, 하나님의 일 특별히 오늘날 천사의 복음이 전파되는 때에는 이 사업의 원활한 집행을 위한 기도가 요구되는 때입니다.
복음 전파의 일에 헌금하는 것도 충분한 기도 중에 인도하심을 받아 결정할 일이고 전도 책자 배포도 반드시 기도 중에 이루어져야 함이니,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천사가 자동으로 개입되어 돕는 것이란 망상은 버려야 합니다. 반드시 "기도의 씨름"이 그 배경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인데, 대형 예배당을 지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생각은 너무 무식하거나 "미친 마음"(전 9.3)입니다. 마귀의 연장이요 도구인 바벨론 교회당이나 그런 모양을 냅니다. 모여서 합심 기도에 힘쓰기에는 사도시대 교회처럼("저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ㅡ행 2.42) 집에서 모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수가 많은 것에 주목하지 않으시고 기드온의 300명 용사와 같이 모인 각자의 진정성에 따라 함께 하시므로(사사기 7.2)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20) 하신 약속 말씀은 불변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부유)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다"(고후 8.9). 한 몸으로서의 <전체>가 부유해지기 위해 지금은 그 <전체>가 고난의 기간 중에 똑같이 예외 없이 산고/產苦, 산통 중인 것입니다. <전체>가 그런데도 자기 혼자만 예외인 듯 주님께서 경고하신 "위로"를 탐함은 한사코 피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의 "축복"이나 기타 말씀은 장차 독생자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친히 가르치실 모든 것을 수용함에서, 그 예비 사전 교육 차원으로 즉 유치원생에게 초보 수준으로 가르치심이었던 것이고 신약시대 즉 어른이 되어 있는 상황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 이를 구분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유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때와 장소를 가린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그러한 때와 장소가 아님을 다시 강조합니다. 아담의 세계가 아니니 그런 세상은 주님 재림 후에야 이뤄지므로 그 때까지는 세상과는 <물과 기름> 사이를 반드시 유지해야 하나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마귀는 북한교회 같은 곳만 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우리와 함께"(마 28.20) 성령으로 계시는 우리 주님(사람이신 우리 군대 유일의 사령관)의 진두 지휘 아래 전투가 한창 치열한 때입니다. 다름아닌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간구하는 우리 기도자들 여러분이 그 휘하 병력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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