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0일 화요일

교회 중의 "믿음 연약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


바울 사도 역시 교회 중 "믿음이 연약한 자"(롬 14.1)가 있음을 인정했고 또한 그런 형제자매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는다"고 했으며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3)이라 했습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니 그가 세움을 받을 것이요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님께 있음"(:4)이라 했습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김이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 것이요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5-8)이라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9,10)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아 다시[거듭] 나 성령 받아 모신) 중 "믿음이 자라가는"(살후 1.3) 과정 중인 형제자매도 없지 않아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중에 "신령한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도 있어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실상도 밝혔습니다. 즉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가 있음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 할 정도였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행함이 아니냐"(고전 3.1-3) 한 것입니다. 


고로 모두가 일제히 완벽한 상대방중심으로 변하여 자아중심은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날 사정이리요. 그러나 이런 현상을 당연시함을 경계하여 교회에 대하여 엄중 경고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다"(:16,17) 했습니다.


이 세상은 사실대로 말하면 일대 난장판입니다. 영광의 신령한 몸이었던 아담이 졸지에 물컹물컹한 썩을 짐승의 육체가 되는가 하면, 인간 세상이 "미친 마음"투성이인 악령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탓입니다. 그들의 등쌀에 6천년래 안정을 찾지 못하는 가엾다, 너 인생이여! 그나마도 속아 넘어 가 여기가 삶의 본고장인 양 들떠 밤낮 저들끼리 아귀다툼을 일삼는구나! "하나님은 없다"는 악령들의 말장난에 맥없이 놀아나는구나! 이 모두 아담의 죄 곧 자아중심이 벌어들인 날벼락입니다. 생명의 상대방중심을 헌신짝처럼 여긴 메서운 대가요 보응입니다. 어찌 할꼬! 어찌 할꼬!

그래도 모든 피조물의 어버이신지라 인간 구제를 위해 친히 죽음의 진창 속으로 뛰어드신 창조주 하나님. 전체 인류와 "하나"되심의 3위1체 이치로 개개인을 원래 창조하신 그 신령한 몸으로 되돌리시고자 함입니다.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신 몸이 되신 후에 성령으로 각자 안에 임하시어 해당 인간의 영혼과 "한 영"(고전 6.17)으로서의 "하나"를 이루시면 그 사람 역시 똑같이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신 몸" 따라 "그렇게 죽고 부활하는" 몸이 됨으로써 범죄 전 아담의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복귀되는 고로 이를 "성령으로 나는(출생하는)" 것이라 하고 "새 창조"라 하는 것이며 그래서 "구원 받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한 영"으로 "하나"를 이루는 여기에 구원의 핵심이 있습니다. "대신 죽음" 따위의 무식한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제대로 읽고 오직(사람의 생각에서 난 신학 서적이나 설교집이 아닌 성경만) 명상하며 "성령의 가르치심"(요 16.13)에서 오는 "계시"를 갈망하면 아니가르치실 이유가 없습니다. "문을 두드려러, 그러면 열린다" 하심은 "두드리지 않는 자에게 열리는 법이 없다"는 바로 그 말씀. 자동적으로 알아지고 베우는 법은 없습니다. 두드려야, 찾아야, 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과 한 영, 하나되어 구원이 되는 까닭에 그래서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 주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기에 이렇게 됨에는 엇바꿔(맞바꿔) 즉 상호 교환하여 상대의 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얽혀지는> 것이니, 이것이 짝을 이룬 둘의 하나됨인 3위1체에서 "3위"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3위"가 결성되는 요건입니다. 어려운 말도 아니고 상식 차원입니다. 즉 남녀 결혼하여 "한 몸"이 되면 남편의 몸은 아내의 소유요 아내의 몸은 남편의 소유가 똑같은 이치입니다. 어느 쪽이든 자기 몸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하여 다른 이성과 별도로 관계할 때 둘의 하나됨은 와해되고 이혼이 성립되는 것입니다(고전 7.4). 이상 설명대로의 육체적 관계일 때 그렇게 갈라질 수 있고(마 19.9) 기타 다른 사유로는 이혼은 일체 불허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한 몸"에서처럼 모름지기 삶이란 것은 "한 영"으로서의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이런 관계 형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저절로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이니까. 바꾸어 말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은 모든 인간이 한 분 <머리(창조주)>를 모신 한 <몸>으로서의 각 지체 각 부분을 구성한 "하나"로서 가장 이상향적 삶을 향유할 수 있게 하려 하심입니다. 주님과 내가 짝(창조주와 피조물)을 이룬 것과 같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짝(파생하신 이와 파생되신 이)을 이루심이니 만유는 이렇게 짝(대칭)으로 빈 틈 없이 구성된 것이라 이래서 '3위1체'를 "만유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요 무릇 삶이란 것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의 법질서로 영위되는지라 성부 하나님을 위시해 일체의 존재가 상대방중심이요 생명의 세계에서는 자아중심을 찾아보려야 볼 수 없고 멸망과 죽음의 세계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실상이 바로 그러한 자아중심입니다. 고로 새 창조로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4.24/골 3.10)/된 자는 모름지기 상대방중심 일색의 인생관이니까 여전히 옛 버릇대로 자아중심인 자는 무릇 그 누구든 자기의 구원됨 여부를 스스로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자아중심이면서도 여전히 구원 받았다 고집한다면 자기 기만의 비극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명확한 진단입니다. 무조건 믿으면 무조건 구원이라는 사탄의 고색창연한 옛 에덴 거짓말의 바벨론 신학에 더 이상 휘둘리지 말고 바벨론으로부터 탈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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