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8일 토요일

"구원"은 '다시는 내가 살지 않고 내 안에 "마지막 아담"께서 사시는 것'

"천사의 복음"이 어떤 내용이기에 천사까지 등장하여 "복음을 가졌다"(계 14.6)고 하는가? "바벨론에서 나오라"(18.4) 하신 말씀과도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바벨론"이 무엇인가. 마귀 속성이니까, 하나님의 교회와 말씀에 대치되는 것이라면 사탄의 거짓말(당시 에덴에서도 송알거렸던)과 관련된 것이다. 성경이 아닌 마귀의 거짓말 그 속임수룰 여지껏 "복음 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시켜 교회를 유인해 믿도록 한 것인데 바로 그러한 거짓말을 더 이상 믿지 말라는 말씀이시다. "천사의 복음"이라 함은 그렇게 되어 가려져 왔던 '초대교회 사도시대에 전파되었던 복음 말씀'을 다시 전파함을 지칭함이다. 그러면 우리가 현재 아는 대로 말하면, 성경의 진실성에 어긋나게 말해 온 모든 것이 바벨론이다. 그럴진대 먼저 생각나는 것이 성경에 "에덴의 생명과 나무와 선악과 나무"라 했는데 이제껏 에덴을 자연계 동산이라 했으니까 자연계에 무슨 그런 영적 속성의 식물이 있단 말인가. 분명히 거짓말인 것이다. 에덴은 신령한 세계인 것이다.


두 번째로, 에덴이 영계임을 전제할진대 거기 들락날락한 아담도 신령한 속성의 존재가 아니면 안된다. 우리와 같은 자연계 물질에만 속하는 존재가 영계인 에덴에 있을 수 없으니까! 이는 성경의 서술과도 부합한다. 에덴을 창조하셨다는 내용이 그 어디에도 없고 그냥 "에덴"이란 말이 불쑥 나오고 그 "에덴 동편에 한 동산을 창설하셨다"고만 되어 있으니까! 다시 말해 에덴이란 영계는 6일 창조 이전에 이미 창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함이다. 성경에 그러면 "그 이전 세계 창조"라는 말이 있느냐 하면 없지 않은가 할 것이나, 그 질문부터 틀렸다. 반문하노니, "성경에 그룹이나 스랍들이 창조된 내력이 기록되어 있는가?" 없다. 다시 말해 그룹 스랍 창조의 건은 성경에 생략된 것으로서 에덴도 여기 속한다. 이유는 에덴을 영계라 규정했으니까 영적인 것은 영속성이 있어 이 모두 그런 영속성을 말함인 것이다. 즉 "6일" 창조 이전에 창조된 세계가 있었었고 그러다가 어떤 사건으로 해서 그 '물질계'는 망했고 '영적 속성인 것'만 남게 되었다는 결론이다.

그런 힌트라도 성경에 있는가? 힌트가 아니라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1) 방금 지적한 에덴, 스랍과 그룹의 존재. (2)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다"(벧후 3:6) 하고, "그때 세상"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없이 그 대신 그 다음 7절에 "세상이 불로 망할 것"을 대칭적 의미로 설명하고 있어 한 때 세상이 물로 망한 일이 있음을 명백히 했다. (3) 그러면 그런 암시라도 성경에 있는가 묻는다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다"(창 1:2) 했으니 이미 "땅"/"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뭍이 드러나라"(:9)고만 하셨기 때문. (4) 최초의 창조시라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말할 리가 없다. 멸망한 세상 그대로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이 6일 창조를 위해 세상을 미리 "혼돈과 공허와 흑암, 깊음을 조성하셨다"는 말 밖에는 안되니까. (5) 성경에 "무저갱" 언급이 있음에도 "6일" 창조 그 어디에도 "무저갱 창조" 관련 언급이 없으니 이미 창조되어 있었다는 명백한 의미이다.

고로 다음 결론은, 이런 영계인 에덴에서 아담은 당연히 신령한 몸으로서 영생하도록 창조된 존재였으니 아담에게 영혼이 이미 조성되어 있었음이 그 증거.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에게 썩어 없어지는 육체를 붙여주셨다는 망상은 하나님께 대한 불경죄와 맞먹는 것이니 앞으로는 절대 이런 막말을 하지 말 것이다. 고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 5:12)에서 아담의 이 죽음을 "영적 죽음"이라 하여 사탄의 거짓말의 나팔수가 되어 복음 전도자가 아닌 사탄의 거짓과 속임수 전도자가 되어 온 것을 회개하고 이제는 진실과 진리만을 선포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엄숙히 약속하라. 더 이상 사탄의 주구 노릇을 하지 말 것이다. 이런 무지무식으로 일관해 왔으니 "사랑의 선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이토록 인간고의 대상으로 인생을 만드셨나는 맹렬한 질문 앞에 "아담 범죄로 물질적 동물성 육체로 전락한 때문"이란 설명 한 마디면 끝날 것인데도, 그 명쾌한 "이유"는 못대고 입도 뻥끗 못하고 쩔쩔매기만 했던 한 없는 수치스러움이여!

"영적 죽음"이란 정신 나간 소리 말고도 "대신 죽음"이 또 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어떤 기괴한 결론이 나냐면 "우리 대신 죽으셨으니까 우리 모두는 죄를 얼마나 지었든 간에 어떤 이유로든 죽지 않는다"가 합법적이 된다. 이미 "죄"/"죄인" 처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로 <일사부재리>다. 지능지수가 낮은 사람에게나 매혹적이게 들릴 궤변이다. 이미 지은 죄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대신 죽음"으로 마무리하기는 세상 천지 "기독교"란 집단 밖에 없다. 그러고는 이것을 "은혜"니, "선물"이니, "믿기만 하면 된다"느니로 야단법석이다. 그리고는 하는 행동들은 낯 두꺼운 "위선자"의 그것이다. 아서라, 말어라. "구원"은 "나의 죄에서의 구원"(마 1:21)이다. 해결은 "나의 육체의 고난"(벧전 4:1) 즉 죽음뿐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죽음이요 "함께 장사 지내짐"(롬 6:4/골 2:12)이다. 고로 "나"라는 자아중심 즉 "죄의 몸은 파괴되어"(롬 6:6) 없다. 이는 예수님과 "함께 죽음"(롬 6:6/갈 2:20/5:24)으로 되어, 다신 내가 살지 않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제는 내가 사는('개역한글판"에서 "산 것"이라 함은 아주 잘못된 것; '개역개정', "새번역'이 이 경우 맞음)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사신"이 아님)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개역한글', '새번역'에서는 "자기 몸"이라 했지만 '개역개정'과 KJV에서는 "자기 자신". "자기 몸"일 때는 '한 때 죽으심'의 '자기 몸'의 의미가 되지만 "자기 자신"일 때는 '자기의 존재 전부'란 의미가 되니까 올바른 번역)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즉 '그리스도와의 교차(맞바꿈) 삶'이 우리 구원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 한 구원 받음이 아님을 이 시간부터 우리 각자 부디 마음에 아로새기기를. 이는 "주님과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기 때문. "한 몸"(7:4)에서 남편 몸은 아내 것, 아내 몸은 남편 소유라는 역시 맞바꿈(교차)이니 곧 '3위1체 만유 기본 원리'를 따름이다.

다시 말해 3위1체의 원리 곧 짝의 법칙대로의 쌍방 피차간 상대방중심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 선언하신 그대로다. 구원은 이 삶의 기본 구도인 상대방중심에서 벗어나 자아중심이 됨으로써 범죄하여 죽음(멸망)에 이르렀으나 이제는 독생자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십자가 은혜 공로로 원상복귀됨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애초의 '상대방중심의 삶'으로의 복귀다. 창조주 친히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3위1체의 기본 원형이시니까 상대방중심의 삶에서도 원형태이심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지으신 이 피조물 세계에서 자아중심은 그 어디서도 통하지를 않고 용납이 되지 않으며 범죄로만 나타나 죄악시되는 것이다. 고로 오늘날 21세기인들은 모름지기 이 "삶" 관련 인식부터 바꾸어야. 그냥 산다고 무턱대고 맹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상호간 이타적 자세에서 출발해야 보다 풍성한 공동체적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점을 터득하여 이런 차원에서 타산적으로 움직여 인간으로서의 이성적 면모를 갖추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구원 받음이 그 유일무이의 뱡법이다. 즉 "구원 받음"으로써 주 예수님과 "연합하여 '한 영'이 됨"(고전 6:17)인데 이는 예수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써 문자 그대로 완벽히 이루어지는 바, 회개(행 2:38/눅 3:8)→세례 받음→지난 날의 모든 죄 용서됨→성령 세례(성령을 "선물"로 받음 곧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해 모심)의 이 4단계가, "주(님으로서)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에서의 "믿음"인 것이다. 첫 두 단계는 내가 하는 일이고, 다음 두 단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세례" 의식을 생략하거나 "회개"에 진정성이 없이 건성으로 하거나 하면 나머지 두 단계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로 이어지지 않음은 너무나 자명하니 명심해야. 이 4단계처럼 "믿지" 않는데 제아무리 딴에는 "나는 구원 받았다"고 백 날 외쳐보아야 그것이 "구원"일 리가 만무하다. 구원을 받으니까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음으로써 구원이 성립됨이다. 왜냐면 여기서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되신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이신 까닭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의 죽음/부활이 됨으로써만 그것이 구원인데 이와 같이 주님과 내가 "한 영"으로 "연합"함으로써이고 절대로 소위 "대신 죽으심"일 수가 없다.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써만 이상 모든 사실이 현실화/구체화함이다. 예수님은 만유를 창조하신 독생자 하나님이시므로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똑같이 한결같은 내용으로 움직여 역사하시기 때문이다(히 13:8). 이것이 성령의 "선물"로서의 "무한한 은혜"되심의 의미이시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하나"되심은 "독생자를 낳으신" 순간부터서이며 이로써 '3위1체'가 '만유의 기본 원리'로 정해져 이 원리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작동은 현재도 영원 세상에서도 불변이시다. 이 사실이 21세기 "천
사의 복음"(계 14:6) 등장으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이전에는 사탄의 지배 아래 있어(아담 범죄가 자초해들인 비극적 결과물) 전혀 알 수 없었다가 천사들이 드디어 악령들을 일전 끝에 굴복시킨(12:7-9) 후인 지금에야 진상이 드러남으로써 밝혀진 "첨단 지식"에 속한다.

중요한 것은 회개다. 회개가 없으면 구원 자체가 무의미하기에. 되풀이해 죄 지을 바에야 어느 누구인들 용서를 하겠는가. 회개는 차후로는 다시 범죄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다짐이기에 비로소 구원이 유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죄를 이길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이 부여됨이 "구원"이다.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영생' 하나로만 '구원'의 의미를 한정시켜 유야무야로 만들었는데 성경에 너무나 무지한 탓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요일 3:8)이라 명시되어 있다. 우리의 "영생/구원"이란 말이 여기에 없다. "마귀의 일"은 "범죄하게 함"이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앎이니 그에게는 죄가 없다"(:5). "우리 죄를 없애려고" 오셨다. "죄를 없앰"은 "죄 용서"의 뜻이 아니다. 죄의 그루터기를 뿌리째 뽑아  근절시킴, 다시는 죄짓지 않게 함이다. 다시는 자아중심이 아닌 상대방중심으로 일관하게 함이다. 고로 "다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표현> 그대로 나만 위하시는 상대방중심으로 내게 임하셨다. 따라서 나는 이전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 명분도 근거도 사라져버렸다. 주님 앞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린 것. 나도 주님의 본을 따라 주님만을 위해 사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이 자아중심이 아닌 상대방중심이다. 상대방중심에서는 죄 짓는 것이 불가능이다. 자기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상대만 위함이니까!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정상 궤도인데, 이탈하였으니 이 자아중심을 회개함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더 풍성한 삶"(요 10:10)이 무엇이냐. 모두가 상대방중심으로 나가기로 하나님 앞에 약속하면 자아중심일 경우 나를 위하는 자가 나뿐으로 단 1인데 반해, 상대방중심이면 나 빼고는 모두가 나를 위하므로 1억의 인구라면 1의 1억배나 나를 위하니까! 지금까지 자아중심의 사탄에게 속아 크게 잘못 인식들을 한 것이다. 죽자사자 이 자아중심의 "죽는 일"만 유일의 삶의 길인 양 하나같이 매달려 왔으니까!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아아, 이 허탈함이여!

지금부터라도 늦기는 하지만 갱생의 길을 모색해보자는 것인데 이 '상대방중심 의식 심어주기' 사회 운동을 범세계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오떨까. 사람은 상대를 보게 돼 있고 자기 자신은 완전히 볼 수 없도록 창조된 터에 보지 못하는 자기 위한답시고 부질없이 부심하지 말고 아예 너는 나를 보아 주어 위해 주고 나 또한 그렇게 하는 의식/정신으로 나가면 강제로써가 아니라 물 흐르듯 순리로 사회 순화/정화 내지는 개혁까지 내다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노자가 설파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못보는 나를 위함보다 잘 보이는 너를 위함"을 사회 계약처럼 자진자발적으로 정착시키자는 시민운동. 기독교에서 "구원, 영생"이라면서도 선행을 도외시하는 패륜적 경향에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라도. 큰 것은 바라지 않아도 사회 전반에 겉쳐 저변 확대 차원으로 꾸준히 진행시켜 나가면 좋을 듯. 모두가 남을 위함이 되면 결국 사람마다가 나를 위함이 되는 것으로 결론 지어지는 간단하면서도 절대 무시 못할 이치임에도 눈을 뜨지 못하니 심히도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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