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는 법>을 모르고 여태껏 산답시고 살아 왔습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되풀이해 강조해 온 대로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보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보는 눈이 앞쪽에만 있어 자기 앞은 보지만 뒤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검은 드레스 등짝 쪽에 흰 종이 조각이 붙어 있은들 나는 보지 못합니다. 천상 남(이웃)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는데, 이럴 바에야 아예 서로 "상대방중심으로 살고 자아중심으로 살지 말자"는 <약속 맺기> 운동을 벌이면 좋겠다입니다. 상식 차원이니까 특정인 특정 단체 주도로 할 필요는 없고 서로 동조하는 마음인 사람들끼리의 자발적 움직임으로 확산시켜볼 만합니다. 모두 약속하고 이를 의식하여 언행심사 각자 조정해 간다면 바람직한 사회 정화 운동으로도 정착할 듯합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이 여기서 "약속"에 해당됩니다. 서로가 일제히 약속하는 것이니까 약속하는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간다는 특점/장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선행이나 도덕률같은 "나 혼자 힘쓴다"는 부담감도 없고 모두가 가벼운 마음으로 <모두가 위해지는 삶의 지혜>라는 인식 차원에서 시작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고 못할 것도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믿는 이들이라면 더욱 더 안성맞춤의 전도 수단이기도 합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이라는 마벨론 신학 척결에서도 행함을 강조함이니까 일조가 되겠습니다.
"저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나를 배신하였다"(호세아 6.7),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과 첫 사람 사이에 약속부터 먼저 맺어졌다는 놀라운 진실! 우리 주님 친히 밝히신 대로 이 "약속"은 하나님의 계명으로 나타납니다. 즉 "나는 너를 위할 것이니 너도 나를 위하여라"는 분부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 곧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관계 상호간의 계약이니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요 그래서 말씀을 "신구약" 즉 약속이라 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나를 배신하였다"(호세아 6.7),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과 첫 사람 사이에 약속부터 먼저 맺어졌다는 놀라운 진실! 우리 주님 친히 밝히신 대로 이 "약속"은 하나님의 계명으로 나타납니다. 즉 "나는 너를 위할 것이니 너도 나를 위하여라"는 분부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 곧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관계 상호간의 계약이니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요 그래서 말씀을 "신구약" 즉 약속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혼자 삶이 아니요 "함께"의 삶일진대 짝을 이룬 둘이 둘로서가 아닌 "하나"(요 10.30)로서의 삶이기에 육체의 "한 몸"(창 2.24)에서 남자 몸은 여자의 소유요 여자의 몸은 남자의 소유로 바뀌어(고전 7.4) 엇갈림의 교차가 이루어짐과 같이 육체 아닌 삶에서도 당연히 같은 양상과 방식으로 전환되는 것뿐입니다.
즉 갑과 을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곧 자아중심을 일절 배격하고 철저히 상대방중심입니다. 해난 사고 만나 어쩌다 절해고도에 홀로 남아 살아가야 하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삶은 무조건 상대방 위주라는 불문율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계적 삶의 짐승이 아닌 사람 및 모든 영적 존재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심이 바로 그러한 뜻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함과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요 15.10), "이를(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10.18) 하신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자아중심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범죄로 인식하는 이유입니다. 자아중심은 간단히 말해 "욕심"(약 1.15)이요 상대방중심은 사랑이니 성경이 사랑을 강조하는 이유가 사랑이 생명(삶)과 직결되어 있음입니다. 사랑의 본은 우리 주님 친히 보여 주신 그대로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니"(요일 3.16). 사랑이 무슨 고매하고 고답적인 것도 아니고 평범한 상식이고 또 당연한 사람 삶의 하나 밖에 없는 방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자아중심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범죄로 인식하는 이유입니다. 자아중심은 간단히 말해 "욕심"(약 1.15)이요 상대방중심은 사랑이니 성경이 사랑을 강조하는 이유가 사랑이 생명(삶)과 직결되어 있음입니다. 사랑의 본은 우리 주님 친히 보여 주신 그대로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니"(요일 3.16). 사랑이 무슨 고매하고 고답적인 것도 아니고 평범한 상식이고 또 당연한 사람 삶의 하나 밖에 없는 방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상대방 위하기 약속 운동>처럼 시의적절한 사회운동은 없습니다. 악인/죄인더러 억지로 "선해져라, 착해지라"는 강요의 말도 아닙니다. 당신 자신의 행복을 위해 가장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할 일을 해보라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자아중심을 장려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중심을 겅제하는 것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공동 약속을 자진자발적으로 하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과거의 이른바 도덕재무장 운동(MRA)과는 다른 차원이면서도 효율성 높은 것입니다. 강압/강제를 하지 않고도 그 몇 갑절의 고단위 실천력을 과시할 수 있는 마력과 매력을 지닙니다. 아울러 이런 것이 창조자 하나님의 원래 부터서의 기본 뜻 즉 "사랑"이심을 선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위해 자신의 전부를 바치신 사랑을 납득시킬 수 있는 확실한 방안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2천년 전애 죽으신 예수("구원자"란 뜻의 히브리어) 우리 주님의 흘리신 피(보혈/寶血)의 공로가 어찌 2,000년이나 지나 태어난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일까 의아심을 품는 이들에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이름>으로(따라서 "성부께서는 <성자로 말미암아>라는 뜻이 됨)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자 완전하신 사람이신 바 그 까닭은 사람이 영혼과 육체가 하나되어 있는 이중구조이기 때문.
참고로, 2천년 전애 죽으신 예수("구원자"란 뜻의 히브리어) 우리 주님의 흘리신 피(보혈/寶血)의 공로가 어찌 2,000년이나 지나 태어난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일까 의아심을 품는 이들에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이름>으로(따라서 "성부께서는 <성자로 말미암아>라는 뜻이 됨)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자 완전하신 사람이신 바 그 까닭은 사람이 영혼과 육체가 하나되어 있는 이중구조이기 때문.
짐승은 육체뿐인 단일 구조인 반면 하나님은 영("하나님은 영이시니"ㅡ요 4.24)으로서의 단일 구조이신지라 광대무변의 우주 "안에(in)", "관통해"(through), 그리고 "위에"(above) 계심입니다. 때문에. "우주(만유)보다 크시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되심은 이전에는 육체가 당연히 없으셨으나 "마지막 아담"이 되시기 위해 친히 한 처녀의 몸(태중/胎中)에 들어오시어("영이시니까 자유자재하심) 사람되는 달 수를 다 채우신 뒤 세상 밖으로 나오심으로써 영원히 육체를 입게 되시어 사람이 되셨지만 그 영은 시람의 영이실 수 없고 하나님의 영 그대로라 그래서 사람-하나님, 하나님-사람이신 것입니다.
사람이 되셔도 이전처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되심은 불변이셨으니(때문에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 고난 고통을 성부 하나님 친히 그대로 남김 없이 다 함께 받으심ㅡ분리되어 계심처럼 보이나, 바로 이런 것이 "영"이신 특징ㅡ사람되실 순간에서만 분리되셨다가 30년쯤 후 우리와 하나되심의 의미와 목적으로 세례 요한에게 세례(이 경우 물을 뿌림이 아닌 물에 잠기심) 받으실 때 성부 하나님께서 비둘기 형상처럼 강림하심으로 다시 이전처럼 "하나"되심) 육체만 새로 생기셨지 영(성령)으로서는 여전하시어 하나님이신 까닭입니다.
이렇게 육체를 따라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육체로는 성부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영으로는 육체로 계시는 모습 그대로 믿는 각사람(자아중심을 회개하고 상대방중심으로 살기로 작정한)에게 선물로서 그 속에 계시니까 당시 갈릴리 호수가를 제자들과 함께 거니시던 그 때(지금은 신령한 몸이시지만) 그대로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하나"로서 "한 영"(고전 6.17)으로 나와 함께 계시니 주님의 죽으심 곧 내 죽음이요 주님의 부활 곧 내 부활인 것.
본디로 돌아가, 이처럼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상호 작용이 삶이요 생명입니다. 성자("마지막 아담")께는 성부께서 머리시요 우리에게는 "마지막 아담"께서 머리이십니다. 여자(아내)에게는 남편이 그 머리입니다. 먼저 나고 나중 난 순서/질서를 따름입니다(이 경우 "평등"이란 말을 쓴다면 무식의 극치가 되는 것). 짐승에게는 이 머리와 몸의 상호 작용이 기계적으로 되지민 자유의지의 인간인 고로 앞서의 설명대로 "언약(약속)"과 "계명"으로 작동되는 차이인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를 따라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육체로는 성부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영으로는 육체로 계시는 모습 그대로 믿는 각사람(자아중심을 회개하고 상대방중심으로 살기로 작정한)에게 선물로서 그 속에 계시니까 당시 갈릴리 호수가를 제자들과 함께 거니시던 그 때(지금은 신령한 몸이시지만) 그대로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하나"로서 "한 영"(고전 6.17)으로 나와 함께 계시니 주님의 죽으심 곧 내 죽음이요 주님의 부활 곧 내 부활인 것.
본디로 돌아가, 이처럼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상호 작용이 삶이요 생명입니다. 성자("마지막 아담")께는 성부께서 머리시요 우리에게는 "마지막 아담"께서 머리이십니다. 여자(아내)에게는 남편이 그 머리입니다. 먼저 나고 나중 난 순서/질서를 따름입니다(이 경우 "평등"이란 말을 쓴다면 무식의 극치가 되는 것). 짐승에게는 이 머리와 몸의 상호 작용이 기계적으로 되지민 자유의지의 인간인 고로 앞서의 설명대로 "언약(약속)"과 "계명"으로 작동되는 차이인 것입니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상대방중심의 철칙인 것입니다. 영원불변입니다. "자기 부인" 즉 상대방중심만 통하고 자아중심은 어떤 경우에서나 증오의 대상이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 하심이 주님을 위한 상대방중심, 그리고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이라는 자아중심의 가증스러움을 말씀하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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